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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01 14:46:27

장현(조선)

조선의 역관
장현 | 張炫
본관 <colbgcolor=#fff,#1f2023>인동 장씨(仁同)
이름 현(炫)
공명(公明)
품계 종1품 숭록대부(崇祿大夫)
부친 장경인(張敬仁)
모친 정부인 영산 신씨
부인 여주 이씨
생몰
기간
출생 <colbgcolor=#fff,#1f2023>1613년(광해군 5년)
사망 1695년

1. 개요2. 생애
2.1. 효종의 총애2.2. 삼복의 변2.3. 정계 복귀와 활동2.4. 죽음
3. 가계4. 여담5.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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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역관 장현은 국중(國中)의 거부로서 복창군 이정(李楨)복선군 이남(李枏)의 심복이 되었다가 경신년의 옥사(獄事)에 형을 받고 멀리 유배되었는데, 장씨(장옥정, 즉 희빈 장씨)는 곧 장현의 종질녀(從姪女)이다.
숙종실록》 숙종 12년 12월 12일

조선 제16대 인조부터 제19대 숙종 재위 연간까지 활동한 역관으로 당대의 공적인 기록인 《숙종실록》에서도 '국중(國中)의 거부' 즉, 나라 안의 큰 부자라고 할 정도로 부유한 인물이었다.

또한, 중인의 신분으로 궁녀에서 왕비의 자리까지 오른 희빈 장씨의 5촌 당숙이었다.

2. 생애

1613년(광해군 5) 역관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종2품)을 지낸 아버지 장경인(張敬仁)과 어머니 영산 신씨 판관(判官:종5품) 신철수(辛哲壽)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래로 동생 장찬(張燦)이 있었다.

2.1. 효종의 총애

1639년(인조 17) 3년마다 정기적으로 치러지는 식년시 역과 한학(漢學) 전공에 1등 1위, 장원으로 입격하면서 두각을 드러냈다. 그는 소현세자봉림대군심양에 갈 때 수행하여 6년 동안 머물면서 청나라의 사정을 파악했고, 조선으로 귀국한 뒤에는 당상관이 되어서 역관의 우두머리로 40년간 30여 차례 북경을 다니며 외교를 도맡았다. 소현세자와 심양 주재 수행원들은 볼모로 잡힌 기간 내내 역관들의 능력 부족으로 고생을 했고 역관들 역시 여러차례 교체되며 극한직업을 찍었는데 6년이나 살아남고 30번 넘게 청나라에 드나들던 것을 보면 실무 능력은 출중했던 듯하다.[1][2]
풍채가 좋고 사무 처리에 부지런했다. 일찍이 뱃길을 경유하여 중국에 갔으며, 정축년[3]소현세자를 배종해 심양에 가서 6년 동안 머물렀으므로 저들의 정상을 자세히 알았다. 돌아와서 그 공로로 승자(陞資)하여 수임(首任)이 되었고, 수임으로 있던 40년 동안 연경에 간 것이 30여 번이었으며, 여러 공무에 있어 그의 주선에 힘입은 것이 많았다. 벼슬은 숭록대부에 이르렀고, 여섯 번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통문관지

특히 효종은 장현을 무척 신뢰하여 죄를 지어도 용서해주곤 했는데, 이는 지난날 심양 시절부터 가까이 지낸 까닭이었다. 1653년(효종 4) 당시 삼화(蔘貨: 상품으로 판매하는 인삼)를 지나치게 많이 가져가 무역한 일을 두고 탄핵을 받았다. 특히 압록강을 건널 때 싣고 간 짐은 50여 수레나 되었는데 '내패'(內牌)라고 하는 내수사의 표식이 꽂혀 있어서 현장에서 물의를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나 효종은 며칠 만에 사면령을 내려 없던 일로 만들어 주었다.[4]

이때의 기록을 보면, 장현을 두고 '나인(內人)의 아비'라고 썼다. 사실 장현은 일찍이 자신의 딸을 궁녀로 입궁시켰는데, 이처럼 왕실의 이름을 빌려 내수사를 이용해 더 많은 재물을 얻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그의 종질녀인 희빈 장씨의 입궁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나중에 장현의 딸은 1701년(숙종 27) 무고의 옥이 일어날 때 '장 상궁'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등장한다.

1657년(효종 8) 청나라인평대군을 호종하여 사은사로 다녀온 뒤에 정2품 자헌대부에 가자되었다.[5]

2.2. 삼복의 변

1677년(숙종 3)에는 이미 숭록대부가 되어있어 더이상 높여줄 품계도 없었다. 그래서 숙종은 자식이나 조카 중 한 사람에게 관직을 제수하라고 명했다.[6] 사대부가 아닌 중인 신분의 역관으로서는 최고의 영예였다.

또한, 이 시기의 장현은 재산 축적에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서 사재를 털어 청나라의 기밀을 알아내고, 화포를 사서 들여오는 등 사실상 대청 첩보 활동도 같이 했다.[7] 당연히 역관이 독단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국왕의 지시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주강(晝講) 입시 때 특진관 목내선(睦來善)이 아뢰었다. 신이 작년에 연경에 갔을 때 설관(舌官: 역관)을 시켜서 저들의 사정을 자세히 탐문했으나 일행 가운데는 갖고 있는 물건이 없었습니다. 역관 장현·김기문·방이민·김진립 등이 사재인 은화를 많이 소비하여 사정을 탐지했습니다. 그러므로 별단으로 서계하니 격려하고 권장하는 수단으로 논상하는 일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비변사등록》 숙종 1년 4월 23일

그러나 평상시 복선군, 복창군 형제[8]와 가까웠으므로 삼복의 변에 연루되어 있다는 의심을 받았고, 이에 따라 장현과 장찬 형제와 그 아들들은 유배를 떠났다.[9] 지금까지 승승장구하고 있었던 그가 겪는 인생 최대의 위기였다.

2.3. 정계 복귀와 활동

1686년(숙종 12)까지 계속해서 역모에 연루된 장현 등을 제대로 처벌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가 잇따랐다. 이때 구원 투수로 등장한 사람이 그의 종질녀 장옥정(희빈 장씨)이었다. 장옥정이 궁녀로 입궁한 시기를 두고 말이 많은데, 궁녀의 직업적 특성상 20세가 넘어서 되는 경우는 없으므로 어릴 때 궁녀가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10]
"외간에 전해진 말을 들으니, 궁인(宮人)으로서 은총을 받고 있는 자가 많은데, 그 중의 한 사람이 역관(譯官) 장현(張炫)의 근족(近族)이라고 합니다. 만일 외간의 말이 다 거짓이라면 다행이겠습니다마는 만약 비슷한 것이 있다면, 신은 종묘 사직의 존망이 여기에 매어 있지 않으리라고 기필하지 못하겠습니다."
숙종실록숙종 12년 7월 6일

부교리 이징명(李徵明)의 상소에서 당시의 분위기를 알 수 있다. 명문가 출신도 아니고, 중인 신분의 궁녀가 임금의 총애를 독점하고 있었고, 지난날 삼복의 변 관련 인물인 장현의 종질녀인 것이 서인의 위기감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하지만 기사환국이 일어나고 곧이어 인현왕후 민씨가 폐출되면서 장현 또한 정계에 복귀하게 되었다.

심지어 장옥정이 새 왕비로 책봉되면서, 숙종이 장씨 집안의 3대를 추증했다. 증조부 장수는 좌의정, 조부 장응인은 우의정, 사촌 장형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11] 역관 집안이 정국의 핵심에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왕의 외척이자 왕세자의 외가가 되었지만, 정계에서의 어려움은 여전히 존재했다.

특히 1691년(숙종 17) 그의 동생 장찬이 청나라에서 해외 반출을 금지한 《일통지》(一統志)[12]를 몰래 사서 조선으로 갖고 들어오려다가 책문(柵門)에서 발각되었다.[13][14] 이 일로 인해 곤란해지자 조정에서는 장찬에게 모든 책임을 미뤘고, 장찬은 금오산성 변경에서 군역을 지게 되었다.[15]

동생에 이어 장현도 조선으로 밀반입하려던 화포 25대가 봉황성에서 발각되는 바람에 관직이 깎이는 곤욕을 치렀다. 하지만 《숙종실록》에서는 사관에 의해 장현의 노력이 평가 절하되고 있다.
장현은 오랫동안 수역관(首譯官)을 지냈기 때문에 온 나라에 부자로 소문이 났다. 그 사람에게 과연 일컬을 만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진실로 사대부(士大夫)로서는 입에 올리기가 수치스러운 것이다. 더구나 몰래 문서(文書)를 구입하여 공상(功賞)을 노린 것이어서 본디 숭장(崇奬)하기에 부족한 것은 물론 말을 내린 것도 외람되다 하겠다. 그런데도 목내선과 권대운이 그의 공로를 성대히 일컫고 심지어 대신(大臣)의 은례(恩例)로까지 대우하려 하였으니, 아아, 이것이 무슨 말인가?
《숙종실록》 숙종 15년 윤3월 13일

2.4. 죽음

1694년(숙종 20) 사헌부 장령 심극(沈極)은 장현을 탄핵하면서 '재물은 온 집안에서 으뜸'이고 '가옥이나 의복은 장식은 사치'라고 표현했다. 재밌는 사실은 탄핵할 때도 그가 쌓은 부(富)는 부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장현(張炫)ㆍ장찬(張燦)은 장희재(張希載)와 가까운 친족(親族)으로서 타고난 성질이 매우 흉악하고 교활하여 재물은 온 집안에서 으뜸이요, 자질(子姪)들은 모두 수재(守宰)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가옥이나 의복의 장식은 사치하여 법도를 넘어서고 경상(卿相)과 서로 결탁하여 동류처럼 보며 크고 작은 조정의 논의에 반드시 끼어들어 모의를 하고 장희재를 지도하여 흉모(凶謀)를 이룩하도록 도왔습니다. 그 여러 자식들을 풀어 조정의 관원들을 반열(班列)의 사이에서 돼지처럼 꾸짖기도 하고 그의 종들을 사주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서 가서 시비를 엿듣게 하더니, 성화(聖化)가 새로워져서 여러 간신(奸臣)들이 쫓겨나자 밤낮으로 쏘다니므로 그들의 하는 짓을 헤아릴 수가 없으니, 청컨대 모두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소서."
《숙종실록》 숙종 20년 윤5월 13일

희빈 장씨장희재가 몰락하자 장현 일가도 마찬가지의 처지가 되었다. 장현은 처음에 경상남도 거제현(巨濟縣)에 정배되었다가 전라북도 부안현의 위도(蝟島)로 이배되었다.

그 이후의 행적은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1705년(숙종 37) 유배지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죽은 죄인 명단에 이름이 보인다.[16]

3. 가계

4. 여담

5. 대중매체

드라마의 낮은 시청률과는 별개로 성동일은 세상에 대한 복수와 신분을 뛰어넘어 출세하고자 하는 욕심을 품고 지모까지 갖춘 입체적인 인물상과 함께 허망하게 암살당한 순간 황망하고 원통함을 온 몸으로 실감나게 담아내며 명품 연기를 펼쳤다.[31] 이 덕에 성동일은 2013년 SBS 연기대상에서 우수상을 수상했다.


[1] 처음에는 단순히 청나라만주어만 쓰겠거니 해서 만주어 역관만 데려갔는데, 칭제건원한 청나라는 이미 다민족 국가가 다 되어 있었다. 만주에서의 첫 해부터 태종 숭덕제 홍타이지와 만나는 자리에 배석한 요동 출신 한족 문관들이 소현세자를 따돌림하듯이 홍타이지와 한어(중국어)로만 떠들어대며 소현세자가 쩔쩔맨 적이 있었는데, 소현세자는 단단히 약이 올랐는지 그 일을 본국에 보고하며 "만어와 한어를 모두 할 줄 아는 역관을 많이 보내달라"고 요청했다.[2] 문제는 조선 역관들의 실력이 성조 강희제, 세종 옹정제, 고종 건륭제 등 황제가 몇번씩이나 바뀌도록 허접하기 짝이 없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한어의 비중이 높아졌어도 청나라의 국어, 특히 장차 북벌을 도모한다면 군사적 요충지인 만주내몽골 지역에서 19세기까지도 제1언어로 쓰인 만주어와 몽골어가 중요했으므로 조선은 간첩질(?)을 위해서라도 만주어, 몽골어 역관들을 꾸준히 기르고 파견하여 실력을 기를 필요가 있었지만, 조선은 입관 후의 황제들이 한어를 구사한다는 걸 알면서는 편하게 한어 역관만 보내며 한어 통역만 실시하곤 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는 길을 묻다가 만주어로 안내받자 모두들 허허 웃기만 했다는 썰이 전해지고, 만주어 중흥에 관심이 많던 건륭제는 조선에서 온 역관들에게 꼭 한번쯤 "만주어 할 줄 아냐"고 묻기도 했다.[3] 여기서 정축년은 1637년(인조 15)이다.[4]효종실록》 11권, 효종 4년 윤7월 5일 무술 3번째 기사. #[5]승정원일기》 144책 (탈초본 8책) 효종 8년 1월 9일 임자 8/20 기사. #[6] 《승정원일기》 339책 (탈초본 18책) 숙종 16년 1월 25일 정사 15/26 기사. #[7] 《승정원일기》 345책 (탈초본 18책) 숙종 17년 6월 17일 신미 11/12 기사. #[8] 인조의 3남 인평대군과 복천부부인 오씨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이다.[9] 《숙종실록》 9권, 숙종 6년 5월 7일 을미 1번째 기사. #[10] 일례로 사도세자의 친모인 영빈 이씨도 6세의 어린 나이에 궁녀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11] 《숙종실록》 20권, 숙종 15년 2월 2일 경자 7번째 기사. #[12] 중국 대륙 전역을 비롯해 조공국의 지리와 기후, 풍속 등을 모두 기술한 지도였다.[13] 《승정원일기》 345책 (탈초본 18책) 숙종 17년 5월 7일 임진 5/5 기사. #[14] 조선시대 청나라 사행 조공은 일종의 '무역'이었다. 그러나 청나라에서는 병기·사서·《일통지》(一統志)·《지리도》(地理圖)·우각(牛角) 등을 거래 금지 품목으로 정하여 우리나라로 반입할 수 없게 단속하고 있었다.[15] 《승정원일기》 346책 (탈초본 18책) 숙종 17년 윤 7월 21일 갑술 5/7 기사. #[16] 《승정원일기》 427책 (탈초본 23책) 숙종 31년 11월 16일 병자 16/16 기사. #[17] 1684년(숙종 10) 식년시에서 의과에 합격하였다. 장희재가 유배간 뒤에 소식이나 알고자 2~3개월에 한 번 장희재의 집을 들렀을 뿐이라고 말했지만 웅천현(熊川縣)에 정배되었다. 1711년(숙종 37)에 황해도 재령(載寧)으로 이배되었다.[18] 6차례에 걸쳐 국문을 받다가 사망하였다.[19] 1713년(숙종 39) 황해도 봉산(鳳山)에 유배 중이었는데, 유배지를 벗어나 서울 집에 왕래하고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는 등 보통 사람처럼 생활하다가 걸렸다. # 어차피 안 풀어줄 거니까 막 나갔나보다[20] 두 아들 장문유, 장두유가 무과에 합격할 때 '자시하(慈侍下)'라는 기록되어있다. 당시에는 이미 죽은 사람이라 무고의 옥에는 연좌되지 않았다. 일찍 죽어서 다행이다[21] 1675년(숙종 1) 태어나 1697년(숙종 23) 무과에 합격하였다. 처음에 흥양현(興陽縣)에 정배되었다가 임천(林川)으로 이배되었다.[22] 1697년(숙종 1) 무과에 합격하였다. 처음에 광양현(光陽縣)에 정배되었다가 홍산(鴻山)으로 이배되었다.[23] 1717년(숙종 43) 식년시 역과 1등 1위로 합격하면서 종1품 숭록대부까지 올랐다. 원래 생부는 장천강인데 장천헌의 양자로 입적되었다.[24] 칠원현(漆原縣)에 정배되었다가 1712년(숙종 33)에 풀려났다.[25] 아명은 억기(億基)였는데, 조정에서 혼동하여 장태유와 장억기가 다른 사람인줄 알고 잡아들이려고 한 적이 있다. 하동현(河東縣)에 정배되었다가 제천(堤川)으로 이배되었다.[26] 효종 대에 궁녀로 입궁해서 상궁이 된 것으로 보인다. 무고의 옥 당시에 장현의 딸 '장 상궁'이 오빠 장천한과 재산을 놓고 다퉈서 사이가 안 좋다는 증언이 나왔다.[27] 변승업과 부인 영천 이씨의 큰며느리.[28] 무신(武臣)이 겨울에 예복을 입을 때 머리에 쓰던 방한구인데, 휘항의 앞뒤와 바깥의 가장자리를 초피(貂皮)로 둘러 선(縇)을 했기 때문에 '만선두리'라고도 한다.[29] 겉은 비단으로 만들고, 안과 선은 모두 털을 댔는데, 길이에 따라 조금 긴 것은 '휘항'이라 하고, 짧은 것은 '이엄'(耳掩)이라고 한다.[30] 작중에서 장현은 자신은 서인도 남인도 아니며, 오직 재물만을 믿을 뿐이라고 말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남인들이 대놓고 장현의 신분을 무시하고 대접이 좋지 않아서 내심 불만이 있었던 것이다.[31] 여담으로 장현이 암살당하는 곳은 좀 더 극적인 연출과 의미 부여를 위해 실제 장씨 집안의 가족묘에서 촬영했다. 경기도 고양시 성석동 고봉산에 위치한 장희빈 가족묘에는 장희빈의 아버지인 장경과 어머니 윤 씨, 오라버니 장희재 등이 묻혔다. 또한 장희빈 가족묘에는 아버지 장경을 위해 세운 장경신도비가 위치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