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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제과 일본의 관계에 대한 문서이다.2. 관계
백제의 경우 전반적으로 일본의 전신인 야마토 정권과 매우 친하게 지냈다. 한반도 계열 나라 중 일본과 가장 친한 나라를 선정하면 백제가 제일 먼저 언급될 정도이다. 백제와 왜의 우호관계는 근초고왕 시기부터 시작하는데 백제가 한창 최전성기를 구가할 이 무렵 근초고왕은 아들인 근구수왕을 보내 백제 국왕의 칠지도를 선물했고 이로서 백제 왕실과 왜 왕실은 동반자 관계로 성장할 수 있었다. 백제는 왜에게 선진적인 기술을 제공하고, 왜는 정치지형상 불안정한 백제를 유사시 군사적으로 지원하는 방향으로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형성했다. 또한 백제는 국왕의 자제들을 일본에 보내 본국의 왕에게 변이 일어났을 시 이들이 이 일에 휘말리지 않게 하고, 왕의 급사시 신속하게 후계자가 귀환해 백제 왕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마련해 놓았다. 왜 역시 파견된 백제의 왕족들을 통하여 백제와 중국의 선진 문물을 전수받을 수 있어 서로에게 윈윈이었다.이들은 또 왜국 정치에도 상당히 관여했는데 백제 입장에서는 파견된 왕족들이 왕에 오르기 이전에 정치를 먼저 배움으로써 훗날 백제의 국정 운영에 도움이 될 수 있었고 왜국 입장에서는 중요한 정치 파트너가 생긴다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백제와 왜의 우호관계는 야마토 정권의 군사적 지원을 보면 알 수 있다. 백제의 전쟁을 돕기 위해 아신왕 때 대규모 병력을 파병한 기록들이 나오며, 성왕 때의 관산성 전투 당시에도 가야와 더불어 백제를 지원했다. 백제가 멸망하려고 하자 자기네 군주의 즉위식까지 미루고 대규모 병력을 백강 전투 때 지원한 걸 보면 마지막까지 동맹을 유지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왜는 각종 연유들로 인하여 백제에 일방적으로 의존하던 대 한반도 정책을 삼국 모두와 독자적으로 외교하는 노선으로 변경하고자 했다. 여기에는 백제가 대 신라전쟁에 집중하게 되면서 한반도의 정세가 변화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가장 컸다. 이 시기의 백제는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 국가 정통성 및 영토 문제로 치고박고 싸우기 바빴던 고구려와 연합을 맺고 함께 신라를 공격했다. 고구려-백제 간의 유화적인 분위기 덕분에 고구려-왜의 교류도 보다 수월해 질 수 있었다. 반대로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이게 된 신라도 이를 타개하기 위해 아래 후술된 신라-왜 사이의 문제점들을 뒤로 하고 왜에게 화친 의사를 내비치니, 왜의 입장에서는 굳이 백제 하나만 붙들고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하지만 고구려-왜의 교류는 애초에 백제의 조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고, 예전부터 쌓여 온 왜의 반 신라 감정이 일순간에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다가 기존의 친 백제계 인사들의 영향력이 여전하다보니 신라와의 관계가 눈에 띌 정도로 호전되지는 않았다. 결국 왜는 백제 멸망 이후 백제부흥군을 지원하는 등의 기존 외교노선과 비슷한 행보를 보인다.
3. 여담
3.1. 감정의 골
다만 백제와 왜 사이에도 감정의 골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1] 7세기경에 들어 왜는 백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체적으로 중국과 통교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백제 역시 이러한 왜의 태도에 불만을 가졌다. 백제 무왕 시기 즈음엔 당나라에서 일본으로 귀국하던 왜국 사신이 동봉하던 당나라 황제의 친서를 백제가 강탈한 적도 있을 정도였고, 이 때문에 왜는 《일본서기》에 백제를 '신의 없는 나라'라고 비난하는 기록을 남기기까지 했다. 이렇듯 백제와 왜 사이에서도 불협화음은 존재했다. 그럼에도 백제 정부가 무너지고 난 이후에도 부흥군을 왜가 지원하고 유민들이 대거 이주하는 등의 관계를 보면 이는 전형적인 우방국 내의 사소한 감정일 뿐, 여느 국가 간 관계에 비해서 탄탄한 동맹이었던 것만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2]3.2. 백제인들의 신라에 대한 원한?
노태돈 서울대 교수는 《삼국통일전쟁사》에서 망국의 한을 품고 일본으로 이주한 백제 고위층이 일본의 정사(正史)인 《일본서기》를 쓰는 데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여 신라를 부정적으로 보는 역사관을 일본인들의 마음속에 심었고, 이것이 지금의 한•일 갈등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취지의 기술을 했다. 《일본서기》는 8세기 초에 《고사기》 다음으로 간행된 역사서인데, 이 책에서 신라에 대해 부정적으로 기술한 대목이 그대로 일본에서 국가적, 국민적, 공식적 對신라관-對한국인관으로 굳어졌다는 이야기이다. 1970년대 한국 주재 일본 대사관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외교 평론가인 오카자키 히사히코(岡崎久彦)는 한국의 역사 및 정치에 대해 기술한 《이웃나라에서 생각한 것》이란 책에서 노태돈 교수와 비슷한 의미로 '백제의 망령'이란 표현을 사용했다.즉, 《일본서기》에 쓰인 역사관을 배우고 자란 일본인들은 백제에 대하여는 좋은 감정을, 신라(한국)에 대하여는 나쁜 감정을 가진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일본서기》의 집필진은 가야와 백제를 자신들의 편으로, 신라를 주적 내지 속국으로 간주하는 서술 방법을 택하고 있다.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한 뒤에는 이런 적대감과 경멸감이 한민족에 대한 감정으로 바뀌어 오늘날 한•일 민족 감정의 한 축이 형성된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백제가 멸망하기 한참 이전에도 신라는 일본과 적대했기 때문에, 멸망한 백제의 부여씨 왕족이 《일본서기》에 끼친 영향으로 인해 일본이 신라를 비롯한 한반도 국가들에 대해 적대감이 생겼다고 보기는 힘들다. 게다가 저자들이 백제의 역사서를 참고했던 것은 분명하지만, 백제를 마치 왜의 속국이었던 양 일본인들 입장으로 왜곡해서 기록하는 등, 백제인들이 《일본서기》 편찬에 주도적으로 개입했다고 볼 수 없는 정황도 있다. 그리고 역사를 보더라도 신라 이외의 한반도 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