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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3:25:34

강도영 마르코


<colcolor=#000> 강도영 마르코
姜道永
파일:202209200132020.jpg
출생 <colbgcolor=#ffffff,#000><colcolor=#000,#ddd>1863년 한성부
선종 1929년 3월 12일 미리내 성지 (향년 66세)
학력 페낭 신학교 (1883년~1892년)
수품 1896년 4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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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유년기3. 유학 생활과 수품4. 미리내 성지로의 부임 및 선교 활동5.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현양 운동6. 맺음말7. 참고

1. 개요

강도영 마르코 신부는 김대건 안드레아, 최양업 토마스에 이어 조선의 세 번째 사제이며, 미리내 본당 (오늘날의 미리내 성지)의 초대 주임 신부로 오늘날 미리내 성지의 기초를 닦았다.

2. 유년기

강도영 마르코는 1863년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수행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당시 고모인 강 마리아는 병인 박해 시기임에도 불구, 집안이 천주교를 받아들이는 데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신부님에게 학업에 정진할 것을 권유하며 인현학교[1]에 입학하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19세였다. 여기서 그는 약 1년간 수학한다. 이 시기에 블랑 주교는 우수한 학생들을 선발하여 말레이시아 페낭에 있는 페낭 신학교로 유학을 보냈는데, 강도영 마르코도 김성학 알렉시오(당시 14세), 김원영 아우구스티노(당시 13세), 전 요한(당시 15세), 김 베드로(당시 13세)과 함께 첫 유학생으로 선발된다. 나중에 블랑 주교는 추가로 16명의 신학생을 선발하여 총 21명이 페낭 신학교에서 교육받도록 한다. 이들은 풍토병으로 인해 1890년 ~ 1892년 사이 모두 귀국한다.

3. 유학 생활과 수품

강도영 마르코는 페낭 신학교 유학 8년 6개월 동안 라틴어, 수사학 등을 공부하였으며 철학을 전공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2] 이후 학부 과정에 있던 강도영, 김성학, 김원영, 홍영철 루카, 김승연 아우구스티노, 최 바오로 등 5명의 신학생은 6월 20일에 출발하여 상하이를 거쳐 7월 12일 인천 제물포에 도착한다. 이어 7월 14일 명동 주교관에서 뮈텔 주교를 뵌 뒤 용산의 예수성심신학교[3]에 들어가 남은 학부 과정을 마치고 6개월 뒤인 1893년 3월 18일 강성삼 라우렌시오 등 5명과 함께 삭발례를 받고 신학반으로 올라갔다.[4]

1895년 6월 8일 강도영은 함께 신학반을 수료한 정규하 아우구티노, 강성삼 라우렌시오와 함께 대품인 차부제품을, 12월 21일에 부제품을 받았다. 그 뒤 1896년 4월 26일 약현 성 요셉 성당에서 뮈텔 주교의 주례로 저 세 사람이 사제로 서품되며, 이때 강도영과 정규하는 32세, 강성삼은 27세였다. 이들은 김대건 안드레아, 최양업 토마스에 이어 세 번재로 탄생한 조선인 사제들었으며, 페낭 유학 경험이 있는 이들 중 첫 번째 사제들이었다. 최양업 토마스의 수품이 1849년이었으니 세 번째 사제 서품식까지 47년이 걸렸으며, 한반도 최초의 성품성사였다.

4. 미리내 성지로의 부임 및 선교 활동

뮈텔 주교는 1896년 4월 26일 서품식 당일 갓등이 본당(현재의 왕림 본당,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왕림리)의 2대 주임인 알렉스(한국명: 한요셉) 신부의 사목 관할 구역을 분리하여 미리내 본당을 설립한다. 이는 한강 이남에 수립된 두 번째 본당이었다. 동시에 민 주교는 강도영 신부를 미리내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임명하였으며, 5월 20일 강도영 신부는 명동 주교관을 떠나 미리내 본당에 부임하였다.

당시 미리내 본당은 1883년 기존에 있던 교우촌을 공소로 지정하였는데 당시 신자수는 82명이었다. 이후 1893년부터 1894년까지 부이용(한국명: 임가미) 신부가 공소에 머무르며 기존의 사제관 터에 경당[5]을 건립하고 알렉스 신부의 주례로 성 요셉 성인을 주보로 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그 후 1895년 10월 부터 1896년 4월까지 빌렘(한국명: 홍석구) 신부가 이곳 사제관에 머물렀다. 당시 알렉스 신부가 병 중에 있어 빌렘 신부가 대신 사목을 맡았는데, 이때 갓등이 성당은 총 32곳의 공소를 두었기에 이를 순방하며 신자들을 돌봤다. 이때 빌렘 신부를 맞이한 신자들은 1,821명이었고 이중 미리내 공소는 177명이었다.

강도영 신부는 1896년 5월에 부임한 뒤 1897년 4월까지 첫 공소 순방을 한다. 당시 미리내 성당에 속한 공소는 양지, 죽산, 이천, 광주, 용인, 양성[6] 일대에 흩어져 있었으며, 첫 해에 설정된 공소는 미리내 공소를 포함하여 35개소, 총 1,77명이었다. 이 중 신자 수가 100명 이상인 곳은 미리내, 양지 은이[7], 양지 상하 배마실[8], 죽산 모래실 [9], 양성 원댕이 [10] 등이었다.

사실 강 신부는 1904년에서 1905년 사이에 사제관을 미리내에서 은이 공소로 이전할 계획을 세운 적이 있었다. 은이 공소는 당시 사목 관할 구역 중심에 있어 대부분의 공소가 50리 이내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성당과 사제관로 사용하기 위한 공간이 충분하지 않아 결국 계획을 취소한다.

그러자 강 신부는 뮈텔 주교에게 수차례 본당 분리를 요청하는데, 이는 날로 늘어나는 신자 수와 그에 따른 공소 순방이 점점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몇 번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강 신부의 노력으로 용인 압고지 본당을 선립, 초대 주임으로 레오(한국명: 정규량) 신부가 임명된다. 이 외에도 남곡리 본당[11]이 분리되었다.

이러한 교세의 성장 속에 강 신부는 미리내에서 사용하던 기존 성 요셉 경당을 대신할 새 성당을 건립하기로 한다. 이는 1904년 은이 공소로의 성당 이전을 기획하다 포기한 것의 대체안으로 기존 경당의 서쪽, 현재의 위치에 성당을 건립하기로 정한다. 새 성당은 1906년 중국인 인부들의 감독 아래 건립하였으며 명동 성당 건축을 감독한 푸아넬(한국명: 박도행 신부의 지원을 받아 1907년 8월에 석조 성당을 완공하여 미리내 경 내에 2개의 성당이 들어선다.

그 후 강 신부는 1907년 새 성당 좌측에 교사로 사용할 부속 건물을 세운 뒤, '바다의 별'을 주보로 하는 해성학원을 연다. 이곳은 일반 신자, 특히 소년, 소녀 신자들에게 기도와 문답, 한글 등을 가르치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나중에 강 신부가 학일리 공소[12]를 비롯한 여러 공소에 해성학원과 유사한 학교, 학당을 세우며 청소년 신자들의 신앙 교육 및 기초 교육에 이바지한다.[13]

또한 강 신부는 지역 사회의 농업에 관심을 기울였다. 공소 순방 중에는 각 지역의 농사 결과를 살피기도 했으며, 이때의 내용을 기초로 하여 미리내 지역 내의 농민들에게 수확 성과가 높을 것으로 보이는 작물이나 과수 재배를 권장하기도 하였다. 또한 나무 자를 나눠주면서 감자 농사 시 씨감자를 심는 간격이 필요함을 알렸고 수확을 올릴 방안을 알리는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부터는 미리내 인근에 뽕나무를 심고, 당시 주변에서 담배를 재배하던 신자들이 양잠을 하도록 장려하였다. 이는 조선 총독부가 연초 전매령을 발표하여 담배 농사의 마진률을 제한함에 따라 양잠을 통한 수익이 더 높았기 때문이었다.

1924년 강 신부는 복사를 맡던 민영중과 함께 해성제사와 기숙사를 건립하였고 양잠 교육을 위해 잠업전수소를 세운다. 또한 안성군에 요청하여 보조금을 받아 매년 학생 10명과 교사 1명을 선발, 양잠 기술을 익히게 했다. 이러한 강 신부의 노력으로 미리내 일대 신자들과 다른 공소의 신자들, 그리고 비신자들도 경제적인 혜택을 영위하며 일종의 농촌 부흥 운동으로 이어진다.

5.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현양 운동

신부님은 처음 미리내에 부임하면서 당시 경 내에 모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페레올 주교님의 묘소를 모시는 것에 영광으로 생각했다. 특히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묘소는 1882년 이후 시복 죠사를 위해 푸아넬 신부님에 의해 개봉된 뒤, 1901년에 재차 발굴 조사를 진행하게 되는데 이때 강도영 신부님, 푸아넬 신부님, 드망즈 신부님을 비롯한 신자들 총 30명이 참여하였으며, 김대건 신부님의 유해 중 횡대는 묘에 다시 안치하였고, 나머지 유해는 강도영 신부님의 사제관에 안치하였다가 5월 23일 궤에 담아 본래 시신을 모셨던 관과 함께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옶겨 안치되었다. 이 과정을 거치며 신부님은 김대건 신부님의 시복을 위한 헌양 운동에 자발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1921년 교황청에서 기해, 병오 박해 당시 순교자들의 시복을 위한 전(前)예비회의가 개최되었고, 서울에서는 병인 박해 당시 순교자들에 대한 교회 재판 (교황청 재판)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은경축[14]을 맞은 신부님은 김대건 신부님 탄생 100주년 기념식이 열린 용산 신학교를 방문하여 사제, 신학생들 앞에서 특강을 하기도 했으며 김대건 신부님 헌양 운동을 유도하기 위한 활동을 하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신부님은 그해 5월 개최된 사제 피정 중 김대건 신부님 현양 기념관 설립이 결정된 뒤 미리내에 건립이 되도록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데 이는 황해도 일대에서 사목을 하던 신부님들을 자극하게 된다. 특히 그들은 순교지인 새남터[15]가 참배에 최적이다라고 주장했는데, 결국 기념관을 어디에 지을지는 당시 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님의 결정에 달렸었다.

이에 신부님은 주교님을 설득하게 되는데, 당시 신부님은 "불과 몇 시간 동안 계시다가 치명[16]하신 새남터보다, 55년 (1846년~1901년)동안 묻혀 살이 썩은 미리내에 경당을 세워야 합니다. 고 (페레올) 주교님의 묘소도 이곳에 있으며, 당시 신부님의 시신을 모셔온 미리내 교우들의 열성을 기념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경당은 미리내에 세워야 합니다."라고 주장하여 주교님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에 미리내에 기념 경당이 1928년, 김대건 신부님의 본래 묘소 옆에 부지를 정하여 그해 7월 완공되게 된다. 이때 김대건 신부님과 페레올 주교님의 봉분 일대에 사제들을 위한 묘역을 조성하게 되는데 후일 신부님은 1929년 선종하신 뒤 이곳 묘역에 안장되게 된다.

6. 맺음말

강도영 마르코 신부님이 처음 미리내에 부임한 1896년 당시, 병인 박해의 영향에서 막 벗어난 조선 가톨릭 공동체는 점차 교세를 늘며 사목자들의 역할이 증가하고 있었다. 33년 동안 미리내 및 현재의 경기도 남부의 가톨릭 공동체를 살피며 신부님은 신자들의 교리 함양 뿐 아니라 신자들을 위한 사제 양성에도 노력을 기울이며, 이때 5명의 사제 [17]를 배출하게 된다. 또한 해성학원을 통해 신앙 교육 뿐 아니라 일반 학문 수양에도 영향을 끼치기도 했으며 대부분이 농민인 신자들의 수익 개선을 위한 양잠 장려 등 농촌 부흥, 계몽 운동에도 소기의 성과를 거두게 된다.

그리고 한국 가톨릭에 있어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현양 운동을 적극적으로 이끌면서 동시에 미리내가 현재 한국 가톨릭에서 지닌 위상을 얻는데 이바지하였고 오늘날 대표적인 한국 가톨릭의 성지로 자리잡게 되는데 일조하였다고 할 수 있다.

7. 참고

굿뉴스 자료실- 강도영 신부와 김대건 신부 현양
가톨릭신문-미리내성지와 강도영 신부/김대건 신부 현양 위해...기념 경당 건립 숙원 이루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미리내 성당

[1] 후일 종현학당, 제7대 조선교구장인 블랑 주교에 의해 1882년 5월 인현동에 설립되었던 인현학교의 후신으로 1883년 6월 21일 종현(오늘날 명동)으로 이전한다.[2] 이는 강도영 마르코가 귀국 직후 삭발례(削髮禮)를 받은 것으로부터 유추할 수 있다.[3] 오늘날의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4] 신학반 과정 중 폐병으로 고생하였다.[5] 현재의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기념 성당 앞, 양성면 미산리 60[6] 오늘날 안성시 양성면, 원곡면, 공도읍 일대[7] 오늘날 용인시 양지면 남곡리[8] 오늘날 용인시 양지면 남곡리[9] 오늘날 용인시 원삼면 사암리[10] 오늘날 안성시 원곡면 칠곡리[11] 오늘날 용인시 양지면 남곡리, 양지 본당의 전신[12] 오늘날 용인시 원삼면 학일2리 고초골[13] 해성학원은 교리 교육 외에 한글, 한문, 산술, 역사 등을 가르치며 애국계몽운동을 함께 했다는 점에도 의의가 있다.[14] 사제 서품 25주년 기념[15] 오늘날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촌로 80-8[16]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다[17] 이기준 토마스, 황정수 요셉, 박정렬 바오로, 김영근 베드로, 김인상 야고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