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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12-01 22:17:02

아방강역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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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의의4. 구성
4.1. 권14.2. 권24.3. 권34.4. 권4


我邦疆域考

1. 개요

파일:아방강역고.jpg
아방강역고 권4
말 그대로 우리나라(我邦)의 강역(疆域)에 대하여 살핀(考) 지리서. 조선후기의 네임드 문신인 다산 정약용이 한민족 역대 왕조들의 강역을 서술한 저서이다. 연세대학교 도서관과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 중.

2. 상세

1811년(순조 11년)에 편찬되었다. 당시 정약용은 신유박해에 휘말려 두 형과 함께 경상도 장기현에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백서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다시 강진으로 옮겨졌는데, 아방강역고 역시 이 시기의 다른 수많은 저서들처럼 유배지에서의 긴 연구 활동이 낳은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1833년 북로연혁(北路沿革) 속편과 서북로연혁(西北路沿革) 속편을 증보하고 1830년대 전후로 발해속고(渤海續考)를 증보하면서 애당초 12권의 원고로 전해졌는데, 이를 1903년(광무 7년) 장지연이 내용을 추가 증보[1]해 '대한강역고(大韓疆域考)'로 고친 것이 황성신문사를 통해 활자본 9권으로 간행되어 널리 알려졌다.[2] 이후 1936년 정인보, 안재홍이 교열하여 간행된 여유당전서 제6집 지리집에는 4권짜리로 간추린 '강역고'란 이름의 교정본이 수록되었다.[3]

고조선부터 발해에 이르는 우리나라 강역의 역사를 국내 또는 국외(대개 중국)의 문헌을 통하여 고증하였는데, 여기에 '용안(鏞案[4])'으로 운을 떼는 논평을 덧붙여 내력을 상술하고 있다.

현대에까지 논쟁이 지속되고 있는 고조선의 중심지와 발해 외에도 한사군의 위치에 대한 연구도 수록되어 있는데, 고조선의 중심지를 평양 일대로 보고 한사군을 압록강 등 한반도 북부 지역으로 비정하였다.[5] 이는 기자정전제를 평양부의 일부인 남외성(南外城) 내에서만 한정적으로 시행하였다고 기술한 동국여지승람의 기존 주장을 불신한 데에 따른 주장이다.[6] 이 같은 정약용의 학설은 현대 한국사학계의 중추적인 것으로써 계승되어 온다. 이를 두고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로 비정 하는 것이 식민사관이란 주장이 있으나 잘못된 것이며,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을 참조.

권1의 '마한고'를 통해 정약용은 목지국이 오늘날의 익산시라는 주장을 펼쳤는데, 이것이 오늘날까지도 탁견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유배 생활이 끝난 뒤로 2권을 보충한 지 오래였지만, 정약용은 계속해서 이 책의 발문을 쓰지 않았다. 때문에 귀양살이 중에 쓴 책이므로 참고 서적이 부족하였다는 토로와 함께 책 전반에 대한 해설을 덧붙인 '제강역고권단(題疆域考卷耑)'이라는 자서(自序)가 전해져 온다. 링크 참조

3. 의의

한백겸의 동국지리지이중환택리지가 그렇듯, 이 책 역시도 실학의 거두인 정약용의 저작인 만큼 사료 비판에 토대를 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또, 상술하였듯이 우리나라 강역의 고증에만 국한하지 않고 선대 지리서의 오록을 정정하는 데에도 힘썼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삼한보다는 대부분 한사군이나 발해 등 북방에 대한 경계를 밝히는 데에 주력하고 있다는 한계를 보인다. 물론 이는 정약용이 아방강역고를 통하여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거란에 의해 멸망하면서 우리의 강역이 한반도에 국한된 것을 통탄한 까닭으로 그리 서술하였으리라 사려된다. 실제로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우리 강역은 왜 한반도 내부로만 고착되어 외부 세계로 더 나아가지 못했느냐에 대한 역사지리학적 고찰이다.

여기서 '반도 중심론'을 펼침으로써 한민족 세계관을 한반도 내로 국한한 정약용의 영토 의식에 의문을 품을 수도 있지만, 이는 당시 북벌론 등의 허구적인 명분론에 대해 비판하려는 내치적 개혁론과 더불어 삼한의 영역을 한강 남쪽으로 설정하였던 기호 남인의 정치적 입장이 반영된 것이다. 다시 말해, 조선 후기 역사지리학 연구의 주류 흐름이었던 한반도 남북 이원적 체계의 관점을 계승함으로써 구태의연한 명분론적 역사의식을 탈피하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4. 구성

4.1. 권1

한국 역사에 존재했던 국가 내지는 종족[7]들의 전체 강역. 주로 고조선, 발해, 한사군, 삼한 등을 총론과 각론으로 구별하여 서술하였다.

4.2. 권2

권1 내용의 연장.

4.3. 권3

옛 국가들의 수도에 대한 고증, 지역 구분에 따른 강역 변천(팔도연혁총서)[8], 위치상 변천이 심하거나 정확한 위치 비정이 어려운 지명(특히 패수백산)에 대한 내용.

4.4. 권4

발해와 북로, 서북로 등 북쪽 변경에 관한 자료들의 보완설명.


[1] 원본에 장지연이 '연안(淵按)'이라고 하는 의견을 첨언하였고, 당시 일본 고사의 영향을 받아 임나부(任那考)를, 또 새로이 발굴된 황초령비문(黃草嶺碑文)과 당시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백두산정계비고(白頭山定界碑考)를 추가하여서 간행했다.[2] 이것을 장지연이 1928년에 다시금 우리말로 번역한 뒤 상하권으로 나누어 '조선강역지(朝鮮疆域誌)'란 이름으로 간행하였다. 아마도 실학 정신이 지니는 의식 계도를 역사지리서로써 성취하려는 민족 자주 운동의 일환이었던 듯.[3] 현대에 이르러서는 신조선사에서 발간한 이 여유당전서 판본을 1970년 이우성(李佑成)의 해제와 함께 6책으로 압축하여 영인(影印)하였다.[4] 추측건대 '약용(鏞)이 생각하는 바(案)'란 의미인 듯.[5] 이를 '반도중심론'이라고 한다.[6] 정약용은 해당 유적이 당나라 이세적이 주둔하면서 만든 둔전의 흔적일 뿐인데, 기존의 지리서들이 이것을 고조선 시기의 것으로 오인하였다고 일축했다.[7] 중국이 설치한 군현이나 말갈 등 자신들만의 국가를 세우지 못한 종족을 포함한다.[8] 물론 저술한 당시의 구분을 따르므로 지금과는 사뭇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