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47a0> 출생 | 1882년 2월 12일 |
경상남도 고성군 영오면 영산리 | |
사망 | 1939년 3월 18일 |
경상남도 고성군 | |
이명 | 강한순(姜瀚淳), 강백문(姜伯文) |
직업 | 독립운동가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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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강영순은 1882년 2월 12일 경상남도 고성군 영오면 영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땔감 장수로 일하다가 1919년 3월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한 이병홍(李炳洪)으로부터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강재순(姜在淳), 허현(許炫)[1], 이종락(李鍾洛)과 더불어 협의한 끝에 3월 18일 진주 장날을 이용해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이후 이종언(李鍾彦)에게 독립선언서를 판각하여 등사하도록 하는 한편 인근 진주의 동지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각지로 동지규합에 나섰다.이윽고 3월 18일, 그는 5천 명의 정촌면 군중과 함께 진주읍내로 행진했다. 도중에 사천의 일본군 헌병대와 진주의 일본군 수비대의 경계선을 돌파하고 칠암리에 도착했을 때, 미리 정보를 입수하고 과수원에 매복하고 있던 일본 군경과 충돌해 격투가 벌어졌다. 남달리 힘이 셌던 그는 한손에는 대형 태극기를 들고 한손으로 일본 헌병의 칼을 빼앗아 남강에 던지며 선두에서 군중을 지휘했다. 그러나 일본 헌병이 던진 포승줄에 목이 감기자 결국 제압되었고, 이후 진주경찰서로 연행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강영순은 재판정으로 호송되는 도중에 포승줄을 절단하고 일본 경찰 2명을 발로 차 쓰러트린 뒤 피신하여 강원도 일대에서 수년간 유랑생활을 했다. 그러나 1923년 종로 경찰서에 체포되었고 수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고향에서 조용히 지내다 1939년 3월 1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강영순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