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북한의 정치인이며, 농업 관련으로 일했던 사람이다.2. 생애
1885년 함경남도 이원현에서 태어났다. 1908년 고향에서 협성학교 지학교를 설립하였다. 1910년 3월 중국 장백현 으로 건너가 육영사업 및 토지개척사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1 운동에 참가하던 중 중국 관헌에 체포되어 5년간 복역하였다.1925년, 함경북도 청진 일대에서 농민운동에 종사하다가 공산당 지하조직에 관계되어 다시 15년간 복역하였다. 1940년 출소 후에도 농민운동에 종사하면서 야채조합을 조직하고 지도하였다. 광복 후 청진농민조합장, 함경북도농민조합장을 거쳐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상임위원, 3월 북조선농민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46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겸 평안남도인민위원회 위원장, 애국투사후원회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7년 2월 북조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 1948년 8월 제1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48년 민주농민동맹 위원장, 1949년 6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상무위원 등의 직책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공산주의 이론에 대한 교양이 부족하였고, 농민의 입장에서 조선로동당의 정책을 평가하였기 때문에 자주 물의를 빚기도 하였다. 1951년 2월, 김책 장의위원, 1951년 8월, 허헌 장의위원을 지냈다.
6.25 전쟁 이후에는 1955년 1월부터 1957년 7월까지 조선평화확보전국민족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1955년 8월 5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칠순기념 로력훈장을 수여받았으며,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57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중앙선거위원회 위원에 위촉, 9월에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최고인민회의 2기 1차 회의에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2월에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을 지냈다.
1958년 1월에는 조소친선협회 중앙위원을 지냈다. 1961년 5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중앙위원회 상무위원, 같은해 9월에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등을 역임하면서 김일성 유일지도체계를 수립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나이가 많아 정치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였다.
1963년 5월 15일 오후 1시, 78세를 일기로 병사했다. 북한은 조국전선 중앙위원회로 부고를 발표, "강진건 동지는 자기의 전 생애를 조국의 자유 독립과 인민의 행복을 위한 투쟁에 바쳤다. 강진건 동지의 투쟁 업적과 불굴의 애국 정신은 우리들의 가슴속에 길이 남아있을 것이다."라고 기렸다. 이후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김일성은 1970년 11월 2일, 5차 당대회 개회사에서 김계림, 김경석, 강영창, 김은순, 리봉수, 김갑순, 김태근, 안룡각, 강상호, 리주연, 김원빈과 함께 강진건을 '당에 끝없이 충실하였으며 혁명을 위하여 몸 바쳐 투쟁한 동지'로 언급하였다.
3. 장의위원회 구성
- 위원장: 리효순.
- 위원: 홍명희, 박정애, 김익선, 하앙천, 강량욱, 박신덕, 백남운, 최원택, 최현, 리기영, 림춘추, 김왈룡, 서철, 리극로, 고준택, 김천해, 허석선, 강희원, 오태봉, 홍순권, 현창룡, 로익명.
4. 참고문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강진건(姜鎭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