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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17-07-21 18:10:42

겔리 라우발

겔리 라우발은 1908년 6월 4일 린츠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안젤라 라우발은 아돌프 히틀러의 배다른 누나이다. 과부로 살던 안젤라는 히틀러가 오버잘츠베르크(Obersalzberg)에 셋집을 얻은 후 자신의 집에 와 집안일을 맡아달라고 부탁하자 1928년 딸과 함께 히틀러의 집으로 이주했다.

40살이 된 히틀러는 조카 겔리에게 매혹되었으며 그가 어린 조카와 연인관계라는 소문이 급속히 퍼져나갔다. 히틀러는 겔리에게 극도의 집착을 보였고 역시 겔리에게 관심을 보인 운전사 에밀 모리스(Emil Maurice)는 해고되었다.

두 사람은 2년동안 함께 살았다. 겔리와의 관계는 위태로운 것이었고 두 사람은 서로를 상대에게 충실하지 못하다며 비난하고 다투었다. 겔리는 특히나 에바 브라운에게 신경을 썼는데 당시 17살이던 에바 브라운은 종종 히틀러와 함께 벤츠에 동승하곤 했다.

겔리는 또한 히틀러가 그녀의 삶을 통제하려 한다며 불만을 표시했다. 1931년 9월 8일, 히틀러는 비엔나에 가고 싶어하는 겔리와 격심한 말다툼을 벌인 후 함부르크로 떠났다. 그는 차에 타기 전 겔리에게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말하지. 안돼!” 히틀러가 떠난 후 겔리는 리볼버 권총으로 심장을 쏘아 자살했다.

이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자신도 자살하겠다며 슬퍼했으나 나찌당 고위 멤버들의 설득으로 그만두었다. 겔리의 자살은 히틀러를 채식주의자로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그는 고기를 볼 때마다 겔리의 시신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겔리의 사망과 관련한 소문은 히틀러의 정적들에게 재빠르게 퍼져나갔다. 겔리가 자살하기 전에 그녀가 히틀러로부터 심한 구타를 당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겔리가 히틀러의 아이를 임신했기 때문에 자살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어떤 사람들은 겔리가 히틀러를 상대로 협박을 하려했기 때문에 하인리히 히믈러에게 살해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소문들은 입증할 만한 증거가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겔리가 자살한 이유도 의문으로 남아있다.


▶ 히틀러의 조카 패트릭 히틀러의 겔리에 대한 회상(오버잘츠베르크에서 만났을 때)

겔리는 소녀라기보다는 아이처럼 보였습니다. 솔직히 예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녀는 타고난 매력을 듬뿍 가지고 있었죠. 겔리는 모자는 쓰지 않았고 주름진 치마와 하얀 블라우스처럼 아주 평범한 옷을 입었습니다. 아돌프 아저씨가 준 순금 나치스 표장 외에는 보석도 걸치지 않았죠.


▶ 겔리가 운전사 에밀 모리스에게 보낸 편지(1928년 12월 24일)

집배원이 당신의 편지를 벌써 세 통이나 갖다주었어요. 하지만 전 지난 며칠 동안은 예전처럼 행복을 느끼지 못했답니다. 아마도 그래서 우리가 지난 며칠간 그렇게 나쁜 일들을 겪었나 봐요. 아돌프 아저씨는 우리가 2년 동안은 기다려야 한다고 하십니다. 생각해 보세요, 에밀. 2년동안 가끔씩 서로 키스만 할 수 있고 언제나 아돌프 아저씨의 간섭을 받아야 하다니. 전 이렇게 당신께 저의 사랑을 전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과 함께 할 거라는 말을 전할 수 밖에 없군요. 당신을 너무나 사랑해요. 아돌프 아저씨는 저에게 공부를 계속해야만 한다고 하시는군요.


▶ 히틀러가 친구 하인리히 호프만에게 한 말(1955년 책에서 발췌)

자네도 알겠지만 호프만, 난 겔리의 장래가 매우 걱정되고 그녀를 돌보아야 한다고 느끼고 있네. 난 겔리를 사랑하고 그녀와 결혼할 수도 있어. 좋아! 하지만 자네도 내 입장을 알 걸세. 난 독신으로 남고 싶네. 그래서 난 겔리가 적당한 남자를 찾을 때까지는 그녀 주위에 적절한 친구들만 모이도록 조종할 생각일세. 겔리는 간섭으로 느끼겠지만 사실 그건 신중함이지. 나는 겔리가 부적당한 남자들의 손에 떨어지도록 놓아두지는 않을 걸세.


▶ 히틀러와 겔리의 아파트 경호를 맡은 나치돌격대 장교 빌헬름 스톡커의 인터뷰(1974)

히틀러가 정치 집회나 당내 모임 때문에 베를린이나 다른 지역으로 며칠간 떠나있는 경우, 겔리는 다른 남자들과 어울리곤 했습니다. 나 역시 그녀를 좋아했기 때문에 그녀가 그런 날 밤에 어디서 무슨 일을 했는지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죠. 겔리가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 출신의 바이올린 연주자나 인스부르크(Innsbruck) 출신의 스키 강사와 어울렸다는 걸 히틀러가 알았다면 아마 불같이 화를 냈을 겁니다. 겔리는 제가 히틀러에게 말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하게 되자(저에게는 히틀러에게 보고하지 않는 개인적인 이유도 있었습니다.), 종종 저에게 비밀스런 이야기를 털어놓곤 했습니다. 그녀는 히틀러가 가끔씩 그녀의 방에 찾아와 그녀에게 메스꺼운 일들을 하게 시킨다고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럼 어째서 히틀러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죠. 자신은 히틀러의 요구를 무엇이든 들어줄 여자에게 히틀러를 빼앗기고 싶지는 않다고. 그녀는 관심이 필요한 여자였고 종종 관심을 끌고 싶어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분명히 히틀러의 가장 가까운 여자로 남고 싶어했죠. 그녀는 그 지위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하려 했습니다. 1931년 초엽, 겔리는 히틀러의 삶에 새로운 여자가 나타난 것 같다며 걱정하기 시작했죠. 그녀는 히틀러 아저씨가 더 이상 예전처럼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 같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습니다.


▶ 알란 불록의 책 “Hitler: A Study in Tyranny” 중 일부(1954)

겔리 라우발은 단순하고 매력적인 여성이었으며, 예쁜 목소리를 지녔던 탓에 성악을 공부하고 싶어했다. 그 후 4년동안 그녀는 히틀러의 동반자가 되었으며, 히틀러가 프린츠레겐텐플라츠(Prinzregentenplatz)에 아파트를 얻은 후에는 오버잘츠베르크에서 그랬듯이 히틀러와 함께 대부분의 시간을 뮌헨에서 보냈다. 히틀러는 후일 이 시기를 자기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로 회상했다. 그는 겔리에게 심취했으며 자신보다 20살 연하인 이 여인을 어디든 데리고 다녔다. 한마디로, 그는 겔리를 사랑했다.

겔리도 히틀러를 사랑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녀는 유명인사인 아저씨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고 히틀러와 함께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그녀는 히틀러의 극심한 질투심으로 괴로와했다. 히틀러는 겔리에게 사생활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겔리가 성악공부를 위해 비엔나로 가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겔리가 운전사인 에밀 모리스와 동침했다는 사실을 알고 이성을 잃을 정도로 분노했으며, 이후 그녀가 다른 남자와는 그 어떤 일도 하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겔리는 분개했고 히틀러의 집착과 강제에 힘들어했다.


▶ 히틀러의 측근이던 에른스트 한프스탕겔의 책 “The Missing Years” 중 일부(1957)

겔리 라우발의 죽음이 히틀러의 성격 변화에 전환점이 되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떤 형태였건, 그것은 잔혹함과 흉포함을 탈출구로 삼던 히틀러의 신경질적인 에너지를 쉬게 만들 휴식의 기회를 히틀러에게 생애 최초로 제공해 주었다. 히틀러가 에바 브라운과 가졌던 오랜 관계는 결코 히틀러가 겔리와 즐겼던 기괴한 여흥은 낳지 못했으며 따라서 어쩌면 그를 보통 남자로 만들었을지도 모르는 일 또한 일어나지 않았다. 겔리의 죽음과 함께 그의 성생활이 다시금 양성적이고 나르시소스적인 허영심 속에 타락하고 에바 브라운이 가정내 부속물 그 이상의 의미는 지니지 못하게 되면서, 히틀러가 마침내 악마로 변하고 말 것임은 분명한 사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