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옛 선경그룹 계열 신발생산/운송/물류업체. 공장은 전북 군산과 전주에 있었다.2. 역사
2.1. 초창기
1924년 이만수 사장이 군산에서 고무신 소매점을 개업한 것이 시초이다. 그 당시 군산에도 일본인이 운영하는 고무신공장이 있었는데 군산에 고무신공장 진출이 빨랐던 것은 군산항을 통해 일본 오사카, 고베지방과 교역이 활발했기 때문이다. 고베의 고무공업이 군산으로 이전,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고무공업의 특성과 관련이 있었다. 신발 원료인 천연고무는 시간이 경과할수록 변질되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가황공정[1]을 거쳐 경화시킨 후 고무신을 만들어야 했는데, 일본에서 수입한 천연고무 가황작업을 멀리 경성까지 운반해 하는 것보다 군산항에서 물건을 하역한 뒤 곧바로 작업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었던 것이다.이만수 사장은 처음 소매로 시작했던 고무신 사업을 착실히 성장시켜 도매업까지 손을 댔다. 고무신은 인기가 높은 생활필수품이었기 때문에 장사가 잘됐다.
2.2. 중흥기
그 당시 군산에는 고베에서 온 사업가가 세운 고무신공장이 있었는데, 이 공장이 매물로 시장에 나온 것이다. 이만수 사장은 일본인 사장이 공장을 내놓자 이를 놓치지 않고 인수, 1932년 11월13일 경성고무공업사를 설립했다. 이 당시 군산의 공업은 일제 독점자본으로 발전했고, 대부분의 공장이 일본인 소유였다. 1932년 이만수 사장이 설립한 경성고무공업사는 한국인 기업가에 의해 설립된 유일한 중소기업이었다. 군산시 장재동에 자리잡은 경성고무공업사는 당시 임직원이 100여명이었다.서울 이북지방에서는 삼천리표 고무신이 인기였지만, 서울 이남지역의 고무신은 경성고무의 '만월표'가 최고 인기 제품이었다. 이 때 주 생산품은 '깜둥이 신발'로 알려진 검정 고무신이었다. 검정 고무신은 주로 짚새기를 신고 다니던 일반 한국 서민들에게 대단한 제품이었고, 그 인기는 시들 줄 몰랐다. 경성고무는 점차 기술 수준을 높여 제품을 다양화 해 나갔는데, 나중에는 표백기술을 적용해 흰고무신을 생산했고, 검정 운동화에 이어 하얀 운동화도 생산했다.
경성고무공업사는 해방 직전까지 이 4가지 제품을 생산, 전국에 공급했다. 1일 생산량은 일제강점기 당시 500족 정도에 불과했지만, 해방 후 60년대 들어서는 3만족에 달했다. 시대가 변하면서 소비자들의 요구에 부응, 하늘색 등 색고무신을 출시했고, 꽃무늬 고무신과 농구화, 포화 실내화, 슬리퍼 등 다양한 제품들을 생산하며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고무신 공장은 초창기는 물론 지금까지도 제작 공정 특성상 노동집약적이다. 실제로 전성기 때 하루 3만 족 이상을 생산한 경성고무의 경우 직원이 무려 3000명에 달했다. 이 가운데 2500여명이 여성이었다. 고무판을 생산하는 롤러부를 비롯해 남자들이 근무하는 부서는 주야간으로 계속 일해야 밀려드는 일감을 댈 수 있었다. 그러나 여성 근로자들은 낮에만 근무했다.
운동화를 만들면서부터는 경성고무공업사 공장 한켠에 방직공장도 뒀다. 실을 사다가 방직공장에서 운동화용 천(캔버스)를 직접 만들었고, 여성 근로자들이 재봉틀 등을 이용해 운동화 어퍼(Upper)를 제작했다. 또 롤러 등 고무신 생산라인의 기계가 고장날 경우 공장내 기술자들이 필요 부품을 제작하는 등 직접 수리에 나섰기 때문에 공장 내에 철공소도 운영했다.
즉, 고무신공장 내에 방직공장, 미싱부, 철공소까지 둔 셈이다. 게다가 신발 크기와 모양이 각양각색이기 때문에 금형(Mold)도 수십종류에 달했다. 금형은 신발공장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 중 하나이기 때문에 디자인 전문가를 두고 금형을 떴다.
2.3. 쇠퇴
한국전쟁 이후 부산지역에는 일본의 영향을 받아 많은 신발공장들이 생겨났고, 일제강점기 이래 전성기를 구가하던 군산 경성고무는 큰 도전에 직면했다. 1964년에 이만수 창업주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 이용일[2]이 가업을 이었다.1970년대 초반, 경성고무는 고무신 외에도 폴리우레탄과 스폰지를 생산하며 고무신 쪽 경영난을 타개했다. 방한용 의류 안감용으로 인기가 높았는데, 의류업자들이 스폰지를 확보하기 위해 몇 천만 원씩 선불을 주고 공장 인근에서 대기할 정도여서 경영에 큰 도움이 됐다. 당시 대부분의 방한의류에 스폰지가 들어가야 소비자들이 눈길을 주었으니, 의류업자들은 스폰지를 사기 위해 장사진을 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노동집약적인 신발공장이 많아지면서 경쟁이 심화하고, 인건비까지 크게 오르면서 경성고무는 바이어가 원하는 신발가격을 제시하기 힘들어지는 경우가 많아졌다. 19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며 한국 신발산업은 급격히 퇴조했다. 민주화 운동, 노동운동이 거세게 일면서 신발공장 근로자들의 임금 인상 압력이 커졌고, 비싸진 임금 부담을 견디지 못한 부산지역 유수의 신발공장들이 문을 닫거나, 중국·베트남 등 인건비가 싼 지역으로 대거 빠져나갔다.
또한 1972년 부터 큰 화재가 3차례에 걸쳐 잇달아 일어난데다 수출부진으로 계속 적자에 시달려오다 1979년 선경그룹과 합자 경영에 들어가면서 이용일 사장은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기 시작했고, 1983년에는 선경에 완전 매각했다. 선경은 경성고무를 인수한 후 신발수출업으로 업종을 변경시켰고, 1988년 군산공장을 분리 후 (주)선화로 출범시켰고, 1990년에 전주공장을 노조에 넘겨 (주)원양으로 출범시켰다.
결국 본사는 운수업 등지로 전환한 채 그룹 내에서 애물단지로 전락해 1998년부터 SK창고에 합병되어 65년만에 소멸되었다.
3. 기타
- 이만수 창업주는 일제 말 '大平晩秀'로 창씨개명 후 '조선임전보국단'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39년 군산신사 개축비 1천 원, 1940년 전북 군산향군분회 사격장 건설비 명목으로 1,700원을 각각 냈고, 1944년에는 중일전쟁 관련해 일본 육군성에 국방비 16,000원을 낸 공로로 쇼와 덴노로부터 감수포장을 받는 등 친일 행적을 벌였다. 1945년 8.15 해방 후 해당 행적으로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5개월 후 보석으로 풀려났다. 그럼에도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지 않았다.
- 군산시 장재동 1만여평의 부지에 자리잡았던 경성고무 신발공장 자리에 현대세솔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1] 생고무에 황과 열을 가해 경화시키는 작업[2] KBO 리그의 역사를 알고 있는 이들에게는 친숙한 이름이다. 군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가 창단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해준 전북야구의 대부이며 훗날 KBO 리그가 창설될 때 산파 역할을 하며 초대 사무총장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