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대외관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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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와 옥저의 관계이며 고구려가 옥저를 멸망시킨 서기 285년까지 관계가 있었다.2. 역사
옥저는 국가 부족 집단이었기에 고구려의 단결력은 따라갈 수 없었고, 북옥저, 남옥저, 동옥저 등으로 나뉘어 고구려에 차근차근 복속당했다.옥저는 옥저만의 풍속을 만들어가며, 정체성을 확립했으나, 동옥저는 태조대왕 56년, 학계에 이견 없이 멸망당했으며, 북옥저는 28년 동명성왕에게 멸망당했다고 알려져있으나, 244년 관구검의 침략에 고구려에 귀속되었다는 기사도 있다. 후에 북옥저 지역에 모용선비의 공격을 받은 북부여 왕가가 자리잡고, 이 나라를 동부여라고 부르나 옥저를 이어받진 않았다.
285년 북옥저를 마지막으로 옥저는 멸망했다고 보고 있으나, 지역 향토세력, 지역 토호가 그 고을에서 관리를 맡는게 조선 전[1]까지 일반적이었다.
삼국사기를 보면 영양왕 22년(AD 611) 수양제는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좌12군(左十二軍)은 1) 누방, 2) 장잠, 3) 명해, 4) 개마, 5) 건안, 6) 남소, 7) 요동, 8) 현도(玄菟), 9) 부여, 10) 조선, 11) 옥저(沃沮), 12) 낙랑(樂浪) 등의 길(道)로 나아가고, 우십이군(右十二軍)은 1) 점선, 2) 함자, 3) 혼미, 4) 임둔(臨屯), 5) 후성, 6) 제해, 7) 답돈, 8) 숙신, 9) 갈석, 10) 동이, 11) 대방(帶方), 12) 양평 등의 길(道)로 나아가 계속 진군하여 평양에 총 집합하라.“고 하였다. 옥저는 수양제 좌12군의 11번째 진격로에 위치해 있으며, 요동, 현도, 낙랑 등과 함께 수나라에서 고구려 평양을 향해 진격하는 고구려의 영토에 옥저가 포함되어 있었다.
고고학적으로 백산말갈은 예맥 북옥저 문화의 직계 후신이기 때문에 고구려와 옥저의 관계는 백산말갈로 이어졌다 볼 수 있다. 옥저와 고구려의 문화적 유사성 때문인지 백산말갈은 고구려 정체성을 받아들였으며 고구려 멸망 이후 당나라로 끌려갔다 탈출했고, 대부분 황해도 일대로 내려가 후대의 고려가 되는 패서 호족에 합류하였으며 일부는 발해에 합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