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典記
1. 개요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인용된 역사서. 고려 시대까지는 남아있었던 책으로 보이나 현전하지는 않는다. 인용된 부분에서 660년 백제멸망전과 관련된 부분이 있는 점을 볼 때, 빨라도 백제멸망(660년) 이후에 저술된 책(혹은 기록)으로 추정된다.2. 관련 기록
按古典記, 東明王第三子温祚, 以前漢鴻嘉三年癸卯, 自卒夲扶餘, 至慰礼城, 立都稱王. 歷三百八十九年, 至十三世近肖古王, 取髙句麗南平壤, 都漢城. 歷一百五年, 至二十二世文周王, 移都熊川. 歷六十三年, 至二十六世聖王, 移都所夫里, 國號南扶餘. 至三十一世義慈王, 歷年一百二十二, 至唐顯慶五年, 是義慈王在位二十年, 新羅庾信與唐蘇定方討平之.
《고전기(古典記)》를 살피건데 동명왕(東明王)의 셋째 아들인 온조(温祚)가 전한 홍가(鴻嘉) 3년 계묘년에 졸본부여(卒本扶餘)에서 위례성(慰禮城)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왕이라 칭하였다. 389년이 지나 13세 근초고왕(近肖古王)에 이르러 고구려 남평양(南平壤)을 취하고 한성(漢城)에 도읍했다. 105년이 지나 22세 문주왕(文周王)이 도읍을 웅천으로 옮겼다. 63년이 지나고 26세 성왕이 도읍을 소부리(所夫里)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하였다. 31세 의자왕(義慈王)에 이름에 122년이 지나고 당 현경(顯慶) 5년에 이르러 의자왕 재위 20년 때에 신라 유신(金庾信)과 당(唐)의 소정방(蘇定方)이 함께 토벌해 평정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37 잡지 제6 지리(地理)四 백제(百濟)[1]
《고전기(古典記)》를 살피건데 동명왕(東明王)의 셋째 아들인 온조(温祚)가 전한 홍가(鴻嘉) 3년 계묘년에 졸본부여(卒本扶餘)에서 위례성(慰禮城)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왕이라 칭하였다. 389년이 지나 13세 근초고왕(近肖古王)에 이르러 고구려 남평양(南平壤)을 취하고 한성(漢城)에 도읍했다. 105년이 지나 22세 문주왕(文周王)이 도읍을 웅천으로 옮겼다. 63년이 지나고 26세 성왕이 도읍을 소부리(所夫里)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하였다. 31세 의자왕(義慈王)에 이름에 122년이 지나고 당 현경(顯慶) 5년에 이르러 의자왕 재위 20년 때에 신라 유신(金庾信)과 당(唐)의 소정방(蘇定方)이 함께 토벌해 평정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37 잡지 제6 지리(地理)四 백제(百濟)[1]
≪고전기(古典記)≫를 살펴 보면 이러하다.
“동명왕(東明王)의 셋째 아들 온조는 전한 홍가 3년 계유(서기전18년)에 졸본부여로부터 위례성(慰禮城)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왕이라고 칭하였다. 14년 병진(丙辰)에 도읍을 한산(漢山)[원주]으로 옮겨 389년을 지냈으며, 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 때인 함안(咸安) 원년(371년)에 이르러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을 빼앗아 도읍을 북한성(北漢城)[원주2] 으로 옮겨 105년을 지냈다. 22대 문주왕(文周王)이 즉위하여 원휘(元徽) 3년 을묘(475년)에는 도읍을 웅천(熊川)[원주3]으로 옮겨 63년을 지내고, 26대 성왕(聖王) 때에 도읍을 소부리(所夫里)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남부여(南扶餘)라 하여 31대 의자왕(義慈王)에 이르기까지 120년을 지냈다.
삼국유사 제2기이 남부여 전백제 북부여
“동명왕(東明王)의 셋째 아들 온조는 전한 홍가 3년 계유(서기전18년)에 졸본부여로부터 위례성(慰禮城)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왕이라고 칭하였다. 14년 병진(丙辰)에 도읍을 한산(漢山)[원주]으로 옮겨 389년을 지냈으며, 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 때인 함안(咸安) 원년(371년)에 이르러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을 빼앗아 도읍을 북한성(北漢城)[원주2] 으로 옮겨 105년을 지냈다. 22대 문주왕(文周王)이 즉위하여 원휘(元徽) 3년 을묘(475년)에는 도읍을 웅천(熊川)[원주3]으로 옮겨 63년을 지내고, 26대 성왕(聖王) 때에 도읍을 소부리(所夫里)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남부여(南扶餘)라 하여 31대 의자왕(義慈王)에 이르기까지 120년을 지냈다.
삼국유사 제2기이 남부여 전백제 북부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