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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12 23:09:41

고태문

<colbgcolor=#000><colcolor=#fff> 고태문
高泰文
출생 1929년 1월 3일
제주도 북제주군
사망 1952년 11월 11일
강원도 고성군
복무 대한민국 육군
최종계급 육군 대위
복무 기간 1950~1952
1. 개요2. 생애 및 군 경력 3. 공훈4.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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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태문(高泰文, 1929년 1월 3일 ~ 1952년 11월 11일)은 대한민국의 6.25전쟁 참전 군인이다.

2. 생애 및 군 경력

초기 생애 및 군 입대
고태문은 1929년 1월 3일, 제주도 북제주군에서 출생하였다.
1941년 중앙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공업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대한민국 육군에 입대하였으며, 제11사단 제9연대 소속으로 배치되었다.

6.25 전쟁 참전
펀치볼 전투 및 884고지 탈환 (1951년 8월 24일)
1951년 8월 24일, 고태문 중위는 제11사단 제9연대 7중대 소대장으로 펀치볼 전투에 참가하였다.
그는 884고지 탈환 작전에 투입되어 격렬한 전투를 벌였으며,
적을 몰아내고 고지를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351고지 전투 및 최후의 항전 (1952년 11월 10일 ~ 11월 11일)
1952년 가을, 강원도 고성군의 351고지를 두고 국군과 중공군 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351고지는 동해안 간성지구의 전략적 요충지로, 국군 제5사단이 이를 방어하고 있었으나 북한군 제9사단이 집중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에 따라 7월 10일부터 11월 10일까지 두 차례의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으며, 국군은 351고지를 사수하기 위해 총력을 다하였다.
1952년 11월, 고태문 대위는 제5사단 제27연대 제9중대장으로 배치되어 351고지를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11월 10일, 중공군 2개 중대가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였으며, 고태문 대위는 부대를 이끌고 결사적으로 방어 작전을 펼쳤다.
제1차 공격은 가까스로 방어하였으나, 재차 공격해 온 적군과의 백병전 끝에 전선이 돌파되어 중대가 위기에 처하였다.
그러나 그는 과감한 육탄공격을 지휘하여 적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고, 결국 적을 격퇴하였다.
그의 지휘 아래 국군은 884고지를 다시 확보하여 적의 위협을 제거하였으며, 군단이 목표로 한 펀치볼 동쪽 포위 태세를 갖추는 데 기여하였다.

최후의 순간과 전사
적과 아군이 혼전 상태에 빠진 가운데, 고태문 대위는 중대의 철수를 지휘하였다.
그러나 철수 과정이 쉽지 않았고, 그는 끝까지 남아 부하들의 철수를 엄호하였다.
그는 마지막까지 전장을 지키며 "진지를 고수하라"는 명령을 남긴 채 전사하였다.
이후 국군 연대는 작전대로 고지를 포격한 후 역습을 감행하여 351고지를 재탈환하였다.
그의 희생과 책임감은 값진 승리를 이루어내는 바탕이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고태문 대위의 희생과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52년 11월 육군 중위에서 육군 대위로 1계급 특진을 부여하였으며, 같은 해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하였다.
또한 2013년, 대한민국 국가보훈처는 그를 "11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하였다.

3. 공훈

을지무공훈장 (1952년, 사후 추서)
육군 대위 1계급 특진 (1952년, 사후 추서)
국가보훈처 이달의 6.25전쟁영웅(2013년 11월)

4. 참고 자료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6.25 전쟁영웅 고태문 육군 대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