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880년 8월 27일 |
경상남도 합천군 상백면 외초리 (현 경상남도 합천군 쌍백면 외초리 521) | |
사망 | 1948년 11월 14일 |
경상남도 합천군 | |
상훈 | 대통령표창 추서 |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80년 8월 27일 경상남도 합천군 상백면 외초리에서 출생했다. 1919년 3월 19일 합천군 삼가읍 장터에서 정방직(鄭邦直)·정각규(鄭恪圭)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여, 장터에 모인 많은 시위군중과 함께 큰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를 벌이다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23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공소하였지만, 1919년 5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공소 기각되었다. 이에 불복해 상고하면서, 상고 취의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음력 2월 17일 부모의 병환으로 약을 지으려고 삼가면 시장으로 갔는데 100여 명이 진치고 기를 휘두르고 만세를 부르고 본인을 붙잡고 호령하며 "너 역시 대한민인데 어찌 부르지 않느냐"고 하여 본인이 정신이 묘한 중 마세를 한 번 불렀는데, 주재소에 붙잡혀 경찰서장의 심문에 대해 100여 명의 위령 때문에 만세를 불렀다는 내용으로 변명했는데, 서장은 자백을 살피지 않고 죄가 아닌데 범죄로써 문부 및 본인을 진주지청 법원으로 압송했다. 그런데 판사장도 일의 곡직을 살피지 않고 문부에 따라 징역 6개월로 판결했기 때문에 원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대구 복심법원에 공소했다 위 법원장도 죄의 유무를 살피지 않고 문부에 따라 위와 같이 판결 받음은 억울, 원통하여 견디지 못하고 고등법원장의 명쾌함 아래 상고한다. 본인은 적십자 회사 사람이므로 감히 경동하지 않는다.마지막으로 저들이 위협한 탓으로 이 지경에 이름을 분명히 살피어 억울, 원망이 없기를 천만 엎드려 바란다.
그러나 1919년 6월 12일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1948년 11월 14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공민호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