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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10 19:33:49

구루 나나크

시크교 구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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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교의 창시자
시크교 초대 구루
ਗੁਰੂ ਨਾਨਕ | 구루 나나크
파일:구루 나낙.jpg
<colcolor=#fff><colbgcolor=#daa520> 본명 나나크 데브 지
ਨਾਨਕ ਦੇਵ ਜੀ
이명 바바 나나크
ਬਾਬਾ ਨਾਨਕ
출생 1469년 4월 15일
델리 술탄국 펀자브 라이 보이 키 탈반디
(현 파키스탄 펀자브주 나나카 사힙)
사망 1539년 9월 22일 (향년 70세)
무굴 제국 펀자브 카르타르푸르
(현 파키스탄 펀자브주 카르타르푸르)
부모 부 - 칼얀 찬드 다스 베디 (메흐타 칼루)
모 - 마타 트립타
배우자 마타 술라카니
자녀 아들 - 바바 스리 찬드[1]
재임 기간 시크교 최고지도자 (구루)
1507년 8월 20일 ~ 1539년 9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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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한국어<colcolor=#000,#ddd>구루 나나크
펀자브어ਗੁਰੂ ਨਾਨਕ
힌디어गुरु नानक
우르두어گرو نانک
영어Guru Nan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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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우다시스2.2. 말년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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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크교의 창시자. 펀자브의 힌두교 중류층 계급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진리를 추구하였고, 27세에 집을 떠나 30년간 서남아시아 각지를 유랑하였다. 각종 종교를 경험하며 기존 힌두교의 악습을 개혁하고 이슬람의 유일신관을 접목시킨 시크교를 창시하였다. 교리에 있어 그는 유일신이란 뜻인 이크 온카르 (ੴ )를 중심으로 평등, 겸애, 선행, 덕목의 가치를 강조하였다. 세계관에 있어서는 신이 모든 그의 피조물에 깃들어 있으며 그 피조물들이 모여 진리를 이룬다고 설법하였다. 구루 나나크의 언행은 974개의 시구인 샤브다로 남아있고, 이를 묶은 구루 그란트 사힙은 시크교의 최고 경전이다. 사후 9명의 인간 구루들이 계승하였고, 이후로는 구루 그란트 사힙이 영원한 구루로 남게 되었다.

2. 생애

파일:자남아스탄.jpg
파키스탄의 양대 시크교 성지 중 하나인 나나크 사힙의 구르드와라 자남 아스탄

1469년, 남아시아 문화권의 새해인 바이사키 (4월 15일) 날에 상인 카스트에 해당하는 카트리 계급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탄신절인 구루 나나크 구르푸랍은 매년 10-11월의 카탁 푸란마시 (카탁의 보름달)에 전세계 시크교 공동체에 의해 기념된다. 나나크는 5살 터울의 누나 난키의 이름을 따서 작명된 것이라 한다. 나나크의 부친 메흐타 칼루는 탈완디 마을의 곡물세 회계관 (파트와리)였고, 따라서 중산층 집안에 속하였다. 나나크는 5세의 나이부터 신학에 관심을 보였고, 7세의 나이에 마을 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알파벳 첫 글자가 신의 유일성을 뜻한다는 설명으로 선생들을 충격에 놀라게 했다 한다. 그외에 땡볕 아래에 잠들어 있던 나나크의 머리 위에 나무 그림자가 드리우고 이동하지 않았다는 등의 일화가 전해진다.

1475년 나나크의 누나 난키는 술탄푸르의 자이 람과 결혼했는데, 후자는 라호르 총독 다울라트 칸의 모드카나 (공물 창고) 관리인이 되었다. 자이 람은 처남의 일자리를 알선해주었고, 따라서 나나크는 16세의 나이에 술탄푸르로 이주하였다. (1485년) 2년 후 나나크는 바탈라에서 물 찬드의 딸 술라카니와 결혼하여 두 아들이 태어났다. 약 10여년간 술탄푸르에서 관료로 생활하던 나나크는 영적 깨달음을 얻고자 1496년 집을 떠나 30년간 돌아오지 않았다. 본래 힌두교도였던 나나크는 장기 여행인 우다시스를 통해 이슬람 등의 교리에서 영감을 얻어 시크교를 창시하게 된다.

2.1. 우다시스

파일:구루 나낙 여정.jpg

1496년부터 구루 나나크는 영적 수행을 위해 서남아시아 각지를 여행하였는데, 이를 우다시스 (오디세이)라 부른다. 시크 전승에 의하면 그는 나우 칸드, 즉 9곳의 힌두/이슬람 성지들을 방문했다고 한다. 메카, 바그다드, 물탄, 아요디야 등지에서 구루 나나크는 현지 성직자들과 신학 토론을 벌였다. 이들은 시크 경전에 수록되어 있다. 일각에서는 그가 예루살렘, 로마는 물론 아제르바이잔과 수단까지 방문했다고도 한다.

2.2. 말년

우다시스 이후 1524년, 구루 나나크는 자신이 1504년에 세운 도시인 카르타르푸르에 정착하여 사망할 때까지 머물렀다. 따라서 당시 형성된 시크 공동체는 카르타리라 불렸다. 1539년, 임종 시에 구루 나나크는 제자들 중 바이 레나를 구루 안가드라 명명하고 후계자로 선포하였다.

3. 여담

나나크의 임종이 가까워지자, 그를 존경하여 힌두교에서 시크교로 개종한 이들과 이슬람교에서 개종한 이들은 사후 구루 나나크의 장례 방법을 두고 다투었다. 힌두교의 장례 예법은 화장을 하도록, 이슬람교의 율법은 매장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나크는 임종 전날, 양 진영의 대표를 불러 자신의 이불 속 좌 우에 각각 한 꽃다발을 가져다 두게 하였다. 그리고는 '자신이 죽은 뒤 시들지 않은 쪽의 의견 대로 하라'고 하였고, 각 대표는 그러기로 하였다. 다음 날 새벽, 양 진영의 대표가 나나크의 이불을 들쳐보자 나나크의 시신은 간 곳이 없었고, 시들지 않은 양 진영의 꽃다발만 있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양 진영은 진정한 화합을 이루어, 비로소 하나의 공동체가 되었다고 한다.


[1] 시크 우다시 종파의 창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