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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 공국 2대 공작 გურგენ | 구르겐 1세 | ||
제호 | 한국어 | 구르겐 1세 |
조지아어 | გურგენ | |
라틴어 | Gurgen I | |
생몰 년도 | 미상 ~ 891년 | |
재위 기간 | 미상 ~ 89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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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타오 공국 2대 공작.2. 생애
타오-클라제티 3대 공작 아다르나세 2세와 아바스기아의 왕 바그라트 1세의 딸 베브렐리의 장남이다. 동생으로 아쇼트, 숨바트 1세가 있었다. 아다르나세 2세가 870년대의 어느 시점에 사망한 뒤, 그는 타오의 일부 영지를 물려받았고 숨바트는 클라제티의 일부 영지를 물려받았다. 881년, 바그라트 1세의 아들이며 타오 공작이기도 한 다비트 1세가 삼촌 과람의 아들 나르세에게 암살당했다. 나르세는 자기에게 상속받은 영지가 너무 적다고 여기고 아버지로부터 유산 일부를 받아낸 다비트 1세에게 원한을 품은 끝에 암살해버린 것이었다. 이에 아르메니아 공작 아쇼트 1세의 지원을 받은 리파리트 오르벨리아니의 조지아인들이 봉기했고, 나르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피했다. 이후 그는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타오 전체를 다스릴 권한을 부여받았다.그는 조지아를 통일할 야망을 품고, 조지아 내 친위세력과 아르메니아와 동맹을 맺고 이웃 왕국인 압하지야를 압박했다. 이에 압하지야를 속국으로 두고 있던 동로마 제국은 그를 견제하기로 마음먹고, 885년 나르세에게 용병대를 맡겼다. 나르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나 압하지야에 도착한 뒤 그곳의 군주 바그라트의 환영을 받았다. 이제 나르세의 침공이 임박하자, 그는 다비트 1세의 아들 아다르나세와 연합했다. 888년 압하지야의 지원을 받은 나르세와 맞붙은 그와 젊은 아다르나세는 아스핀차에서 적군을 크게 격파하고 나르세를 생포한 뒤 즉결 처형했다.
888년, 아르메니아 군주는 젊은 아다르나세에게 이베리아 왕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한편 구르겐은 나르세의 영지 일부를 받고 아르타니와 차브체티의 공작을 칭했다. 하지만 그와 아다르나세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조지아 귀족들은 구르겐 파와 아다르나세 파로 나뉘었다. 891년 양측은 음글리나비에서 맞붙었고, 그는 전투에서 패배한 뒤 치명상을 입은 채 체포되어 얼마 후 사망했다. 사후 칸즈타 성당에 안장되었다.
그는 아르메니아의 스파라펫(sparapet: 최고 사령관)인 숨바트 8세 바그라투니의 딸과 결혼하여 아다르나세 3세와 아쇼트 쿠히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