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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구호림 (具浩林) |
출생 | 1920년 11월 7일 |
전라북도 옥구군 대야면 광교리 (現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 대야면 광교리) | |
사망 | 2008년 9월 9일 (향년 87세) |
서울특별시 |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2. 생애
구호림은 1920년 11월 7일 전라북도 옥구군 대야면 광교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3년 3월 대야공립보통학교(大野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고 동년 4월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京城第一公立高等普通學校)에 입학하여 1938년 졸업했다. 이후 일본으로 도항하여 1940년 도쿄 중앙대학(中央大學) 법학부에 입학, 1942년 졸업하였다. 중앙대학에 재학하던 당시 일본의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조선이 비참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판단한 그는 1940년 6월 하순경 고담룡, 김운봉(金雲鳳) 등과 함께 고문(高文) 그룹을 조직하였다.고문 그룹은 표면적으로 학술연구와 상호 친목단체로 위장하여 일본의 감시를 피하면서 동지의 결속을 공고히 하기 위한 방법으로 결사를 유지하였다. 이들은 조선독립의 방법으로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주의를 기본적으로 채택했고, 1940년 10월 말경 실력을 양성하며 자력 본위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매진할 것과 독립 후 통치체제는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즘을 모방할 것을 협의했다.
1940년 11월, 구호림은 동지들과 모임을 갖고 기념촬영을 하면서 졸업 후 관계 혹은 재계로 진출하여 평생 독립을 목표로 헌신할 것을 협의했다. 이후 1940년 6월부터 1942년 5월까지 11회에 걸쳐 동지들과 만나 독립쟁취 방법을 논의했다. 그러나 얼마 후 경찰에 체포된 그는 치안유지법 위반,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등 임시취체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에는 서울에서 조용히 지냈으며, 2008년 9월 9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1년 구호림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2008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