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생에 뭐였길래 사는 게 이렇게 피곤할까? 엄마 없이 자란, 가난한 철물점 집 딸에게는 분명한 한계가 그어진다. 엄마가 돕지 못할 테니 반장은 하면 안 되고, 장학금 받아야 할 테니 대학은 하향 지원하는 게 좋겠고…. 웃겨. 가슴에 던져진 불씨들은 나를 더 끓어오르게 할 뿐이다. 남들한테 당연한 게, 나한텐 안 당연한 게 되는 걸 견딜 수가 없다. 편견은 부수고, 받은 무시와 차별은 갚아주고 싶다. 그러려면 강해지는 수밖에. 도와 줄 사람이 없으면 혼자서 다 해내면 된다.
악바리 근성 하나로 공부해 한국대에 입학했고, 업계 최고 연봉을 자랑하는 용성백화점에 입사했다. 입사후에는 최연소 기획팀장이 됐다. 집 대출금을 다 갚으려면 회사에 붙어 있어야 하는데 이놈의 본부장들이 나를 가만 놔두질 않는다. 틀린건 틀리다고 말하고, 말이 안 통하면 왜 틀렸는지 행동으로 보여줬다. 그랬더니 ‘본부장 킬러’가 돼버렸다.
나도 한때는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었다. 열아홉. 혼자서 모든 걸 해내기 조금은 벅차던 시절. 게임에서 만난 ‘염룡 오빠’에게 기대려던 나는 더 세게 넘어지고 말았다. 그 자식은 첫사랑이 아니라 내 인생 최악의 흑역사로 남았다. 역시, 실전은 솔플이다.
그런데, 흑염룡의 저주에라도 걸린 걸까? 새로 온 본부장, 팔이 아니라 심장에 흑염룡 한 마리를 남몰래 키우고 있는 본부장이 귀여워 보인다. 전생에 죄가 있는 것 같다, 아무래도!
나는, 혼돈이라는 숙명을 짊어진 흑염룡이다. 어린 날, 사고로 한순간에 부모를 잃고 혼자가 된 내게는 커다란 공동(空洞)이 생겼다. 빛이 사라진 자리엔 어둠만이 남고, 온기가 거두어진 빈자리는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채울 수 없는 구멍을 메우려 나는 발버둥 쳤다. 내게 남은 유일한 가족인 할머니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용성그룹 회장의 하나뿐인 손자로서 그녀가 원하는 후계자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여전히 외로웠고, 공허했다.
나는 새카만 고독 속에서 내 안의 흑염룡과 조우했다. 용성의 후계자가 아닌 나 자신으로서 사랑받고 싶었고, 자유롭고 싶었다. 하늘을 활공하며 마음껏 화염을 내뿜고 싶은 본능. 음악이 나를 해방시켰고, 만화와 게임 속 세상에서 나는 외롭지 않고, 천진할 수 있었다. 진짜 나를 찾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딸기’를 만났다. 한때 나를 주저앉게 만든 인간, 내 첫사랑. 딸기만은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줄 한 사람이라 믿었다. 그러나 딸기는 내게 천사 같은 얼굴로 악마처럼 저주를 퍼부었고. 설상가상 할머니는 나의 영혼을 위로하던 모든 것을 불태웠다. 다시, 혼자였다. 나는 불완전하기에 완벽해지기로 결심했다. 더는 누구에게도 내 진짜 모습을 내보일 생각 따위 없다.
그런데, 완전히 잠가두었던 비밀의 방에 침입자가 발생했다. 온몸의 세포가 경고한다. 저 인간을 피해야 한다고. 안 그러면 또 한 번 나약해질지도 모른다고. 역시, 하루빨리 제거해야겠다.
나는, 그냥 산다. 끌리는 대로. 할 수 있는 한 느낌대로, 원하는 대로 사는 게 행복이다. 인생은 어떻게든 흘러간다. 어쩌다 보니 대학에 입학하기 무섭게 남자친구를 사귀었고. 어쩌다 보니 PC 게임에서 문파를 만들고, 문파장이 됐다. 재밌었다. 별별 인간들이 다 있었지만, 수정이처럼 좋은 인연도 많이 만들었다. 그렇게 어쩌다 보니 취직하고, 결혼하고, 이혼까지 했다. 엄마는 딸이 ‘이혼녀’가 됐다며 앓아누웠다.
어느 날 눈 떠 보니 이혼녀가 된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너무 아무렇지 않아서 머쓱할 정도다. 내 잘못도 없는데, 이혼녀가 뭐 어때서. 전남편에게 배신당한 상처와 분노는 한 달 정도 갔다. 위자료로 가게까지 차렸으니 현실적인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너무 속 편하게 사는 것 같을까? 어차피 산다는 건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일이다. 걱정할 시간에 즐기는 게 낫다는 주의다.
그런데, 손님이랑 자도 되나? 분위기에 취해 저질러 버렸다. 몸도 너무 취향이었다. 그냥 하룻밤 즐긴 거라 별문제 없을 것 같다. 아마도?
나는, 헤프지 않다. 지금까지 만난 여자를 불러 모으면 작은 공연장 하나를 가뿐히 채울 수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헤프다는 게 뭔가. 말이나 행동을 조심하지 않고 함부로 하는 것 아닌가? 나는 언제나 신중했고, 어디서나 진중했다. 동시에 두 여자를 만난 적도 없고, 남의 여자를 탐낸 적도, 여자를 만나기 위해 발 벗고 나선 적도 없다. 오는 여자 안 막고, 가는 여자 안 잡는 것뿐이다.
그러니 “진짜 날 좋아하긴 해?” 따지며 이별을 고한 이전 연인들의 오해는 속상하다. 내가 부담스럽지 않고, 담백해서 좋다더니 사귀기 시작하면 그래서 서운해한다. 구질구질하게 질투하고, 끈적끈적하게 집착해야 진짜 사랑이라면, 그건 너무 고되지 않나?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것. 미지근해서 언제 어느 때 손을 담가도 인상 찌푸릴 일 없고, 아무도 다치지 않는 것. 적당해서 서로가 즐거운 것. 그게 내가 추구하는 연애의 방향성이다.
그런데, 요즘 즐겁지가 않다.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여자 때문에. 내가 하룻밤 상대에 불과했다는 여자 때문에 나는 깨닫고 말았다. 나는 모두의 첫사랑이었지만, 내 첫사랑은 시작도 못 했었다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