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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21 12:20:16

근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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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靳準
(? ~ 318)

전조의 외척. 소무제 유총에게 딸 두 명, 은제 유찬에게 딸 한 명을 시집보냈는데 3명 모두 황후가 되었다. 이후 반란을 일으켜 은제 유찬을 살해하고 한천왕(漢天王)을 칭했으나 유요와 석륵의 공세를 반년도 버티지 못 하고 결국 그 자신도 부하들의 배신으로 살해당했다.

2. 생애

초기 생애와 가문의 이력은 전해지지 않으며, 건원 원년(315년) 3월에 한나라(漢) 조정에서 중호군 직책에 있으면서 소무제 유총에게 근월광(靳月光)과 근월화(靳月華) 두 딸을 시집보내면서 처음 사서에 등장한다. 소무제 유총은 언니인 근월광을 상황후로, 동생인 근월화를 우황후로, 귀비 유씨를 좌황후로 삼아 궁중에 총 3명의 황후를 두었다. 이에 대해 어사대부 진원달이 간언하다가 우광록대부로 좌천당했다가 조정 대신들의 항의로 금방 복직되었다. 다시 어사대부를 맡게 된 진원달은 이번에는 근월광의 행실을 탄핵하여 결국에는 그녀를 황후에서 끌어내리니, 폐위된 근월광은 수치심과 한스러움에 자결하였다. 이로 인해 소무제 유총은 물론이고 그녀의 아버지인 근준 역시 진원달을 원망하였다.

건원 2년(316년) 정월, 중상시 왕침(王沈), 선회(宣懐), 유용(兪容), 중궁복야 곽의(郭猗), 중황문 능수(陵修) 등의 환관들은 소무제 유총의 총애를 받아 권세를 부렸다. 특히 작년 겨울부터 소무제 유총이 후궁에서 자주 연회를 열어 어떤 때에는 3일 동안 술에 안 깨기도 하였으며, 어떤 때에는 아예 100여 일 동안 조정에 나오지도 않았다. 국정 운영은 모두 상국인 아들 유찬이 처리하였고, 오직 사람을 처형하거나 관직을 내리는 일만 중상시 왕침을 통해 보고받았다. 이에 왕침은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은 채 사사로이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고, 군신들은 왕침의 말을 곧 유총의 뜻으로 여겼다. 근준은 이러한 왕침의 환관 무리와 영합하여 자신의 종족들과 함께 왕침에게 아첨까지 해가며 섬겼다.

그러던 어느 날, 황태제 유예에게 원한이 있던 곽의와 근준이 상국 유찬에게 그가 모반을 꾸민다 참소하였다. 여기에 대장군 종사중랑 왕피(王皮), 위군장군 사마 마돈(劉惇)까지 가세하여 거짓 증언을 하자, 유찬은 그들의 말을 믿었다. 당초 근준의 사촌여동생은 유예의 시녀가 되어 그를 섬겼는데, 유예의 시종과 몰래 사통하여 음란한 행위를 하다가 들켜 분노한 유예에게 살해당한 적이 있었다. 그 일 이후로 유예는 누누이 근준을 비웃었기에, 그를 향한 근준의 원한은 매우 깊었다. 근준은 유찬에게 유예를 죽이면 황태자에 오를 수 있다며 적극적으로 부추겼고, 동시에 동궁을 감시하던 관위장군 복추(卜抽)를 동궁에서 떠나게 한다면 유예를 죽이는 데에 유리해질 것이라 유세하였다. 유찬은 근준의 말에 넘어가 명을 내려 복추를 동궁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건원 2년(316년) 6월, 하동(河東)에 대규모 메뚜기떼가 발생해 백성들은 콩이나 기장조차 구할 수 없었다. 사예교위 근준은 부하들과 함께 하동에 가서 메뚜기를 보이는 족족 잡아 땅에 묻었음에도 그 수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메뚜기의 울음소리는 10리 밖에서도 들릴 정도로 요란했고, 메뚜기들을 땅 속에 묻어도 다시 금방 뛰쳐나와 별다른 효과를 볼 수 없었다.

인가 2년(317년) 3월, 유찬이 부하인 왕평(王平)을 시켜 황태제 유예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게 하였다.
"조서에서 이르기를, 경사(京師)에 장차 변고가 있을 예정이니 옷 속에 갑옷을 입어 대비하라 하였습니다."
황태제 유예는 그 말을 믿고 동궁의 신하들에게 옷 안에 갑옷을 입고 있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유찬은 그 즉시 사자를 근준과 왕침에게 파견해 일렀고, 근준은 곧바로 소무제 유총를 알현해 말했다.
"왕평이 이르기를 동궁은 항상 은밀히 비상사태에 대비하고 있다 하였는데 장차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소무제 유총은 크게 놀라서 말했다.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그러자 왕침 등이 한 목소리로 진언했다.
"신들은 오래도록 들은 바가 있었으나, 폐하께서 믿지 않으실까 두려워 차마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이에 소무제 유총은 유찬으로 하여금 동궁을 포위하게 하였다. 유찬은 왕침과 근준을 보내 강족과 저족 추장 10여 명을 체포한 후[1], 그들을 심문하면서 높은 기둥에 머리를 매달아놓고 불에 달군 쇠로 그들의 눈을 지져 유예와 반역을 공모했다는 거짓 자백을 받아냈다. 보고를 받은 소무제 유총은 유예가 진실로 반역을 꾀했다 믿고, 왕침 등에게
"오늘에서야 나는 경들이 얼마나 짐에게 충성을 다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앞으로 이런 일은 유념치 말고 먼저 말을 꺼내도록 하라."
라 하였다. 이로 인해 유예는 역적으로 확정되었고, 동궁의 소속 친위대인 15,000여 명의 4익위 병사들이 모두 갱살되었다. 아울러 유예와 친하게 지내던 대신이나 동궁의 관속 수십 명이 주살당했는데, 이들 모두 왕침, 근준 등에게 평소 밉보인 자들이었다.

인가 2년(317년) 4월, 소무제 유총이 유예를 황태제에서 폐위시키고 북부왕(北部王)으로 삼자, 근준은 유찬의 지령을 받고 유예를 암살하였다. 본래 유예는 성품이 온화하고 관대하였으며, 도량이 넓어 강족, 저족 뿐만 아니라 나라의 많은 선비들이 마음 속으로 그에게 귀부하였는데, 그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에 10만 명에 달하는 강족과 저족 무리가 분노하여 들고 일어났다. 이에 소무제 유총은 근준 행 거기대장군으로 삼아 이들을 토벌하였다.

인가 2년(317년) 6월, 경내에서 메뚜기떼 다시 대량 발생하여 수도인 평양과 기주, 옹주의 피해가 특히 심하였다. 근준이 소무제 유총의 명령에 따라 메뚜기떼를 진압하러 떠났을 때, 그의 두 아들이 갑자기 사망하였다.

한창 원년(318년) 7월, 병에 걸린 소무제 유총이 근준을 대사공, 영 사예교위로 삼아 태자 유찬을 보정케 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무제 유총이 붕어하고 은제 유찬이 즉위하니, 유총의 황후였던 근월화는 황태후로 높여졌고, 유찬에게 시집갔던 근준의 막내딸 근씨는 황후에 올랐다. 이때 황태후 근월화를 비롯한 4명의 황태후들은 모두 20살도 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였고 미모 또한 빼어났기에, 은제 유찬은 아버지를 위한 복상조차 하지 않은 채 그녀들을 태후로서 대우하지 않고, 모두 취해 밤낮으로 음란한 행각을 즐겼다. 근준은 마침내 모반을 실행할 뜻을 품고 은제 유찬에게 진언하였다.
"듣자 하니, 여러 공(公)들이 이윤곽광의 고사를 행하고자 신(臣)과 태보(호연안)를 주살하고, 대사마(유기)에게 만기(萬機)를 맡기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 합니다. 신은 폐하께서 먼저 손을 쓰지 않다가 화를 입으실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은제 유찬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그러자 근준은 두려운 마음을 품고 두 딸에게 부탁하며 말하였다.
"지금 여러 공후(公侯)들이 황제를 폐위하고 제남왕(濟南王)을 옹립하려 하는데, 이 일이 성공한다면 우리 집안이 멸족될까 두렵구나. 부디 이 일을 황제께 전해다오."
이에 근 태후와 근 황후가 기회를 보아 은제 유찬에게 근준의 말을 전하니, 그제서야 유찬은 근준의 주장을 믿고 태재•상낙왕 유경(劉景), 태사•창국공 유의(劉顗), 대사마•제남왕 유기(劉驥), 거기대장군•오왕 유령(劉逞), 대사도•제왕 유매(劉勱) 등 자신의 동생들을 모두 잡아들여 처형하였다. 소무제 유총에게서 직접 보정을 부탁받은 태부 주기(朱紀)와 태위 범륭은 심상치 않은 낌새를 감지하고 장안의 승상 유요에게로 도망쳤다.

한창 원년(318년) 8월, 은제 유찬이 상림원(上林苑)에서 군사 훈련을 감독하고, 사실상 한나라로부터 독립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대장군 석륵을 토벌할 계획을 세웠다. 유찬은 승상 유요에게 상국, 도독중외제군사를 더해 장안을 그대로 지키게 하고, 근준을 대장군 녹상서사로 삼았다. 그러나 은제 유찬은 항상 후궁에 머물면서 연회를 즐기기에 바빴고, 군사와 국정은 모두 대장군 근준에 의해 좌우되었다. 이에 근준은 유찬의 명령을 사칭해 사촌동생 근명(靳明)을 거기장군에 임명하고, 근강(靳康)을 위장군에 임명하여 병권을 장악하였다.

어느덧 때가 되었다 생각한 근준은 금자광록대부 왕연을 찾아가 반란을 모의하려 하였다. 왕연은 근준의 뜻을 따르지 않고, 말에 올라 유찬에게 급히 이 일을 보고하려 하였으나, 근준이 보낸 위장군 근강에게 붙잡혀 억류당하였다. 이후 근준은 곧바로 발동하고, 광극전(光極殿)에 올라 갑사들과 함께 후궁으로 들이닥쳐 은제 유찬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 앞에서 유찬의 죄상을 조목조목 읊은 다음 유찬을 처형하고, 유찬의 시호를 '은제(隠帝)'라 하였다.(한창정변)

황제를 시해한 근준이 곧이어 유씨라면 남녀노소 구분없이 전부 붙잡아 도성 평양의 동시(東市)에서 참수하니, 처형장에서 울려퍼지는 곡소리가 백 리 밖까지 진동하였다. 또, 근준은 광문제 유연의 영광릉(永光陵)과 소무제 유총의 선광릉(宣光陵)을 파헤친 뒤, 유총의 시체만 부관참시하여 능욕하고 종묘를 불태웠다. 이후 근준은 대장군, 한천왕(漢天王)을 자칭하면서 임시로 칭제하여 백관을 두었다.

근준은 안정(安定) 출신의 호숭(胡嵩)에게
"자고로 오랑캐가 천자에 오른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 그대에게 전국새를 줄 것이니, 그대는 진(晉) 황실에 돌려주도록 하라."
라 말하면서 전국새를 넘겨주었는데, 호숭은 감히 전국새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이에 근준은 분노하여 호숭을 죽여버리고, 동진의 사주(司州)자사 이구에게 사자를 보내
「유연은 도각(屠各)[2]의 작은 우두머리이며 진나라에 변란이 일어난 것을 틈타 유주와 병주에서 난을 일으켜 천명을 멋대로 들먹이고 를 유폐하여 오랑캐의 조정에서 시해하는 데 이르렀소. 항상 군사를 이끌고 재궁을 도울 것이니 이로 인해 이를 들어달라고 청하오」
라는 내용의 서신을 전달하였다. 근준의 서신을 받은 이구는 즉시 원제 사마예에게 이를 보고하였고, 원제 사마예는 태상 한윤(韓胤) 등을 보내 소무제 유총에게 피살된 회제 사마치와 민제 사마업의 영구를 무사히 영접할 수 있었다.

근준의 정변은 비록 성공하였지만 많은 한나라의 대신들이 그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였다. 한나라의 옛 신하들이 상서 북궁순(北宮純)[3]을 중심으로 뭉쳐 동궁(東宮)에 보(堡)를 쌓자, 근준은 위장군 근강을 보내 이를 토벌하고 보를 허물었다. 또, 정변을 일으키기 전에 사로잡은 왕연을 좌광록대부로 삼으려 했으나, 왕연이라며 욕을 퍼붓자, 근준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왕연을 죽였다.

한편, 근준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은 장안의 상국 유요는 군사를 일으켜 평양으로 향하였다. 대장군 석륵 또한 근준 토벌을 명목으로 정예병 50,000여 명을 이끌고 양릉(襄陵)의 북쪽 언덕을 점거하며 평양성을 압박하였다. 근준은 석륵을 여러 번 공격했으나 번번이 이기지 못 하여 근준군의 기세는 크게 꺾였다.

광초 원년(318년) 10월, 유요의 군대가 마침내 도착해 적벽(赤壁)[4]에 진을 쳤다. 태보 호연안 등은 평양성을 빠져나와 유요에게 귀부하였고, 유요는 존호를 올리라는 부하들의 요청에 따라 그곳에서 황제로 즉위하면서 대사면령을 내렸다. 다만, 사면 대상에서 근준의 가문만은 제외하였다.

황제 유요에 의해 대사마, 대장군에 봉해진 석륵이 진격을 개시하여 평양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파족, 갈족, 강족 부락 100,000여 무리가 석륵에게 투항해왔다. 유요도 정북장군 유아(劉雅)와 진북장군 유책(劉策)을 분음(汾陰)으로 보내 석륵과 함께 평양을 공략하게 하였다.

광초 원년(318년) 11월, 근준은 시중 복태(卜泰)를 보내 석륵에게 승여어의를 바치고 화친을 청했으나, 석륵은 복태를 사로잡아 황제 유요에게 보냈다. 황제 유요는 복태와 대면한 뒤, 그에게 말하길
"선제께서 말년에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원대한 도리를 저버리시고, 환관들을 이용해 정권을 잡으면서 충량한 자들을 주멸하셨으니, 진실된 의사(義士)라면 이를 토벌하여 조정을 바로잡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사공(근준)의 마음은 충렬하여 단지 이윤과 곽광의 고사에 의거해 나라를 도탄에서 구하였고, 짐은 그 덕에 즉위할 수 있었으니 그에게 큰 공훈이 있다. 짐은 큰 어려움을 이겨낼지언정 명령을 함부로 내려 군자나 현인을 주살하는 일은 기필코 하지 않을 것이다. 사공이 만약 진실로 충량하여 지금이라도 항복한다면 짐은 모든 것을 용서하고 사공을 조정에 들여 정사를 보게 할 생각이다. 경은 성으로 돌아가 이러한 짐의 뜻을 사공에게 전하도록 하라."
라 하며 풀어주었다. 평양으로 돌아온 복태로부터 유요의 말을 전달받은 근준은 항복할 의사가 있었음에도 평양성의 유씨들을 몰살할 때 유요의 어머니 호씨(胡氏)와 친형을 처형한 바 있었기에 그 진의를 의심하면서 망설였다.

광초 원년(318년) 12월, 좌거기장군 교태(喬泰), 우거기장군 왕등(王騰), 위장군 근강 등이 근준을 살해하고 상서령 근명을 주군으로 옹립하였다. 근명은 복태를 유요의 군영으로 파견해 전국새를 반납한 후 투항할 뜻을 전했다. 이에 유요는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짐이 전국새를 손에 넣음으로써 제왕으로 등극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그대의 공이로다!"
한편, 자신이 근명을 토벌하고 전국새를 얻을 속셈이었던 석륵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분노하여 근명을 더욱 매섭게 공격하였다. 근명은 평양성에서 석륵과 여러 번 맞서 싸웠지만 전부 패하여 유요에게 구원을 청했고, 유요는 유아와 유책을 보내 근명을 영접케 하였다. 덕분에 근명은 평양의 병사와 백성 15,000여 명을 이끌고 유요에게로 달아날 수 있었다. 유요는 속읍(粟邑)에서 도망쳐온 근명을 맞이하였으나, 이전에 한 말을 번복하고 근명을 포함한 근씨 성을 가졌으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전부 참수하였다. 또, 유아를 평양으로 파견해 자신의 어머니 호씨의 시신을 수습하고 속읍에서 장사를 지냈다.


[1] 유예는 대선우로서 저족과 강족 등 이민족의 통치를 담당하는 임무를 맡고 있어 이들과 친밀했다.[2] 흉노족의 부(部) 중 하나. 광문제 유연이 도각부 출신이다.[3] 영가의 난 당시 서진을 위해 싸우다가 장안이 함락될 때 유총에게 항복한 한족이다.[4] 평양의 피지현(皮氏縣) 북서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적벽대전의 장소인 그 적벽과는 완전히 다른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