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1-03-17 17:37:13

금쇄동기

1. 개요2. 전문

1. 개요

金鎖洞記. 금쇄동기는 고산 윤선도가 금쇄동(金鎖洞)을 오르는 과정을 작성한 기행문이다. 금쇄동은 윤선도의 문학산실이라 할 수 있는데, 전라남도 해남군 현산면 구시리 산181번지 해발 290m 정상부를 말한다.

윤선도는 이곳에서 원림을 조영하고 산중신곡 등을 집필하며 은거생활을 하였다. 그는 금쇄동을 신선세계로 여기며 이곳을 오르는 과정을 금쇄동기에 자세히 서술하며 산수자연을 아름답게 표현하였다. 사적 제432호 해남 윤선도 유적으로 지정된 금쇄동은 수정동, 문소동을 포함하여 일동삼승(一洞三勝한 골짜기 안에 있는 세 명승)이라고 한다.

금쇄동기는 보물 제482호 '윤선도 종가 문적(尹善道 宗家 文籍)'의 부속문화재 중 하나로 지정되어 있다.

2. 전문

금쇄동(金鎖洞)은 문소동(聞簫洞)의 동쪽 제일봉(第一峯) 위에 있다. 그 높이로 말하면 참으로 해와 달을 옆에 끼고 비바람 치는 곳을 아래로 굽어볼 수가 있고, 동천(洞天신선이 사는곳, 하늘에 잇닿음)은 요랑(寥朗밝은 하늘)하면서도 그윽이 안개가 피어오르며, 천석(泉石)은 괴상하고 특이하면서도 귀엽게 아양을 부린다.

산의 후면(後面)은 조금씩 점진적으로 상승하여 그다지 험준하지는 않으나 아득히 멀고 멀어서 인적이 드물게 이르는 곳이다. 그 골짜기 입구는 동쪽으로 점로(店路 객점의 길)를 향하고 있으며 형세가 매우 험준하고 급박하다. 그래서 그 아래로 왕래하는 자는 붉은 단애(斷崖깍아세운듯한 암석)와 푸른 절벽(絶壁)이 우뚝 공중에 떠올라서 여름 구름마냥 기이한 봉우리와 저녁놀이 뒤덮인 중첩한 산 같은 것만 볼 뿐이요, 거기에 이런 골짜기가 있는 것은 알지 못한다.

점로에서 서쪽으로 문소천(聞簫川)을 건너 백 보쯤 가면 벌써 오르막길이 되어 곧장 올라가기가 어렵다. 북쪽으로 수십 보를 꺾고 또 남쪽으로 수십 보를 꺾어서 가노라면 석문(石門)에 이르는데, 그 모양이 매우 괴이한 데다가 큰 바윗돌이 공중에 가로 걸려 있어서 세상 사람들의 수레를 막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언뜻 보면 무슨 말이냐 하겠지만 자세히 생각해 보면 납득이 될 것이다. 이 석문을 경유하면 동천(洞天)으로 들어가는 길이 어긋나지 않고 바로 위까지 통할 수 있기 때문에 <불차(不差차이나지 않게함)>1라고 명명(命名)하였다.

이 문으로 들어가서 북쪽으로 꺾은 뒤에 큰 바위를 돌아 약 백여 보를 가면 석대(石臺)가 나오는데, 허리와 다리를 휴식하기에 적당하기 때문에 이 석대를 <하휴(下休)>2라고 명명하였다.

또 남쪽으로 꺾어서 오십 보쯤 가다 보면 층암(層巖)이 평탄한 데다가 벼랑의 바윗돌이 지붕처럼 위를 덮어 주어 여럿이 함께 쉴 수 있으므로 <기구대(棄拘臺)>3라고 명명하였다. 이곳에 오르면 온 길도 알지 못하고 갈 길도 보이지 않는데, 자신이 얼마나 높은 곳에 있는지 깨닫지도 못한 채, 사방을 돌아다보면 어느새 풍진세상과 멀리 떨어져 있다.

남쪽으로 가다가 바위를 돌아 전환해서 오십 보쯤 가면 산기슭이 더욱 험준하여 그 기세가 백척간두(百尺竿頭)와 같다. 또 북쪽으로 꺾어 수십 보를 가다가 서쪽으로 꺾어 몇 걸음을 가다 보면, 그야말로 우러러 숨을 몰아쉬는 상황에서 푸른 병풍이 눈앞에 솟구치며 그윽한 바위로 이어지는데, 이곳은 고요히 앉아서 생각을 집중하기에 알맞기 때문에 <중휴대(中休臺)>4라고 명명하였다.

또 동쪽으로 두 번 꺾고, 서쪽으로 두 번 꺾고, 북쪽으로 한 번 꺾고, 남쪽으로 한 번 꺾어서 올라가면, 산등성이에 소대(小臺)가 있는데, 그다지 기이하지는 않지만 손으로 가슴을 어루만지며 앉아 있기에는 적당한 곳이기에 <상휴(上休)>5라고 명명하였다.

상휴에서 북쪽으로 십 보쯤 위로 올라가면 3층(層)의 석대(石臺)가 있는데, 앉아 있노라면 심목(心目)이 상쾌해지면서 세상에 대한 그리움을 풀 수 있으므로 <창고(暢高)>6라고 명명하였다.

상휴에서 동쪽으로 칠팔 보쯤 아래로 내려가면 석대가 있는데 층층으로 앉을 수가 있고 구비마다 오묘한 데다가 옆에 송림(松林)이 있어서 건(巾)을 벗고 이마를 드러낼 수 있으므로 <쇄풍(灑風)>7이라고 명명하였다.

그 아래에 석실(石室)이 있는데, 사방 어디를 통해서도 들어갈 길이 없고, 오직 대(臺)의 동북쪽 모서리에 보일 듯 말 듯 돌사다리가 놓여 있을 뿐이다. 이 사다리를 타고 2장(丈)쯤 내려가서 남쪽을 엿보면 틈새 하나가 벌어져 있는데, 옷깃을 여미고서 겨우 뚫고 들어갈 수 있는 정도이다. 몸을 구부리고 몇 보를 가면 틈새가 다하면서 방 하나가 보이는데, 1장(丈) 정도 되는 그 공간이 밝고 안정되어 있으며, 가운데에는 한 그루 소나무가 있고 곁에는 두 떨기의 철쭉이 있다.

틈새의 동쪽에는 돌난간이 있고 난간의 머리 쪽에는 소대(小臺)가 있는데, 소대와 석실은 서로 보이지는 않아도 서로 소리쳐서 부를 수 있다. 난간을 돌아 틈새를 따르며 진퇴(進退)하기에도 가까우니, 여기에 지시(祗侍)하는 자리를 마련해도 좋을 것이다. 대개 이 석실은 가까이서 보면 보잘것없어도 멀리서 바라보면 기이하기만 한데, 그 문을 찾지 못하면 서 있는 것이 우뚝하게 높아서 따라가려 해도 따라갈 길이 없으니, 특이하다고 하겠다.

상휴(上休)에서 산등성이를 넘고 나서 서쪽으로 꺾어 칠팔십 보를 갔다가 다시 동쪽으로 꺾어 몇 걸음을 가면 석문(石門)이 나온다. 문 가운데에 사다리가 있어서 오를 수 있고, 문의 좌우에 대(臺)가 있어서 앉을 수 있는데, 문의 북쪽에는 벽이 있어서 세상 사람의 왕래를 막는 것처럼 보인다.

길이 바야흐로 서쪽으로 올라갔다 싶으면 문이 홀연히 북쪽에 있어서 동천(洞天)으로 들어가는 길이 신묘하여 헤아릴 수 없으니, 이는 안자(顔子)가 성인(聖人)의 도를 찬탄한 것과 같은 점이 있기에, <첨홀(瞻忽)>8이라고 명명하였다.

문으로 들어가서 동쪽으로 몇 걸음을 옮겨 북쪽을 바라보면 또 크고 작은 두 개의 문이 나란히 서 있는데, 큰 것은 곧고 작은 것은 굽었으나 일단 올라서면 길이 같아져서, 성품대로 하거나 회복해서 하거나 그 귀결점은 하나인 이치와 부합하는 점이 있기에 <지일(至一)>9이라고 명명하였다.

문 위의 동쪽 편에 두 개의 대(臺)가 나란히 줄지어 서 있는데, 곧장 북쪽으로 가파른 벽이 허공을 지탱하고 있으므로 그 위는 보이지 않는다. 문으로 들어가 서쪽으로 꺾어서 수십 보를 가면 10여 장(丈) 높이의 층진 병풍이 백여 보에 걸쳐 가로 놓여 있고, 몇 가닥 흐르는 물이 폭포로 날리며 병풍 위로 쏟아지는데, 가운데 가닥이 쏟아지는 곳을 보면 병풍의 머리가 조금 오목하여 완연히 쪽문과 같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바위가 놓여 있는데, 그 바위가 병풍의 절반과 폭포의 허리 부분을 점거하고 있으면서 그 형세가 평탄하고 널찍하니, 이는 조물자(造物者)가 바람 이는 정자를 세우도록 준비해 둔 곳이라고 하겠다.

길고 희게 늘어진 물줄기가 바위의 북쪽을 돌아 굴러서 또 동쪽으로 아래 병풍의 위에 떨어지는데, 일단 떨어진 뒤에는 쌓인 돌의 밑바닥으로 스며들어 폭포에는 미치지 못하니 물이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물이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 까닭에 골짜기가 있는지를 더욱 알지 못하니, 이는 조물(造物)이 신령한 지경(地境)을 깊숙이 숨겨서 무릉도원(武陵桃源)의 봄빛을 누설하지 않고자 함이리라.

폭포에서 동남쪽으로 수십 보 아래에 백색의 석인(石人)이 서 있는데, 신장은 3장(丈) 남짓하며, 첨홀문(瞻忽門)을 향해 조금 허리를 굽히고 있다. 여기에서 바위에 올라서면 아까 보았던 우뚝 공중에 떠오른 붉은 단애(斷崖)와 푸른 절벽(絶壁)들이 모두 나와 친근한 물건들이 되어 숲처럼 늘어서서 둥글게 옹위(擁衛)하며 회교헌기(回巧獻伎)하고 있는데 귀신이 조각해 놓은 듯한 이 경물(景物)을 어떻게 말로 형용할 수가 없다.

머리를 돌려 바라보면, 대둔산(大屯山) 위로부터 문소동(聞簫洞) 어귀에 이르기까지 여러 산봉우리들이 십여 리에 걸쳐 줄지어 서 있는 것이 마치 길고 짧은 비단 보장(步障)을 굽이굽이 병풍마냥 쳐놓은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폭포는 이미 동천(洞天)의 삼분의 일을 내려와 있는데도, 세상길을 아래로 내려다보면 인마(人馬)가 다니는 것이 마치 개미가 개밋둑을 지나가는 것과 같으니, 안목을 갖춘 자가 여기에 이르면, 상청(上淸)의 선구(仙區)에 들어가는 문호(門戶)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앉아서 얼굴을 쳐들고 눈을 들어 바라보면, 단지 울퉁불퉁 가파른 하나의 산봉우리가 땅 위에서 만길 높이로 뽑혀 올라온 것일 뿐이니, 그 위에 동부(洞府)가 깊숙하고 그윽하며 지세(地勢)가 넓고 한가할 줄이야 그 누가 알겠는가.

내가 꿈속에서 쇠 자물쇠가 잠긴 구리 궤〔金鎖錫樻〕를 얻고 나서 며칠이 지나지 않아 이 동천(洞天)을 발견했는데, 하나하나가 모두 꿈속에서 본 것과 부합되었으므로, 이 동천을 <금쇄(金鎖)>10라고 명명하였다.

폭포의 곁을 따라 바위를 붙잡고 엉금엉금 기어서 올라가면, 형세가 또 조금 평평해지면서 깎아 세운 듯한 몇 길의 바위가 나타나는데, 위는 예리하고 아래는 펑퍼짐하여 물길을 정면으로 가로막고 있으므로, 튀어 오르는 물살이 남쪽 틈을 엿보면서 난석(亂石)으로 방향을 바꿔 내려가니 이것이 폭포의 상류(上流)이다.

바위의 북쪽 틈새를 따라 서쪽으로 육십 보쯤 올라가면 큰 바윗돌들이 지면에 노출된 채 개 이빨처럼 교차되어 있는데, 물이 그 사이를 빠져나가며 구불구불 꺾여서 흘러 내려가니 이 역시 작은 폭포를 이룬다.

바윗돌은 정결해서 앉을 수가 있고, 물은 청결해서 움켜 마실 수가 있으니, 나의 휴식을 기다린 듯도 하고, 나의 갈증을 아는 것 같기도 하다. 흐름을 따라 서쪽으로 백여 보를 올라가면, 여기가 바로 물이 시작되는 곳으로 동천의 안쪽 문이 된다.

그 백여 보 사이에 땅에 드러난 바윗돌들이 개 이빨처럼 교차되어 있는데, 사람이 앉을 만하면서 물이 굽이쳐 흐르는 곳이 또 몇 군데 있다. 그곳의 자갈들을 걷어 내고 흙들을 긁어내면 물이 흐르는 곳 모두가 빠짐없이 석조(石槽 돌구유)를 이루어서 사랑스럽지 않은 것이 없다.

물이 시작되는 곳 북쪽에 2층의 섬돌과 두 그루의 교목(喬木)이 있고 섬돌 옆에 작은 우물이 있는데, 시골 노인의 말에 의하면 이곳이 세속에서 말하는 거사배(居士輩 사당패)가 지내던 불당(佛堂)의 옛터라고 한다.

여기에서 방향을 꺾어 남쪽으로 수십 보를 가면 평탄하게 펼쳐진 땅이 나오는데, 남쪽은 넓고 북쪽은 좁으며 그 길이는 약 여덟아홉 칸쯤 된다. 넓은 곳에는 바위가 있는데, 섬돌 같기도 하고 병풍 같기도 하며, 바위 아래의 지형은 용이 똬리를 튼 듯하여 세 칸의 가옥을 들여놓을 만하다.

두 개의 도랑이 양쪽에서 내려오다가 좁은 곳에서 합쳐지는데 풀만 있고 물은 없으니 이는 마른 도랑이다. 그러나 일단 한데 합쳐진 뒤에는 물이 있으니, 아마도 샘물의 근원이 도랑 밑바닥에 잠복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두 도랑 위에 각각 계곡이 있는데, 서쪽 계곡은 그윽하고 깊으며 널찍하게 여유가 있는 반면에 동쪽 계곡은 그렇지 않다. 그런데 물길이 나뉜 형태가 아득히 멀리까지 계속해서 이어져 있으니, 비가 오면 물이 이 물길을 통하여 흘러나올 것이 분명하다.

용이 똬리를 튼 곳에 앉아서 바라보면 산세(山勢)가 사방으로 에워싸여 담장 같기도 하고 장벽 같기도 하다. 좌우로 팔처럼 벋은 산세가 열 걸음 안쪽에서 둘러싸고 있는데, 좌측 팔의 부분은 앞을 감돌아 일어나서 작은 산이 되었고, 우측 팔의 바깥은 두 겹의 등성이가 두 개의 도랑이 서로 만나는 아래로 감돌고 있으며, 그 바깥의 중첩된 허리 부분에도 작은 봉우리가 놓여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만길의 위에서 북쪽을 향한 땅에 있어도 팔풍(八風)이 들어오지 않으니, 천지(天地)가 뒤흔들려 나부끼는 때라도 이곳에는 먼지나 티끌이 떠 있지 않을 것이다. 대개 그 좌측은 완연히 운곡(雲谷) 초당(草堂)의 우측과 비슷하지만, 그 우측은 운곡 초당의 좌측에 없는 것이다.

외산(外山)의 석봉(石峯)이 얼굴을 마주하고 서 있으니, 이는 대개 산세(山勢)가 대둔산(大屯山)에서 북쪽으로 와서 수정동(水晶洞)을 휘감고는 서쪽으로 꺾이고 남쪽으로 전환했다가 다시 서쪽으로 와서 이 석봉이 된 것인데, 날개 펴고 앞으로 향하는 듯 드높이 청명(靑冥 창공)에 솟구쳐서, 그 옆에 부차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

또 여기에서 내려와 계속해서 서쪽을 향하다가 위봉산(威鳳山)을 지나서는 남쪽으로 꺾이고 또 동쪽으로 꺾여 문소동(聞簫洞)을 지난 뒤에 동쪽으로 계속 달리다가 점점 높아져서 이 동천(洞天)이 되고 다시 북쪽으로 와서 이 터를 이룬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산이 석봉에서 내려온 것이 이미 십 리를 지났는데도, 가깝게 여겨지는 것이 마치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을 것만 같다. 석봉의 밖으로는 여러 산들이 둥글게 에워싸고서 혹은 서로 밀치며 다투어 나아오기도 하고 혹은 용모를 단정히 하고는 떨어져 서 있기도 하다. 그리하여 멀게는 백여 리, 가까워도 수십 리를 밑돌지 않는 거리에서, 모두들 문간 밖이나 층계 사이에서 공경히 손을 맞잡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섬돌에 있는 바위로 말하면, 그 등성이가 울퉁불퉁 크게 튀어나와 올라가서 조망할 수 있게 하기도 하고, 집을 그곳에 앉혀놓으면 높게는 창문에 해와 달빛이 가려지지 않고, 낮게는 지붕에 두 눈의 시선이 막히지 않을 것이니, 조화옹(造化翁)의 계획이 교묘하다고 말할 만하다. 이 바위가 이 터보다 높다고 해야 겨우 한 길 정도인데, 기이하고 수려한 경치를 거두어 모으는 것은 또 갑절이나 된다.

삼라(森羅)한 경치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지만, 그중에서도 월출(月出)의 여러 산들이 하늘길을 밝게 비치고, 천왕(天王)의 한 봉우리가 두극(斗極 북두성과 북극성) 사이에 우뚝 서 있다. 시선이 여기에 걸리면 사람으로 하여금 즐거워서 모든 근심을 잊게 하고, 그밖에 내려다보이는 세상의 시끄러운 일들을 모두 버려둘 수 있기에, 이 바위를 명명하여 <월출암(月出巖)>11이라고 하였다.

이 바위는 넓고 길어서 수십백 인이 나란히 앉을 수가 있고, 왕왕 그 사이에 틈새가 벌어져서 거북이 무늬처럼 쪼개진 것도 있고 용의 비늘처럼 합쳐진 것도 있는데, 이 틈새마다 모두 송백(松柏)을 심어서 그늘을 지우게 할 수 있으니, 이 역시 조화옹의 넉넉한 지혜의 소산이라고 하겠다.

바위의 위쪽을 따라서 남쪽으로 육칠십 보쯤 가면 여기가 상봉(上峯)이다. 봉우리의 머리는 평탄하고 둥글며 넓고 툭 트였는데, 그 가운데에 반석(盤石) 몇 좌(坐)가 있어서 대(臺)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 이르면 사방 천리의 산과 바다가 모두 눈 아래에 놓여 있어서, 흐르는 것과 치솟은 것, 높은 것과 낮은 것, 곧은 것과 굽은 것, 긴 것과 짧은 것, 펴진 것과 주름진 것, 아스라이 보이는 것과 운무(雲霧) 자욱한 것들이 멀고 가까운 곳에 산뜻하고 아름답게 펼쳐져 있으므로, 한나절 동안 돌아다보아도 하나하나 두루 미치기가 어렵다.

그런 중에서도 황원(黃原)의 선롱(先隴선영(先塋))의 산이 분명히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사이에 들어 있어서, 끝내 유회이인(有懷二人)의 뜻이 있기에 <유회(有懷)>12라고 그 대(臺)를 명명하였다.

동쪽으로 몇 걸음을 가서 남쪽을 돌아보면, 석대(石臺)가 산등성이에 옆으로 튀어나왔는데, 그 형세가 공중을 나는 것 같고 그 모양은 노반(露盤)과 비슷하다. 거기에서 보이는 것은 유회의 남쪽 경치를 온전히 얻고, 유회의 동서쪽 경치를 반쯤 얻었으며, 깊은 구렁과 높은 산들이 첨가되어 있다.

평평한 들판에는 마을이 뒤섞여 있고, 인가의 연기가 산기슭에 일어났다 사라지는데, 전거촌(全巨村)을 옆으로 굽어보면 선조(先祖)의 묘역(墓域)에 있는 나무를 셀 수가 있어서 추원(追遠)의 마음이 뭉클 일어나기에, <추원(追遠)>13이라고 그 대(臺)를 명명하였다.

또 동쪽으로 조금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서 칠십 보쯤 걷다 보면 산의 오른쪽 어깨 부위에 이른다. 그 어깨 바깥으로 석대가 혹처럼 붙어 있는데, 그 모양이 대략 추원과 같아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앞이 어질어질하며 가슴이 두근거려 자신을 가누지 못하게 한다.

산점(山店)이 발밑의 반공중(半空中) 아래에 있어서 촌락의 모습이나 닭과 개 소리가 연무 속에 아련하니, 하계(下界)의 형역(形役)을 상상해 보면 이 몸이 초연함을 더욱 느끼게 된다. 여기에서 보이는 것은 유회(有懷)의 서쪽 경관을 반쯤 얻고 유회의 동남쪽 경관을 온전히 얻었는데, 태양이 떠오를 적에 맨 먼저 붉게 물드는 곳으로는 여기만한 데가 없기 때문에 <인빈(寅賓)>14이라고 명명하였다.

또 월출암(月出巖)에서 북쪽으로 도랑을 건너 백 보쯤 위로 올라가면 바로 앞에서 말한 작은 산으로 둘려 있는데, 옆은 험하고 위는 평평하여 돌을 포개고 흙을 쌓을 필요도 없이 저절로 하나의 대(臺)가 이루어졌다. 여기에서 보이는 것은 유회 북쪽의 경치를 온전히 얻고 유회 동서의 경치를 반절 얻었다.

그런데 여기에 이르면 아래로 길이 끊어지고 위로 하늘이 가까워서 홀가분하게 멀리 유람하고픈 흥치가 일어나는 한편으로, 마부(馬夫)가 슬퍼하고 나의 말도 생각에 잠겨 그리워하는 생각이 일어나기 때문에, <국고대(跼顧臺)>15라고 명명하였다.

대(臺) 아래 서북쪽에 깊은 계곡이 있으니, 바로 옥녀동(玉女洞)이다. 내가 지난해 여름에 이곳을 발견하였는데, 여기도 기이한 형상을 지니고 있다.

국고에서 동쪽으로 험준한 비탈길을 수십 보 내려오고 다시 동쪽으로 십여 보를 올라가면 남쪽과 북쪽 모두 깎아지른 절벽이 나타나는데, 그 위는 평탄하게 되어 있다. 암석이 포개져서 위로 돌출하였는데, 아래는 작고 위는 커서 마치 떠받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형태는 둥글고 그 직경은 10여 자요 그 높이는 1장(丈) 남짓이다. 한 면은 조금 낮아서 손으로 모서리를 잡을 수가 있는데, 사람으로 하여금 등 뒤를 밀게 해서 위로 올려보내면, 그 정상에 몇 사람이 앉을 수가 있다.

그리고 옆에는 반석(盤石) 7좌(坐)가 두 줄로 열을 이루고, 또 별처럼 흩어진 자리 몇 개가 있는데, 신선들이 도를 강론하던 장소가 아닐까 의심되기에 <집선대(集仙臺)>16라고 명명하였다.

여기에서 보이는 것은 유회의 동쪽ㆍ서쪽ㆍ북쪽 경관의 절반을 얻었으며, 안으로는 월출암이 돌아다 보이고, 앞으로는 폭포 상류의 샘물이 숲을 휘감고 바위를 감싸는 모양이 굽어다 보인다.

그 북쪽에 층암(層巖)이 있어서 십여 인이 앉을 수 있으며, 바위 위에 또 반석 1좌(坐)가 있는데, 위로는 무성한 숲이 가려 주고 아래로는 천풍(天風)을 끌어당길 수 있으니, 비록 쇠를 녹이는 무더운 날을 만나더라도 얼른 이 사이에 오기만 하면 필시 한문(寒門)에 날아오른 듯한 기분이 들 것이요, 인간 세상이 아득히 머나멀고 모든 길이 막히고 끊어졌으니, 비록 쏴아 하고 불어닥치는 바람과 약속하지 않더라도 자연히 전장(戰場)의 티끌과 모래를 함께 데리고 오지는 않을 것이다.

동쪽으로 몇 걸음을 내려가면 천연(天然)의 석대(石臺)가 있는데, 삼면(三面)이 깎아 놓은 듯하고 그 위는 숫돌과 같으며, 서쪽은 한 첩(疊) 병풍을 펼쳐서 기대어 놓은 듯하다. 석대의 가운데에는 움푹 팬 술독이 있어서 두세 병 정도의 술을 쏟을 수가 있고, 술독 주변으로 네다섯 명 정도는 충분히 둘러앉을 수가 있으니, 여기가 바로 선인(仙人)들이 술잔을 기울이던 곳임을 알겠는데, 돌의 틈새에 끼인 술지게미가 지금도 냄새를 풍기는 듯하다.

내가 여기에 올라올 적에는 바야흐로 창연(蒼然)하게 모색(暮色)이 멀리에서 다가오고 있었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때에 이르러서도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더니, 조금 뒤에 뜬구름이 사방에서 걷히고 은빛 월궁(月宮)이 공중으로 솟아오르매, 취선(醉仙)이 약을 요구하자 옥토끼가 하마(蝦蟆 달 속의 두꺼비)를 조제하려고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에, 마침내 <흡월(吸月)>14이라고 명명하였다.

여기에서 보이는 것은 단지 집선(集仙) 동쪽의 경치만을 얻을 뿐이나, 남쪽으로 병폭(屛瀑)을 굽어보며 서로 호응할 수가 있다. 그리고 폭포에서도 이곳에 등반할 수는 있지만, 반드시 사다리를 부여잡고 어렵사리 한 걸음 한 걸음에 혼이 달아나야만 올라올 수가 있다.

거기에서 동쪽으로 몇 걸음을 옮기면 키 작은 돌병풍이 줄지어 서있고, 그 병풍의 동쪽 모서리에 깎은 듯 하나의 대(臺)가 솟았는데, 아래로는 땅이 안 보이고 위로는 하늘에 잇닿은 가운데, 바위의 모서리가 오각(五角)의 형태로 튀어나와 완연히 함담(菡萏 연꽃)을 피웠는데, 그 옆에 기대면 가슴이 두근거리지도 않고 그 위에 앉으면 심신이 매우 안정되고 편안하다.

그리고 만세토록 더 자라지 않을 고송(孤松)이 그 뒤에서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데, 이는 참으로 학상인(鶴上人)이 수레를 멈출 만한 곳이라서, 이백(李白)의 시어(詩語)를 취하여 <연화(蓮華)>18라고 명명하였다.

거기에서 보이는 것은 흡월(吸月)에서의 경치와 같은데, 동서의 점촌(店村)이 죽림(竹林)의 모옥(茅屋)을 희미하게 드러내는 가운데, 긴 시냇물이 빙 돌아 흐르고 좁은 길이 굽이굽이 이어져서 하나의 기이한 그림을 더 선사하고 있다.

조심조심 군색한 걸음으로 열 걸음쯤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그 사이에 암석이 대(臺) 같기도 하고 탑(榻) 같기도 하며, 구부러진 병풍 같기도 하고 위태로운 난간 같기도 하여 그지없이 기묘한데, 앉아도 좋을 만한 곳들을 모두 기록할 수가 없다.

가장 아래쪽에 모양이 석감(石龕)과 같은 것이 수백 자 높이의 기암괴석 가운데에 매달려 있는데, 사방이 모두 푸른 절벽일 뿐이라서 부여잡고 올라갈 길이 하나도 없으나, 윗면의 동북쪽 모서리에 사다리를 걸어서 내려갈 만한 곳이 있고, 아래의 서남쪽 모퉁이에 다리를 놓아서 올라갈 만한 곳이 있다. 북쪽은 큰 암석이 높이 치솟고, 동쪽과 서쪽은 바위너설이 낮게 끼고 있으며, 오직 남쪽만이 툭 터져서 멀리까지 보인다.

거기에서 보이는 것은 연화(蓮華)에서의 경치와 같다. 그중 몇 군데 앉을 만한 곳은 흙을 머리에 이고서 평화롭고 안온하며 부드러운 풀밭이 마치 융단처럼 펼쳐져 있는데, 푸른 소나무 두 그루가 서로 그늘을 드리우고 있어 기선(棊仙)이 대좌(對坐)할 곳으로 아주 적당하기에 <난가대(爛柯臺)>19라고 명명하였다.

그 옆과 그 아래는 석면(石面)이 층층이 쌓여서 시동(侍童) 십여 명쯤을 띄엄띄엄 앉힐 수가 있다. 그리고 병폭(屛瀑)이 거기에서 서남쪽으로 마주한 봉우리 아래에 있는데, 약 백 보쯤 떨어져 있으므로 서로들 내려다보고 올려다보며 대화를 나눌 수가 있다.

또 국고(跼顧)에서 왔던 길을 되밟으며 남쪽으로 수십 보를 가면, 그곳이 바로 좌측 팔에 해당하는 부위의 낮은 곳이다.

또 산의 옆구리를 따라 서쪽으로 수십 보를 가면 석대(石臺)가 우뚝 솟았는데, 석대 아래가 바로 옥녀(玉女)의 서쪽 계곡이다. 계곡 속의 수풀이 가까이에서 깊고 그윽한 곳을 뒤덮어 가리기 때문에 대(臺) 위에서 보이는 것은 겨우 유회(有懷) 서북(西北)에서 보는 경치의 절반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대 옆에 소나무가 푸르게 우거져서 세한(歲寒)에 홀로 지조를 지키고 있는데, 낙일(落日) 무렵에 올라가 굽어보면 마치 율리(栗里)에서 서성거리는 사람을 보는 것 같기에, 마침내 <고송(孤松)>20이라고 명명하였다.

이상 열 개의 대(臺)는 경치가 특히 빼어난 것만을 뽑은 것이다. 이밖에도 볼 만한 것이 매우 많으나 주거강황(邾莒江黃)을 어느 겨를에 다 설명하겠는가. 기구(棄拘)와 쇄풍(灑風)과 창고(暢高)와 삼휴(三休)는 또한 처한 위치가 아래에 속하기 때문에 여기에 끼이지 못하였다.

나는 병폭(屛瀑)의 아래에 있는 평탄한 그 바위 위에다 조그마한 정자를 지으려 한다. 그리하여 차가운 비와 느닷없는 눈발에 흥이 깨지는 불상사를 면하고 꽃피는 아침과 달 뜨는 저녁에 뜻 가는 대로 소요(逍遙)한다면, 거연(居然)히 나의 수석(水石)의 즐거움을 자연히 얻을 수 있을 것이요, 이와 함께 유람하는 사람들이 휴식할 수 있는 공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니, 이 또한 하나의 기사(奇事)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아래에서 오는 자가 이곳에 이르면 어느새 이 구역이 묘연(杳然)하여 신관(神觀)이 상쾌한 것을 깨닫고는 문득 세상을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겠기에 그 정자를 <휘수(揮手)>21라고 명명하려 한다.

또 월출암(月出巖)의 북쪽에 작은 집을 지어, 편히 앉아서 정신을 기르는 장소로 삼고, 그 집을 <회심(會心)>22으로 명명하고자 한다. 그 뜻은 어디에 있겠는가.

천석(泉石)과 원경(遠景)을 둘 다 온전히 얻기 어렵다는 것이 바로 천하 고금의 말이다. 그런데 십대(十臺)의 원경과 일정(一亭)의 천석이 수백 보 사이에 둘러 있고, 집이 그 가운데에 거하여 모두 통합해 차지하고 있다면, 이것이 바로 회심이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높은 산의 맨 꼭대기는 반드시 기운이 차갑고 바람이 매섭기 때문에 신기(神氣)가 왕성하고 뼈대가 강한 자가 아니면 감히 거하지 못하는 법이다. 그런데 이곳으로 말하면, 기후가 온화하고 분위기가 안정되어 병든 몸을 요양할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회심이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예로부터 절경(絶境)은 찾아가기 어렵다고 일컬었다. 그래서 고정(考亭 주희(朱熹))도 운곡(雲谷)에는 한 해에 한두 번밖에 가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곳으로 말하면, 세상 사람들이 귀와 눈으로 일찍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곳이건만, 사람이 사는 경계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그래서 거리가 나의 수정산(水晶山) 거처와는 5리(里)도 채 되지 않고, 문소산(聞簫山) 거처와는 1리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일환(一丸)의 요새와 천년의 비경(秘境)이 무슨 인연으로 나에게 개방되어, 비쩍 마른 내 육신을 날마다 데리고 가게 함으로써, 고정(考亭) 부자(夫子)가 도화(圖畫)나 이따금 감상하며 스스로 위로하려고 했던 그리움이 나에게 있지 않게 하였단 말인가. 이것이 바로 회심이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번 북쪽 창문을 열면 가산(家山 고향)이 눈 안에 들어오고, 인친(姻親)들의 밥 짓는 연기가 분명히 바라다보이니, 비록 궁벽한 오지(奧地)에서 가사(家事)를 단절하고 자취를 감춘다 하더라도, 송추(松楸 선영(先塋))에 대한 감회와 상재(桑梓고향)에 대한 외경심을 잊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지금 발걸음을 옮기기만 하면, 국고(跼顧)에서 북신(北辰)을 올려다보고 인빈(寅賓)과 고송(孤松)에서 일월(日月)을 바라보고 유회(有懷)와 추원(追遠)에서 고복(顧復부모의 은혜)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집이 실로 나로 하여금 표표연(飄飄然)히 세상을 버리고 홀로 우뚝 서서 우화등선(羽化登仙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감)하는 뜻을 갖게 하면서도, 끝내는 또 나로 하여금 부자(父子)와 군신(君臣)의 윤리(倫理)를 도외시하지 않게 하고, 이 집이 실로 나로 하여금 낚시하고 밭갈이하는 흥치와 거문고 타고 장구 치는 즐거움을 오롯이 하게 하면서도, 끝내는 또 나로 하여금 전철(前哲)의 향기로운 발자취를 높이 우러르고 선왕(先王)이 끼친 기풍(氣風)을 노래 부르게 하니, 이것이 바로 회심이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이곳은 지세(地勢)가 괄창(括蒼)이라고 할 수 있는데도 스스로 깊숙한 곳에 들어앉아 있으니, 이는 높으면서도 자기를 능히 낮추는 것이요, 시선(視線)이 백리 밖에까지 미치면서도 산수(山藪)의 병통이나 천택(川澤내와 못)의 오염 같은 것은 일절 보이는 것이 없으니, 이는 밝으면서도 잗달게 따지지 않는 것이요, 주위를 조밀하게 에워싸고 있는데도 일월성신(日月星辰)이 조림(照臨위에서 내리 비침)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는 보위(保衛보호하고 방위함)하면서도 엄폐(掩蔽)하지 않는 것이요, 사람 사는 마을까지 신기(神氣)가 감도는데도 나직한 구릉이 안에서 가로막고 옆으로 벋은 산이 밖에서 차단하니, 이는 트였으면서도 엉성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빼어나게 수려한 산봉우리는 아무리 멀리 있어도 얼굴을 펴고서 영접하지 않음이 없고, 개밋둑과 같은 잡다한 것들은 아무리 가깝게 있어도 감히 문장(門墻)을 엿보지 못하게 하니, 이는 지란(芝蘭)을 대하듯 현인(賢人)을 가까이하는 것이요, 미워하지 않고서 엄격하게 소인(小人)을 대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내면은 토지(土地)가 따스하고 윤기가 있으며 외면은 각진 모서리가 예리하고 가파르니, 이는 충신(忠信)을 위주로 하면서 의(義)로써 밖을 바르게 함이요, 유색(柔色부드러운 얼굴)과 완용(婉容정숙한 자태)으로 조종(祖宗모든 일의 근본이 되는 자리)의 삼중(三重)의 산을 마주하니, 이는 시선을 두는 예절이며 안색을 살펴 받드는 공경이요, 여러 아름다움을 다 함께 갖추었어도 세상 사람이 보지 못하는 곳에 있으니, 이는 그 도는 드러내고 그 몸은 숨김이요, 능히 큰 산으로 하여금 옹위(擁衛부축하여 호위함)하게 하면서도 자기가 처한 곳은 지극히 작으니, 이는 교화함은 광대하면서 조수(操守지조나 정조를 굳건히 지킴)함은 간이(簡易간단하고 쉬움)한 것이다.

새기고 그리며 분을 발라 장식하고 포치(布置 안배(按配))하여 알록달록 꾸미는 것 등은 모두 여러 산들의 몫으로 부치고, 자기는 잘하는 것을 한 가지도 자랑하지 않는 것을, 마치 이(利)ㆍ정(貞)ㆍ형(亨)에 대한 원(元)이나 금(金)ㆍ목(木)ㆍ수(水)ㆍ화(火)에 대한 토(土)처럼 하니, 이는 성인(聖人)을 한 가지 선(善)으로만 지목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 집이 일단 이 땅을 차지한 이상에는 땅의 아름다움이 바로 집의 아름다움이 되었으므로, 내가 뭐라고 이름 지을 수 없기에 회심(會心)이라고 명명하였다.

내가 휘수정(揮手亭)과 회심당(會心堂)을 경영하려는 마음은, 마치 굶주리고 목마른 자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생각하는 것과 같으나, 한해의 농사가 마침 크게 흉년이 들어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허덕이는 때라서, 공역(工役)에 필요한 식량을 마련할 길이 없기에, 장획(臧獲) 몇 구(口)를 속바치게 하여 공사 비용을 충당하려고 한다.

천석(泉石)이 또한 내 마음속에 있는 물건이 아니라서 장획을 헐값으로 마구 내놓아 도모하려고까지 하니, 나의 산수(山水)에 대한 고질병이 너무 과한 것은 아니겠는가. 사람들이 비웃을 것은 물론이지만, 나 역시 자조(自嘲)의 웃음을 짓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긴 하지만 옛사람이 말하기를 “고기가 없으면 살이 마를 뿐이지만, 대나무가 없으면 마음이 비속해진다.”라고 하였으니, 장획은 비유하면 고기라고 할 것이요, 천석은 비유하면 대나무라고 할 것이다.

내가 취사(取舍취하고 버리는것)한 것은 실로 여기에 있으니, 후세의 군자 중에 이를 제대로 말해 줄 이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신사년(1641, 인조19) 세모(歲暮)에 금쇄주인(金鎖主人)은 기문(記文)을 짓다.

월출(月出)은 산 이름이고, 천왕(天王)은 봉우리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