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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28 21:00:00

기 14세 드 라발

이름 기 14세 드 라발
Guy XIV de Laval
이명 프랑수아 드 라발몽포르
François de Laval-Montfort
출생 1406년 1월 28일
프랑스 왕국 라발
사망 1486년 9월 2일
프랑스 왕국 샤토브리앙
아버지 장 드 몽포르
어머니 안 드 라발
형제자매 앙드레, 루이, 잔, 카트린
부인 이자벨 드 브르타뉴, 프랑수아즈 드 디낭
자녀 욜란드, 잔, 프랑수아, 장, 아르튀스, 피에르, 엘렌느, 루이즈, 피에르, 프랑수아, 자크
직위 제1대 라발 백작, 샤티용 영주, 비트레와 라 로슈 남작
1. 개요2. 행적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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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귀족, 장군. 백년전쟁 시기에 잉글랜드군과 맞섰으며, 브르타뉴 공작과 프랑스 국왕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했다.

2. 행적

1406년 1월 28일 프랑스 왕국 라발에서 케르고를레, 라 로슈-베르나르 남작, 라 브레테세, 로에아크, 몽장 등지의 영주였던 장 드 몽포르와 라발의 영주인 기 12세 드 라발의 외동딸인 안 드 라발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앙드레, 루이가 있었고, 누이로 잔[1], 카트린[2]이 있었다.

아버지 장 드 몽포르는 기수 기사로서 프랑스군에 복무했고,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파 간의 내전 때 아르마냑파를 돕기 위해 7명의 기사와 180명의 종자를 포함한 600명의 군대를 지휘했다. 1412년 장인이 사망하자 자신을 기 13세 드 라발이라고 칭했다. 1412년 7월 부르주 평화 협약이 체결되면서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파의 내전이 중지되자, 그는 예루살렘에 순례해 그리스도의 무덤에서 기도하기로 하고, 배를 타고 팔레스타인으로 가서 목적을 달성한 뒤 로도스로 갔다가 그곳에 창궐한 전염병에 걸려 1414년 8월 12일에 사망했다.

그는 죽기 전에 집으로 보낸 서신에서 아내에게 자신의 영지를 지키고 통치할 전권을 맡기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안 드 라발이 브르타뉴, 앙주, 메인, 노르망디, 프랑스, 피카르디, 플란데런, 에노, 아르투아 등지에 넓게 펼쳐진 남편의 영지를 전적으로 관리했고, 아직 미성년자였던 장 드 몽포르의 아이들 역시 안의 후견을 받았다. 이에 장 드 몽포르의 아버지인 몽포르 영주 라울 드 몽포르가 자신이야말로 아이들을 양육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수년 간의 법정 소송 끝에,1417년 파리 의회에서 고인의 뜻대로 하기로 확정했다.

기 14세는 브르타뉴 공작 장 5세의 궁정에서 자랐으며, 1419년 공작의 딸 마르그리트와 약혼했지만 1427년 마르그리트가 사망하면서 무산되었다. 1424년 아르튀르 드 리슈몽과 함께 아라곤 출신의 앙주 공작부인인 욜란다가 앙제 성에서 개최한 토너먼트에 참여했다. 1429년 오를레앙 공방전을 승리로 이끈 잔 다르크장 2세 달랑송루아르 원정을 단행했을 때 동생 앙드레와 함께 합류했다. 그들은 루아르 원정에서 두각을 드러냈고, 특히 파테 전투에서 선두에서 싸워서 잉글랜드군을 대파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랭스 행진에 참여했고, 1429년 7월 17일 샤를 7세랭스에서 프랑스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했을 때 참여했다. 샤를 7세는 라발 남작이었던 그를 제1대 라발 백작에 선임했다. 이는 라발 시를 잉글랜드군에 빼앗기면서 큰 손해를 입었음에도 자비를 들여가며 자신을 위해 싸운 것에 대한 보상이었다. 또한 샤를 7세는 그에게 '왕의 사촌'이라는 칭호를 부여했으며, 아르마냐크, 푸아, 수아송 백작들이 누렸던 것과 동일한 지위와 명예를 부여했다. 이후 앙드레가 프랑스 원수로 발탁되어 활약하는 동안, 그는 1430년 라발 영지를 경영했고 라그니의 총독을 역임하기도 했다. 한편, 1430년 10월 1일 브르타뉴 공작 장 5세의 딸인 이자벨과 결혼했다.

1431년, 장 2세 달랑송은 낭트를 방문해 브르타뉴 공작 장 5세에게 자신의 어머니이자 브르타뉴 공작 장 4세의 딸이며 장 5세의 누이인 마리 드 브르타뉴의 지참금 중 아직 미지급된 15,000 크라운을 달라고 요구했다. 장 5세가 시원한 응답을 하지 않자, 장 2세 달랑송은 외삼촌에게 압력을 가하기로 마음먹고 사촌인 몽포르 백작 프랑수아[3]를 납치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그 대신 낭트의 주교이자 장 5세의 총리였던 장 드 말레트르와를 납치해 푸앙세로 끌고 갔다. 장 5세는 자신의 총신을 납치한 장 2세 달랑송에게 분노해 렌과 그 주변 지역에서 군대를 집결한 뒤 사위인 기 14세 드 라발에게 지휘권을 맡겨 푸앙세를 공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후 기 14세는 1432년 1월 16일부터 2월 22일까지 푸앙세 공방전을 이어가다가 장 5세의 동생이자 프랑스 사령관인 아르튀르 드 리슈몽의 중재로 평화 협약이 체결되자 철수했다.

1435년, 질 드 레는 군직에서 은퇴한 뒤 막대한 빚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자기 영지를 팔아치워서 자금을 마련하려 했다. 이에 질 드 레의 친족이었고, 동생 앙드레가 질 드 레의 외동딸 마리의 남편이기도 했기에 나중에 질 드 레의 영지를 상속받을 가능성이 높았던 그와 앙드레는 반발해 질 드 레의 남동생 르네와 함께 질 드 레를 고발했다. 파리 의회는 질 드 레가 자기 영지를 남에게 팔아치우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을 반포했다. 이때 질 드 레의 영지 일부가 이미 브르타뉴 공작 장 5세에게 넘어가기로 계약이 논의되고 있었는데, 두 사람은 이 판결을 얻어낸 뒤 브르타뉴 공작에게 계약 진행을 취소해달라고 요구했다.

장 5세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그들은 자신들에게 돌아가야 할 영지를 내주지 않기 위해 다시 한 번 소송을 제기하려 했다. 그러나 장 5세는 1437년 질 드 레와 모든 계약을 완료하고 거액의 자금을 질에게 제공하는 대가로 영지를 받아냈다. 이후 라발 가문을 비롯한 여러 귀족이 브르타뉴 공작의 독단적인 행위에 분개해 반란을 일으킬 조짐이 보이자, 장 5세는 모든 브르타뉴 귀족에게 새로운 충성 맹세를 요구하면서, 이를 거부한 가문을 즉각 토벌하려 했다. 이에 프랑스 무관장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개입해 중재했고, 브르타뉴 공작과 라발 백작은 곧 화해했다.

1439년, 기 14세는 그하블린느에서 프랑스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간의 평화 협약 협상에 참여했다. 1446년 앙주의 르네가 소뮈르에서 개최한 토너먼트에 참석했다. 1449년 동생 앙드레와 함께 노르망디로 출진해 생자크드뵈브롱, 모르탱, 쿠탕스, 생로, 카랑탕, 발로뉴 등지를 공략했으며, 뒤이어 캉, 팔레즈 공략에 기여했으며, 노르망디의 잉글랜드 최후의 거점인 셰르부르 공방전에 참여해 공략에 성공했다.

1444년경, 기 14세의 장남인 프랑수아 드 라발몽포르는 보마누아르 영주이자 브르타뉴 공작 궁정의 시종장이었던 자크 드 디낭의 외동녀인 프랑수아즈 드 디낭과 약혼했다. 그런데 프랑수아즈는 브르타뉴 공작 장 5세의 아들인 질 드 브르타뉴에게 납치되었고, 곧 질과 결혼했다. 하지만 질은 1450년 브르타뉴를 잉글랜드에게 넘기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모함을 받고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1세의 명령으로 체포된 뒤 감옥에서 살해되었다. 이때 남편과 함께 투옥되었던 프랑수아즈는 프랑수아 드 라발몽포르와 약혼을 갱신하고 싶다는 의사를 서면으로 전달했지만 무시되었다.

브르타뉴 공작 피에르 2세의 아내 프랑수아즈 당부아즈는 질 드 브르타뉴를 모함해 죽음에 이르게 한 아르튀르 드 몽토방이 자신의 친족인 프랑수아즈 드 디낭을 손아귀에 넣을까 두려워했다. 그녀는 차라리 당시 아내 마르그리트가 사망한 후 홀아비였던 37세의 기 14세에게 프랑수아즈 드 디낭을 맡기는 게 낫겠다고 판단하고, 남편을 설득했다. 이후의 협상 끝에, 기 14세는 장남과 프랑수아즈 드 디낭의 약혼 때 약속되었던 20,000 크라운을 받지 않는 대신 프랑수아즈 드 디낭의 영지인 샤토브리앙, 몽타필랑, 보마누아르 남작령을 받아냈다. 다만 아들의 약혼녀였던 프랑수아즈를 자기 아내로 삼으려면 교황의 허가가 필요했기에, 기 14세는 장남 프랑수아와 함께 약혼한 부부의 부모 사이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결혼이 처리되었다는 내용의 서신을 교황처에 보냈고, 교황청은 1450년 12월 17일 반 주교에게 기 14세와 프랑수아즈의 결혼을 특별히 허가한다는 교령을 전달했다.

1451년, 기 14세는 반에서 지지자들을 모아놓고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 로앙 자작 알랭 9세 드 로앙이 브르타뉴 총독을 맡는 건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알랭 9세는 자신은 레옹 공자로서의 자격으로 브르타뉴 총독을 맡고 있는 거라며 반박했다. 두 영주는 논쟁을 벌인 끝에, 브르타뉴 공작 피에르 2세의 판결을 받기로 했다. 피에르 2세는 두 사람이 제공한 서류를 검토한 뒤 다음과 같이 합의했다.
1. 브르타뉴 의회에서 첫날 공작 자리의 왼쪽 첫번째 자리는 로앙 자작에게 속하고, 둘째 날에는 라발 백작이 그 자리를 맡는다.
2. 두 사람은 이후로 모든 회의에서 번갈아가며 왼쪽 첫번째 자리를 차지할 것이며, 회의에 참석하지 못할 경우엔 대리자가 그 자리를 맡는다.
3. 두 사람의 후계자들도 이와 같이 자리를 번갈아가며 앉는다.

이후 양자는 이 합의에 따라 공작 근처 왼쪽 자리를 번갈아가며 앉았지만, 1460년 신임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는 알랭 9세의 요청에 따라 그해 5월 29일 브르타뉴 의회에 참석해 라발 백작의 총독 직위 요구가 무효라는 걸 입증할 자료를 제시하는 걸 허용했다. 이에 반발한 기 14세는 파리 의회에 항소했지만, 파리 의회는 1471년에 브르타뉴 공작의 결정을 최종적으로 승인했다. 이후 양자는 자신이 브르타뉴 총독이 되는 것을 입증하고 상대방의 권리는 무효라는 걸 입증할 자료 수집에 몰두했다. 1476년 르동에서 브르타뉴 의회가 개최되었을 때, 두 사람은 자신의 권익을 옹호하고 상대방의 권리를 무효로 간주하는 내용의 방대한 서류를 제출했다. 하지만 르동 의회는 이에 대해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않고 해산되었다. 2년 후인 1479년에 반에서 다시 이 문제가 논의되어 수많은 서류와 증인이 제시되었지만, 이번에도 뚜렷한 판결은 내려지지 않았다. 이후에 아무런 기록이 없는 걸 볼 때, 양자 모두 소득없는 싸움에 지쳐 더 이상 이 문제를 놓고 대립하지 않기로 합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1465년 프랑스의 대귀족들이 왕권 강화 정책을 밀어붙이던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에 반기를 일으켜 공익 연맹을 결성했다. 이때 동생 앙드레는 루이 11세에 의해 프랑스 원수 직에서 해임된 것에 반감을 품고 공익 연맹에 가담했지만, 기 14세는 중립을 선택했다. 1472년,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이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에게 프랑스 왕국을 공동으로 공격하자고 제안했다. 프랑수아 2세는 이 계획을 긍정적으로 검토했지만, 음모를 눈치챈 루이 1세가 강력한 군대를 일으켜 브르타뉴를 침공했다. 그는 브르타뉴 공작과 루이 11세 중 어느 쪽 편도 들지 않고 양쪽 사이를 돌며 중재했고, 브르타뉴군의 저항에 고전하던 루이 11세는 1472년 10월 15일에 그의 설득에 따라 브르타뉴 공작과 평화 협약을 맺었다.

1482년, 루이 11세는 라발 백작령을 메인 백작령과 분리시키고, 라발 백작이 프랑스 국왕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을 진다는 법령을 선포했다. 이후 기 14세는 말년에 마비 증세를 앓으면서 샤토브리앙 성에서 요양하다가 1486년 9월 2일에 샤토브리앙 성에서 사망했다. 사후 라발에 있는 생투겔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의 미망인인 프랑수아즈 드 디낭은 얼마 후 기사 장 드 프로시와 비밀리에 재혼했다.

3. 가족



[1] 1405 ~ 1468, 부르봉-방돔 공작 루이 1세 드 부르봉-방돔의 부인[2] 1412 ~ 1450, 브로세 자작 기 3세 드 쇼비니의 부인[3] 훗날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1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