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5-30 14:33:15

키비노 마키비

기비노 마키비에서 넘어옴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AF001F, #BD0029 20%, #BD0029 80%, #AF001F); color: #DCA600"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 50%"
{{{#!folding [ 좌대신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남조 좌대신
무가관위 좌대신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width: 50px; padding: 0"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 50%"
{{{#!folding [ 우대신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남조 우대신
무가관위 우대신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width: 50px; padding: 0"
}}}}}}}}}}}}}}}



吉備真備
(693 ~ 775년 10월 2일)

나라 시대의 관료.

1. 개요2. 생애

1. 개요

시모즈미치노 쿠니카츠의 아들. 본래 성씨는 시모즈미치노(下道).

중앙 귀족도 아닌 일개 지방 호족이자 학자로써 입신하여 대신의 지위에 오른 고대 일본 사회에서 상당히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근세 이전의 일본 역사에서 센고쿠 시대를 제외하고, 한미한 집안의 학자 출신이 이 정도로 출세한 것은 기비노 마키비와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밖에 없었다.

2. 생애

716년에 견당사의 유학생으로 당나라에 갔고 18년간 당나라에 있으면서 경서, 사서, 천문학, 음악, 병학 등 다양한 분야를 습득했으며, 735년 4월 26일에 귀국해 종8위하의 벼슬에서 정6위에 오르고 대학조에 임명되었으며, 당례 130권, 역서, 음악서, 무기, 악기, 측량구 등 여러 물건을 바쳤다.

고켄 천황의 스승이 되어 예기, 한서 등을 강의했으며, 736년 1월 21일에 정6위하에서 외종5위하로 승진했고 737년 2월 14일에 종5위하가 되었으며, 12월 27일에 종5위상이 되었다. 이후 우위사독이 되었고 740년에 후지와라노 히로츠구가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 마키비와 함께 겐보를 해임하라고 요구했다.

히로츠구의 난이 진압되자 11월 21일에 정5위하가 되었고 741년 4월 22일에 카와치국과 셋츠국이 하천의 제방을 두고 다투는 장소를 조사하는 일원 중 한 명이 되어 파견되었다. 743년 5월 5일에 종4위하가 되었고 6월 30일에 춘궁대부에 임명되고 이전에 하던 동궁학사는 그대로 하게 되었으며, 746년 10월 19일에 키비노 아손(吉備朝臣)이라는 가바네를 하사받았다.

747년 4월 22일에 츠카사(山作司)에 임명되었고 749년 7월 2일에는 종4위상이 되었으며, 750년 1월 10일에는 좌천되어 치쿠젠노카미(筑前守)가 되었다. 751년 11월 7일에 입당부사가 되어 당나라에 파견되었고 754년 1월에 귀국해 4월 5일에 다자이노다이니(大宰大弐)에 임명되었으며, 4월 7일에 정4위하가 되었고 756년 6월 22일에는 이토성의 축조 담당자가 되어 성을 쌓기 시작했다.

761년 11월 7일에 서해도사가 되었고 성의 공사가 거의 끝나가면서 764년 1월 21일에 죠도다이지시(造東大寺)의 장관이 되었으며,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난이 일어났고 마키비는 나카마로가 도주할 것이라고 생각해 병력을 나누어 퇴로를 차단하도록 했고 열흘도 안되어 평정되자 이 공으로 9월 11일에 정3위가 되었다.

765년 9월 24일에 쇼죠쿠지(装束司)의 장관이 되었고 766년 1월 8일에 참의에서 중납언에 올랐으며, 3월 12일에 대납언이 되었다. 5월 4일에는 상주해 헤이조쿄의 남면 쪽에 있는 임생문 안쪽에 다른 문에 2개의 기둥을 설치하도록 해서 기둥 하나는 관사로부터 압박받는 자가 호소하게 하며, 기둥 하나는 백성 중 억울함이 있는 자가 호소하도록 해서 탄정대에 호소를 받아 처리하도록 했다. 10월 20일에 종2위, 우대신, 중위대장 훈2등이 되었다.

769년 2월 24일에 정2위가 되었고 770년 9월 7일에 사직을 청했지만 10월 8일에 우대신의 직위는 유지하고 중위대장의 직위만 해제되었으며, 771년 3월에 물러났고 775년 10월 2일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