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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15 18:59:25

기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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奇浩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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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36년
사망 2024년 6월 2일 (향년 88세)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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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당(裕堂)[1]
학력
약력 한국서가협회 초대작가
대한민국서예전람회 심사위원
동양미술대전 심사위원
전국무등미술대전 서예부문 심사위원장
광주시미술대전 서예부문 심사위원장
가족 2남 2녀 기숙경·기성간·기국간·기현선

1. 개요2. 생애3. 사망

1. 개요

대한민국의 서예가.

2. 생애

그는 1970년대 서예를 시작했다. 유교와 서예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에 자연스레 서예를 접하게 되었고, 필법을 배우고자 서울의 여초 김응현 서예가에게 찾아가 기초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서예가로서 활동하면서 1990년도부터 서예 강의도 시작하였고 2020년대까지 광주 향교에서 서예 강의를 하였다. 그는 서예원에서 보다는 광주 향교에서 정년퇴직자들을 대상으로 1990년부터 가르치길 주로 했다. 실제 그는 서원의 본래기능인 교육기능을 회복하고 기정진의 사상을 꾸준히 연구하고 이어가고자 하였고 2018년부터 ‘노사정신과 유학의 이해’라는 주제로 고산서원 유교아카데미 강좌를 진행했다. 물론 그 외에도 국악이나 가족문제, 현대 미술 등 다양한 강의 역시 준비하였고 각 분야의 학교 교수진과 전문가들이 강의를 진행하도록 마련하였다. 2019년에는 금석문을 모두 모아서 책을 출판할 계획을 세웠다. 동시에 1975년부터 고산서원[2] 별유사로서의 업무를 시작했다. 사실 그는 어린 시절 굉장한 개구쟁이었으나 노사의 6대 종손으로서 집안 어른들에게서 우리 선조들이 민족 국가를 위해 살아오신 삶을 배우며 자부심을 갖게 되었고, 선조들의 정신을 이어가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 생각하였기에 종조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별유사로서 근무를 하기 시작했다. 30대에 시작했기에 빠르다는 이야기를 듣지만 오히려 좀 더 빨리 시작했더라면 더욱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이 컸다고 한다. 또 그는 후손들이 노사의 사상과 학문연구를 꾸준히 이어가기를 바랐다. 그는 서원을 돌보며 13번의 제사를 모두 지냈지만, 시대가 변한만큼 후대에게 그러한 형식을 모두 철저히 지키라고는 강요하지 못하겠다고 밝혔다. 그것은 그들에게 맡겨야한다고. 다만 형식을 간소화 하더라도 선조의 사상과 학문연구만큼은 꾸준히 이어가기를 원했고고 언론에서도 역사 속에 묻혀있는 선조들을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 일깨워주기를 바랐다.

3. 사망

2024년 6월 2일 사망했다.

[1] 송사 기우만, 노사 기정진, 도남 기노선 등 선조가 넉넉하다는 의미로 유림들이 붙여주었다고 한다.[2] 고산서원은 조선후기 성리학을 집대성한 노사 기정진 선생과 제자 6명의 위패가 모셔진 곳이다. 서원의 강당으로 쓰이고 있는 담대헌은 1878년에 노사선생이 토담으로 건립하여 제자들을 강학하던 곳이다. 담대헌의 마루에 올라 앉아 있노라면 노사의 부모님의 묘소가 있는 무등산 자락의 장망봉이 희미하게 보이는데, 효심이 지극했던 노사가 노년에 성묘하기가 어려워 불효하는 자신을 책하던 무렵, 그곳으로 이사와 부모님 묘소를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어 ‘담대헌’이라는 이름을 걸었다고 한다. 노사가 생을 마감한 곳도 바로 담대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