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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1 01:33:43

김동택(1885)

<colbgcolor=#0047a0> 출생 1885년 9월 9일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원황동
사망 1957년 4월 30일
경상북도 영덕군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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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김동택은 1885년 9월 9일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원황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18일 영해읍 장날을 이용하여 영덕군 지품면 낙평동 교회 조사(助事) 김세영(金世榮)과 구세군 참위(參尉) 권태원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했다.

그는 3월 18일 오후 1시경 3천여명의 군중과 함께 성내동 장터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행진을 한 후, 경찰주재소로 달려가서 일본 경찰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라고 위협하여 그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게 하였으며, 다시 장터로 돌아가서 만세시위를 계속하고,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갔을 때, 주임순사 스즈키 츠루지로(鈴木鶴次郞)이 거만한 태도로 해산을 명령하며 태극기를 뺏으려 하였다.

이에 그는 분노한 시위군중과 함께 곤봉과 돌멩이로 주재소를 때려부수고 순사부장을 넘어뜨린 후, 2명의 일본 순사의 모자와 칼을 빼앗았다. 그후 공립보통학교로 시위행진하여 평소 일제의 정책을 찬양하던 이곳 교사들을 규탄하고 일본인 소학교·우편소·면사무소로 시위행진하며 건물을 파괴한 후 다시 주재소로 몰려가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찬송가를 부르며 만세시위를 계속하고, 주재소 안에 걸려 있던 경찰복을 모두 찢어버리고, 장총 4정과 87발의 실탄을 탈취 파기하였다.

이날 오후 2시경 정규하 등 2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병곡면 병곡동으로 시위행진하였는데, 연도의 군중이 가세하여 시위군중은 5백여명으로 늘어났다. 주재소로를 향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는데 영해주재소로부터 연락을 받은 병곡주재소에서는 인근 평해의 일본 헌병분견소에 응원을 요청하고 삼엄한 경계를 하고 있었다.

그가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 앞에 다다랐을 때 일본 경찰이 시위를 제지하려하자, 투석으로 대항하며 곤봉과 낫 등을 들고 주재소 안으로 들어가 건물과 기물을 파기한 후 면사무소로 가서 그곳 건물도 완전히 파괴하였다. 그러나 평해에서 증원되어 온 3명의 일본 헌병과 주재소 순사가 합세하여 총을 겨누며 위협하자 정규하의 만류로 오후 6시경 자진 해산하였다.

그후 일제의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어 그도 결국 체포되었으며, 1919년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고#, 1919년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공소 기각처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영덕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57년 4월 3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김동택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