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8-21 09:16:40

김명봉

<colbgcolor=#0047a0> 출생 1893년
평안북도 운산군[1]
사망 1924년 7월 2일 (향년 30~31세)
랴오닝성 선양시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직업 독립운동가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의병, 대한독립단, 대한통의부, 참의부 등에서 활동하며 무장투쟁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1924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

김명봉은 1893년에 평안북도 운산군 또는 황해도, 경상도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져있다. 김명봉은 1907년 노희태와 함께 영흥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동하였다. 노희태가 이끌던 의병진이 일본군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패배한 후에도 그는 다시 의병을 조직하는 등 의병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그 후 17세가 되던 해에 황해도 의병장 이진룡·조맹선 등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이어나갔다. 3.1 운동 이후에는 대한독립단에 참여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이어나갔다.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

1920년 김명봉은 대한독립단원으로서 문창현, 김용보, 나정구, 전일록, 권덕근, 조대능 등과 함께 해룡, 통화, 흥경, 무순 등에서 일제의 지시를 받고 정보활동을 벌이고 조선인 사회를 통제하고 있던 친일단체인 보민회를 척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를 통해 수개월 내에 독립단의 기반을 공고히 하는 데 매우 큰 공헌을 하였다. 그 후 1922년 8월에 남만한족통일회가 이에 따라서 대한통의부가 조직되었으며 이에 김명봉은 대한통의부의 일원으로 참여하게 되었다.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

한편 1923년 대한통의부와 대립을 하고 있던 통의부 내의 전덕원 등이 중심이 되어 환인현 대황구에서 의군부가 조직되었다. 이에 김명봉은 당시 갈등 속에서 중립을 유지하였고 통의부 제5중대장으로 활동하였다. 이 때 당시 김명봉은 흥경현에 본부를 두고 활동하였으며 자신의 예하에는 비서 조태빈, 서기 오두영, 제1소대장 김창천, 제2소대장 김광추, 제3소대장 김 일, 예비소대장 김구 등이 있었다. 그는 무장군인은 120명을 지휘하고 있었으며 그가 이끌던 부대의 관할 구역은 무순, 본계, 흥경, 개원, 봉천, 동풍, 길림, 장춘 등지였다. 1923년 김명봉은 참의부의 설립에 참여하였으며, 부하에게 선양시에서 활동하고 있던 보민회 회장 대리인 최정규를 처단하라고 지시하였다. 그 후 김명봉은 권력투쟁의 과정에서 1924년 7월 2일 통의부의 습격을 받고 가족과 함께 피살되어 순국하였다.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

대한민국 정부는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 어떤 기록에서는 황해도 또는 경상도 사람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