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47a0> 출생 | 1913년 3월 1일 |
충청남도 부여군 | |
사망 | 1950년 7월 20일 (향년 37세) |
충청남도 | |
직업 | 독립운동가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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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2. 생애
그는 1932년 3월 공주사립영명학교를 졸업하고 4월 서울 법정학교에 입학했다. 이 시기에 그는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1933년 8월 비밀결사 독서회를 조직해 활동하는 한편 9월 국제공산당 관련 활동을 했다.1934년 9월부터 이재유를 중심으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이 일어났다. 서울지역 내 학교와 공장, 인천지역 공장 등지에서 ‘적화공작’이 이루어질 때 박영출, 심계월 등과 같이 활동했다. 같은 해 10월부터 이들은 장충단공원에서 여러 차례 모여 공산주의 운동의 파벌투쟁과 지식계급의 실천 투쟁에 관해 의견을 나눴다. 이 결과 적색노동조합을 조직해 투쟁을 실천하기로 했다. 또한 그는 인천에 있는 공장을 중심으로 공산주의 운동을 하던 이인행을 집에 머무르게 해 일본 경찰의 체포를 피하도록 했다.
이후 그는 11월 하순까지 심계월의 요청으로 이재유와 함께 공산주의에 대해 연구를 했다. 그리고 이에 기반한 실천운동을 기획했던 유순희의 은신을 도왔다. 심계월, 유순희와 가족으로 위장해 40일 동안 생활하면서 공산주의 관련 서적을 탐독하고 연구했다. 또한 공산주의 운동의 통일방법 등에 대해 토론했다. 한편 경성제국대학 미야케 시카노스케 교수가 체포된 후 “혁명운동 달성을 위해서는 희생자 및 그 가족을 구원할 필요있다”며 미야케 교수의 아내의 고서점인 가메야의 개업을 도왔다. 1935년 1월말부터 5월 중순에는 일경으로부터 도피할 당시 미야케 아내에게 2회에 걸쳐 도피자금을 조달받기도 했다.
그는 국제공산당 사건으로 인해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리고 이른바 신의주형무소에 수감돼 있다가 1934년 1월 26일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이후 적색노동조합 조직 투쟁의 일환인 용산적색노동조합 사건으로 체포됐다. 1936년 7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범인 은닉’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38년 3월 2일 출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