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북한의 정치인.2. 생애
1933년 3월, 강원도 안변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6.25 전쟁 전사자 집안으로 출신성분이 좋아 김일성대학 철학부를 졸업했다고 한다. 선전선동부 지도원으로 일하면서 김정일의 측근이 되었고, 선전선동부 이론선전부문 과장을 거쳐 선전선동부 부부장으로 승진하였다.1984년 12월, 6기 10중전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보선되었다. 1986년 11월,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2월 27일, 6기 12중전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하였다. 1987년 4월, 김일성 75세 생일 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87년 12월, 사회과학자협회 제1부위원장 재임이 확인되었으며, 1988년 4월, 주체과학연구원장을 지내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1990년 4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며, 5월 26일, 최고인민회의 9기 1차 회의에서 외교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91년 5월, 허담 장의위원, 1992년 7월, 홍기문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1년 10월, 북한 학자로는 처음으로 시튼 홀 대학 아시아 센터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하여 시튼 홀 대학에서 미국 학생 및 학자들과 좌담을 나누었다. 1992년 4월, 김일성 팔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음으로 이중수훈자가 되었다.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을 지냈는데 이때 서열을 보면 당중앙위원회 부부장으로 재임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가 1995년 5월, 국제부장으로 이임한 현준극의 후임으로 로동신문 책임주필 겸 기자동맹 중앙위원장에 임명된 것이 확인되었다. 1995년 8월에는 조선공보위원회 위원장 겸임도 확인되었다. 하지만 1997년 12월, 로동신문 책임주필 및 조선사회과학자협회 제1부위원장에서 해임되었다. 1998년 5월에는 조선기자동맹 중앙위원장 해임 역시 확인되었다. 당연히 1998년 7월,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서도 탈락하였다. 이후 제1부주필이던 최칠남이 1999년에 책임주필로 승진하였다.
3. 참고문헌
- 통일부 정보분석국, 북한의 주요 인물 자료집 2000(서울: 통일부,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