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나만성(羅萬成) |
생몰 | 1896년 3월 19일 ~ 1936년 6월 6일 |
출생지 | 전라남도 무안군 지도면 촌정리 |
사망지 | 전라남도 목포시 |
추서 | 건국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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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3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나만성은 1896년 3월 19일 전라남도 무안군 지도면 촌정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8년 무안군 지도면에 청년회관을 건립하고 양명여학교(陽明女學校)를 설립하여 청년층에 대한 민족의식 고취와 여성교육에 힘썼다. 1922년 12월 서울에서 자작회가 조직되어 조선 물산을 장려하자, 그는 1923년 2월 전라남도 무안자작회를 결성하고 회장으로 선임되어 소비조합부를 설치했다.1924년 봄, 향리에서 소작인 공조회를 조직해 지주의 횡포에 대항하면서 소작인의 지위 향상을 위해 노력했지만 1925년 2월 27일 일본 경찰에게 다른 간부 6명과 함께 체포되어 같은 해 7월 3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인 1926년 10월에는 무목(務木: 무안, 목포)청년연맹 대의원으로 활동하다가 목포경찰서에 체포되어 다시 고초를 겪기도 했으며, 1927년 6월 신간회 목포지회가 설립되자 이에 가담해 그해 12월 제1회 정기대회에서 서병인, 김명진 등 10여 명과 함께 간사로 선임되었다.
이후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1932년 1월부터 1933년 6월까지 활동했고, 이어 1934년 4월에 창간된 종합잡지 <호남평론>의 편집자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1936년 6월 6일 목포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나만성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