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원된 성벽과 장성 지도 |
1. 개요
苗疆邊牆 / 苗疆长城 / 南方长城영어 Miaojiang / Southern Great Wall
중국 후난성 샹시 투자족 먀오족 자치주의 장성 유적. 17세기 명청대에 묘족을 대상으로 세워진 150km 가량의 장성으로, 묘강변성 혹은 묘강장성으로도 불린다. 다만 통상적으로 북방의 만리장성과 비교하여 남방장성으로 알려져 있다.
2. 구조
남방장성은 샹시 투자족 먀오족 자치주를 남북으로 가르는 형태로, 지서우시 시췌잉 (喜鹊营)에서 시작해 남쪽의 펑황현 팅즈관 (亭子关)까지 150 ~ 190km 가량 이어진다. 약 120m 간격으로 세워진 1300여개의 초소에 각각 5명 정도씩 5천 ~ 7천여 병력이 배치되었고 요새와 관문도 있었다. 성벽은 높이 3m, 하단폭 2m에 상단폭 1m 규모이고 성돌 역시 만리장성 1/6 수준으로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였다. 주로 험준한 산세를 따라 축성되었기에 얼핏 보면 일반 산성처럼 보인다.
3. 역사
명나라 후기인 1615 ~ 1622년에 세워졌고, 1640년대 명나라의 혼란을 틈타 묘족들이 봉기하여 장성을 허물었다. 이후 청나라 시기인 1662년까지 재건되었고, 18세기 중반에도 보수되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방치되었고, 주민들이 건축 자재용 채석장으로 활용하는 바람에 80년대까지 대부분 파괴되었다.
4. 복원과 홍보
2000년, 펑황현의 국가역사문화명성 지정을 위한 조사 중에 발견된 유구가 그동안 기록상으로만 확인되고 위치를 비정하지 못했던 남방장성으로 밝혀진 이래로 복원이 이루어졌다. 2001년 중반까지 펑황현 서쪽의 약 2km 가량이 복원, 정리되었다. 2003년에는 인근에 세계 최대 규모의 바둑판을 만들고 봉황고성배 한중 바둑전을 개최하고 있다.
5. 기능
남방장성은 북방의 만리장성처럼 이민족의 침공을 막는 기능도 있었지만, 묘족 중에서 조정에 복속하지 않은 생묘족을 격리하는 게 주 목적이었다. 그래서 묘족들에게 있어 장성은 한인과의 소통과 교역 등을 막는 장애물이었지만, 장성이 존재하던 시기에도 한 - 묘 교류는 계속되어 장성의 핵심인 봉황성은 한인과 묘인의 문화가 만나는 교차로 역할을 했다. 명 · 청 교체기의 혼란으로 장성이 완전히 허물어진 뒤부터 한인과 묘인 간의 교류는 확대되고 묘강장성을 쌓은 명 왕조의 뒤를 이은 청 왕조가 유화책으로 전환해 평화가 찾아오는 듯 했지만, 가경 시기에 한인 관료들의 부정부패와 폭정에 분노한 묘인들이 봉기를 일으키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묘인들의 봉기를 잔혹하게 진압한 청 조정은 반란 재발을 막고 묘인들의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묘강장성을 재건하지만, 그러면서도 묘인들을 회유하기 위해 상호 교류를 막지 않았다. 또한 청대의 장성은 군사적인 역할만 수행하던 명대의 것과 달리 행정적인 역할도 맡았고 파견된 관료들이 지역 재건과 개간 등 경제 성장과 민심 회복에 주력해 성과를 내었다. 그 덕에 가경 시기 이후, 상서(湘西) 지역은 새로운 작물과 기술이 유입되는 등 과거보다 문화 교류가 더욱 촉진되었다. 따라서 남방장성은 소수민족에 대한 통제와 문화 교류를 상징하는 이중적인 존재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