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남중군(南仲軍) |
이명 | 남상목(南相穆), 최삼일(崔森一), 박삼일(朴森一) |
생몰 | 1908년 1월 18일 ~ ? |
출생지 | 함경남도 덕원부 남산면 |
사망지 | 미상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남중군은 1908년 1월 18일 함경남도 덕원(원산) 남산면에서 태어났다. 그는 원산에서 점원으로 일하다가 1930년 1월 일본 도쿄로 건너가 일본대학에 재학했다. 이 시기 목포 출신의 설상렬(薛相烈) 등과 교류하면서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도쿄, 고베 등지에서 사회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일본대학을 중퇴한 그는 1932년 3월 귀국한 뒤 원산에서 범태평양노동조합(凡太平洋勞動組合) 간부 박세영(朴世榮)의 조직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5월에 함흥경찰서에 체포되었다가 1933년 7월에 석방되었는데, 그 사이에 유치장 내에서 주인규(朱仁奎) 등으로부터 프로핀테른의 <9월 테제>와 범태평양노동조합의 <10월 서신>의 내용을 전해들었다.1933년 9월, 남중군은 운수노동자 중심의 합법단체인 원산노동연합회(元山勞動聯合會)와 함남노동회(咸南勞動會)에 들어갔다. 이후 반(班)이나 분회(分會) 등 혁명적 노동조합의 비합법 하부조직을 결성하는 일의 책임을 맡아 최동선(崔東宣) 등과 함께 활동했다. 우선 최동선의 주선으로 채희룡(蔡熙龍)을 만나 기관지 <노동자의 깃발>의 출판을 추진했다. <노동자의 깃발> 창간호에서는 취지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지금 일본제국주의는 우리 노동자 농민을 착취하여 우리 조직을 파괴하고 있다. 우리는 이 공격을 방어해야 하므로 강고한 조직을 필요로 한다. 이에 우리는 태로(太勞) 10월 서신 및 9월 테제의 지침에 기초하여 과거 오류를 청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략) 그 선두에 용감하게 서서 조선노동조합운동 좌익의 지도 아래 우리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그 임무라는 것은 아직 조직되지 않은 대중을 조직화할 것, 공장과 직장에서 우리 기초를 설치하여 반동조합, 개량주의적 조합 내에 반대파를 결성하여 아래로부터 통일전선을 도모함으로서 대중적으로 조직해야 한다. 우리는 이 임무를 수행하기로 노동자 제군에게 약속하고 제군의 선두에 서서 적의 공격을 물리칠 것을 선언한다.
남중군은 1934년 11월까지 최동선, 채희룡과 만나 <노동자의 깃발> 십수호를 출판해 원산 등지에 배포했다. 또한 5월 1일 메이데이 투쟁을 계획했다. 메이데이 투쟁의 기본 방침은 ‘1일 9시간 노동제 실시, 자본가의 하인 관료 함남노동회를 파괴하자, 일본제국주의를 탈출하여 조선의 완전한 독립, 강도(强盜) 일본제국주의 타도, 제국주의 전쟁과 소련 공격 전쟁 절대 반대’ 등이었다. 한편 원산 내 각 공장에서 동지를 규합하고 혁명적 노동조합의 하부조직을 결성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무라제재공장(大村製材工場)·북선(北鮮)고무공장 등에서 여성 노동자들을 조직화하는 데 주력했다. 또한 원산 시내의 실업자·노동자·일반사용인 등을 포함한 가두반(街頭班)을 조직했다.
그러다 경찰의 추적을 의식한 그는 함흥, 흥남 일대로 피신했고, 1934년 11월 러시아 혁명 긴며일을 맞아 원산과 덕원 등 인근 지역에 격문을 배포하다 11월 3일 밤 원산경찰서에 체포되었다. 그 후 경찰은 일명 "원산적색노동조합 조직운동사건"으로 확대해 50여 명의 노동자들을 검거했다. 그는 오랫동안 취조를 받은 뒤 1936년 4월 30일에 함흥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4년을 언도받고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38년 7월 14일 함흥형무소장의 보고에 따르면, 수용 당시는 신체 건강하고 정신에 이상이 없었는데 수용 후 나빠졌다고 한다. 이로 인해 심신모약자(心神耗弱者)로 지정되어 공주형무소로 집금(集禁)할 필요가 있는 사람으로 분류되었으며, 1939년 9월 6일에 출옥했다. 이후의 행적 및 사망년도, 사망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지만 얼마 안가 사망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7년 남중군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