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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2 11:24:15

낭트 칙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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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세기 종교 개혁 주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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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내용
<colbgcolor=#F8F0C3,#191919> 95개조 반박문 마르틴 루터의 면벌부 판매 비판
사코 디 로마 교황권 위기의 상징
슈말칼덴 전쟁 가톨릭루터파 대립
기독교 강요 장 칼뱅의 이중예정설과 직업소명설 등장
수장령 헨리 8세와 잉글랜드의 교황청으로부터 독립
예수회 이냐시오 데 로욜라의 예수회 창립
트리엔트 공의회 가톨릭 교리 재확인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신성 로마 제국루터파 인정
위그노 전쟁 프랑스 가톨릭과 칼뱅파 간의 종교 전쟁
통일령 엘리자베스 1세잉글랜드 국교회 선포
낭트 칙령 앙리 4세의 칼뱅파 인정
30년 전쟁 친합스부르크 세력과 반합스부르크 세력의 충돌
베스트팔렌 조약 개인의 종교 자유 인정
← 중세 교황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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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폐지

1. 개요

Édit de Nantes

프랑스 왕국 부르봉 왕조의 첫 번째 임금 앙리 4세1598년 4월 13일 선포한 종교의 자유 칙령으로, 프랑스의 구교-신교 내전이었던 위그노 전쟁을 끝내고 국가의 통합을 도모하려는 목적이었다. 낭트 칙령으로 칼뱅주의 개신교인 위그노 세력한테 대략 1세기 동안 광범위한 종교적 자유, 요새 건설, 은행업의 권리가 부여되었다. 하지만, 위그노 세력이 자신들의 이권을 위한 세력확대 과정에서 대규모 반란, 폭동을 여러 번 일으키며 사회를 혼란시키자, 이러한 혼란기에 절대왕권을 꿈꾸던 루이 14세가 1685년 10월 18일에 다시 폐지했다.

2. 상세

1598년 4월 13일 낭트에서 공증된 문서 2건으로 작성, 반포되었다. 그 내용은 개신교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으로, 파리를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 개신교도가 모여 집회를 할 수 있고, 개신교도를 보호하기 위해 라 로셸에 병력을 주둔시키며, 그 비용을 국왕이 지불하고 위그노(프랑스의 칼뱅파)에게 위급한 상황 발생에 대비해 요새 150개를 건설할 수 있도록 하는 등이었다.

이로 인해 프랑수아 1세가 제정했던 가톨릭 이외의 신앙을 가진 자는 엄벌에 처하며 이를 밀고한 자에게는 몰수한 재산의 4분의 1을 수여하는 개신교 탄압법은 폐지되었다.

3. 폐지

약 1세기 후인 1685년 10월 18일에 루이 14세절대왕정에 관해 교황에게 지지를 얻기 위하여 폐지하였다. 이는 며칠 후인 10월 22일 퐁텐블로 칙령으로 구체화되었다. 하지만 앞선 루이 13세 시절부터, 위그노들은 기존의 사회중심인 가톨릭 질서에 도전하고 자신들의 이권을 위한 수차례 반란, 적지 않은 규모의 폭동을 부채질하는 등, 각종 사회불화를 일으키는 사건으로 이미 자신들의 여러 요새를 무기화했다가 파괴당하고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진 이유는 위그노의 신변 보장을 위해 독자적인 은행업, 무기소유권, 요새건설 권리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프랑스의 각종 불순분자나 반란세력들은 상당한 거물급 반역자부터 어중이떠중이들까지 세력 확장이라는 공통의 목적을 지닌 위그노들에게 의탁하여 그들의 무기와 자산을 받고 위그노의 요새와 함선에 숨어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이 불순분자들이 작위 및 재산 계승 과정에서 프랑스 가톨릭 보수파들한테서 힘을 빌리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1685년부터 1698년까지 위그노 20~30만 명이 네덜란드,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잉글랜드 왕국, 북아메리카 식민지 등으로 이주하였다. 특히 많은 수학자, 과학자[1], 상공업자들이 이주한 것은 한동안 프랑스 사회에 악영향을 미쳤다. 특히, 스위스의 시계산업은 이때 생겼다. 물론, 과학이나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가톨릭을 신봉하는 과학자들도 많았고 프랑스 역시 영국이나 네덜란드 등지에서 쫓겨나는 가톨릭 상공업자들을 열심히 받아들였기 때문에 프랑스의 일방적인 손해는 아니었다.[2]

어째서 이렇게까지 사태가 악화되었는지, 가톨릭과의 악연뿐만 아니라 본래의 가르침과는 달리 자신들의 이권을 챙기기 시작한 위그노들이 프랑스 사회에서 일으킨 불화와 반란에 관해서는 위그노 항목 참조.

프랑스에 남은 위그노들은 가톨릭으로 개종하거나 지하교회로 숨어들었다. 이후 프랑스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인정받는 것은 또다시 1세기 후인 루이 16세 치세인 1787년의 일이다.
[1] 수학자이자 천문학자로 유명한 크리스티안 하위헌스위그노 이주민 출신이며, 현재 스위스 시계 산업의 중심지가 제네바, 뇌샤텔스위스 서부의 프랑스어권 지역인 것도 이 사건의 여파다. 당대 최고의 기술을 가지고 있던 위그노 시계공들이 같은 프랑스어를 쓰는 데다 지배자 역시 개신교도인 이 지역으로 집단으로 이주했기 때문. 프랑스 입장에서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산업 단위로 놓친 셈. 훗날 프랑스 궁정에서 활동한 피에르 자케 드로, 브레게 같은 시계 장인들도 프랑스어를 쓰는 스위스 사람이었다.[2] 과학이나 기술 발전은 돈이 많이 필요하기에, 당시는 가톨릭 수도회나 성당에서 과학 발전을 주도하는 시대였다. 프랑스의 과학은 이후에도 계속 발전했으며 이 사건으로 잃은 것은 시계산업 정도. 물론 당시의 시계 산업은 현재의 3D 프린터 급으로 최신기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