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녜수빈 사건은 중화인민공화국에서 1995년에 녜수빈(聂树斌, 1974~1995)이라는 사람이 강간살인 혐의로 사형을 당한 뒤, 후에 누명이라는 것이 밝혀져 20여년만에 재조사 끝에 무죄 판결을 받은 사건을 말한다.2. 배경 및 사건
녜수빈의 사진 |
사건의 피해자인 녜수빈은 1974년 중화인민공화국 허베이성 스자좡시의 어느 시골에서 태어났다. 녜수빈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평범하게 기계공장에서 일하는 순박한 소년이었다.
1994년 경 녜수빈이 살던 마을의 옥수수밭에서 어느 여성이 살해당한 채로 발견되었다. 조사 결과 시신은 강주화(康菊花)라는 이름의 30대 여성의 것이었으며, 성폭행을 당한 후 살해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런데 스자좡시 공안은 별다른 근거도 없이 해당 옥수수밭 근처를 자주 지나다닌다는 이유만으로 1994년 10월 당시 19살이었던 녜수빈을 붙잡아 기소했고, 5개월 뒤인 1995년 3월 15일에 허베이성 중급인민법원은 녜수빈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녜수빈은 자신은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며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4월 25일 허베이성 최고인민법원은 사형을 확정했고, 결국 사형이 확정된 지 불과 이틀만인[1] 1995년 4월 27일에 총살형으로 사형을 당하고 만다. 다음 날 녜수빈의 아버지가 교도소로 찾아왔지만, 교도관에게 녜수빈이 이미 처형됐다는 통보를 듣고 아버지는 망연자실해했다.
2.1. 진범의 등장, 그리고 정청위에의 고군분투
녜수빈 사건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한 정청위에(郑成月) 공안국장
그로부터 10년 후 2005년 1월 중국 광핑현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의 용의자 왕수진(王书金)이 공안에게 붙잡혔는데, 그가 심문 과정에서 다른 여러 건의 살인을 추가로 저지른 적이 있다고 밝혔고, 그에 따라 당시 왕수진의 살인 사건을 담당하였던 당시 광핑현 공안국장 정청위에(郑成月, 1958~2022)는 그와 관련하여 조사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왕수진이 1994년의 스자좡시 옥수수밭 살인 사건을 자백하였는데, 이는 이 사건의 범인이 녜수빈이라고 기록된 과거 수사 자료와 상충되는 것이었고 따라서 정청위에는 녜수빈의 사형에 석연찮은 점이 있음을 깨달았다.
이에 정청위에는 상급기관에 당시 녜수빈의 진술 자료를 요청하였다. 정청위에는 진술서에 있는 녜수빈의 서명들이 모두 제각각인 것을 보았고, 당연히 의혹은 더욱 깊어졌다. 따라서 정청위에는 해당 사건에 대해 더욱 집중적으로 파헤쳤고, 왕수진의 자백과 증거 등을 토대로 녜수빈이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사형을 당했다고 확신하게 된다.
정청위에는 스자좡시 공안국에 녜수빈 사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서신을 보내며 재수사를 요청했다. 그러나 스자좡시 공안국으로부터 녜수빈 사건은 이미 종결된 사건이라는 원론적인 대답만 돌아왔다. 하지만 정청위에는 계속해서 녜수빈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 때문에 오래 전에 종결된 사건을 다시 들춰서 피로감을 유발하는 정청위에를 탐탁치 않게 여긴 상급기관은 정청위에에게 힘든 업무를 시키는 등 업무상 보복으로 압박을 가했고, 나중에는 아예 왕수진의 기소 혐의에서 녜수빈 사건을 제외한다는 통보를 내리기까지 한다. 이렇듯 녜수빈 사건이 누명으로 세간에 알려지게 된다면 중국 공안들 및 법원 관계자들은 책임을 져야 했기 때문에 상부는 녜수빈 사건의 진실을 은폐하려고 했고, 따라서 정청위에의 이러한 움직임은 어렵고 힘든 길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청위에는 녜수빈의 결백을 알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보낼 수 있는 기관들이란 기관들에 모조리 녜수빈 사건에 대해 알리는 글을 보냈다. 이러한 정청위에의 노력 끝에 결국 2005년 3월 허난상보(河南商報)에 <한 가지 사건 두 명의 범인, 누가 진범인가?>라는 제목으로 녜수빈 사건에 대해 조명하는 기사가 실렸다.[2] 이 기사를 계기로 마침내 녜수빈 사건은 대중에게 관심을 얻게 되었고, 녜수빈 사건을 재조사하라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결국 여론의 압력을 이기지 못 하고 허베이성 정법위는 조사팀을 꾸려 녜수빈 사건 재조사에 들어가겠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때에도 상황이 순탄치는 않아서 녜수빈 사건 재조사가 돌연 중단되어 4년 넘도록 질질 끌리다가 기어코 2009년 상부에서 정청위에에게 일방적으로 퇴직 통보까지 내리고 만다. 이 때문에 정청위에는 끝내 공안복을 벗게 되었지만, 그 후로도 일반인 신분으로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각계 각층의 사람들과 협력하며 녜수빈 사건의 진실을 계속 밝혀내기 위해 노력했다.
2.2. 20년만의 무죄 판결
결국 2014년 12월, 중국 최고인민법원은 녜수빈 사건의 재심을 진행했다. 그후, 산둥성 고등법원은 "녜수빈 사건의 원심 판결에서 말하는 녜수빈의 범행을 뒷받침할 객관적인 증거가 부족하고 다른 사람이 범행을 저질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따라서 녜수빈의 살인 혐의와 강간 혐의는 그 증거가 불확실하고 불충분하다"라며, 녜수빈 사건의 원심 판결을 취소하고 녜수빈에게 무죄를 선고한다고 발표했다.이로써 녜수빈은 결백을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고, 20여년만에 아들이 죄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녜수빈의 부모는 눈물을 쏟아냈다. 이후 2017년 최고인민법원은 녜수빈의 부모에게 270만 위안의 배상금을 지불하라고 추가로 판결하였다.
3. 기타
녜수빈 사건의 진범인 왕수진은 2021년에 사형이 집행되었다.녜수빈 사건은 중국에서 후거지러투(呼格吉勒圖) 사건[3]과 함께 중국 사법 사상 가장 유명한 오심 사형 사건 중 하나로 꼽힌다. 그리고 이 사건은 이후 중국 법원이 사형 판결에 더 심사숙고하게 만드는 데에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될 만큼 파장이 큰 사건이었다.
전술한 녜수빈 사건을 공론화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한 정청위에의 노력도 잊지 말아야 한다. 정청위에의 이러한 노력이 없었다면 녜수빈 사건은 영원히 잊혀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청위에는 인사상 불이익을 당할 각오를 하고 상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한 사람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렇게 해서 결국 녜수빈의 결백을 입증했다. 이는 비단 녜수빈 한 사람뿐만 아니라 중국 사법계에도 전체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공적이다. 안타깝게도 정청위에는 녜수빈 사건으로 고생하면서 지병이었던 간 질환을 키웠고, 그로 인해 2022년 5월 5일 베이징의 병원에서 향년 64세로 생을 마감했다.
[1] 인권 의식이 희박했던 90년대 이전 중국에서는 피고에게 사형 판결이 내려지고 실제 집행되기까지 굉장히 짧은 시간만 주어졌다. 이러한 속전속결 사형집행은 덩샤오핑의 범죄소탕 정책인 엄타(嚴打) 운동의 영향 때문이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시간을 충분히 들여 신중하게 사형을 판결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중국에서는 이런 식으로 판결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형을 당한 사형수들이 많았고, 당연히 그들 중에는 이런 날림 판결로 인해 억울하게 사형을 당한 이들이 녜수빈 말고도 더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2] 당시 허난상보의 편집장이었던 마원룽은 이 사건을 널리 알리기 위해 전국의 다른 매체들에 원고료를 받지 않을 것이니 이 기사를 마음대로 전재하라고 선언하기까지 했다.[3] 녜수빈과 유사하게 후거지러투(몽골어: 호크칠트)라는 내몽골계 사람이 여성을 성폭행하고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1996년 사형당한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