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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2 19:35:40

대불호텔

파일:대불호텔.jpg
1. 개요2. 연혁3. 역사
3.1. 제2의 전성기3.2. 이후 용도변경과 철거3.3. 발굴 및 재현복원3.4. 현재
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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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불호텔 소개 영상

1. 개요

파일:대불호텔_125.jpg
인천광역시 중구 신포로23번길 97에 소재한 대한민국 최초의 호텔.

대불호텔[1]은 인천 일본 조계지에 있던 호텔로, 한국 최초의 호텔 대불호텔은 개항 후, 인천항을 통해 입국한 외국인들이 서울로 가기 전 묵었던 조선 최초의 호텔이다. 현재 위치한 완전한 근대건축물 형태의 대불호텔 전시관은 문화재청과 인천시에서 당시 모습으로 재현한 것이다.[2]
파일:대불호텔 설계도면.png
대불호텔 설계도면. 객실은 11개 뿐인 소형 호텔이었다.[3]

2. 연혁

3. 역사

"1885년 4월 5일 다이부츠(대불호텔의 일본식 발음) 호텔로 향했다. 놀랍게도 호텔에서는 일본어가 아닌 영어로 손님을 편하게 모시고 있었다."
헨리 아펜젤러 (1885년 4월 5일)
"우리는 ‘소위’ 고급이라는 다이부츠(大佛)나 해리스(Harris)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다이부츠의 침대는 평평한 침상에 모포 한 장을 펴 놓은 것에 불과했으며, 천정의 누수를 받기 위한 물동이가 매달려 있었다."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1885년 4월 5일)

1883년 강화도 조약에 따라 세번째로 인천이 개항하게 되자, 1887년경 일본인 해운업자 호리 히사타로(堀久太郎)와 그의 아들 호리 리키타로(掘力太郞)는 대불호텔을 건립 및 경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호텔 영업을 시작한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당시 2층 목조 가옥이었으나, 1887년에 벽돌조의 서양식 3층가옥으로 재건축하여 확장하였다. 그리고 당시 숙박료는 일본식 호텔의 2배 이상이었으며, 당시 한양으로 가기 위해 배에서 인천항으로 내린 서양인들을 상대로 운영했다. 헨리 아펜젤러나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등 선교사들의 회고록에도 대불호텔에서 숙박했던 기록이 남아있다. 이 호텔은 1902년 서울 중구 정동에 들어선 손탁호텔보다 14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이 호텔은 유럽인이나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했기에 서양식으로 설계됐다. 대불호텔은 일본어가 아닌 영어로 손님을 맞았으며 외국인들의 입에 맞는 서양요리도 제공했다고 한다.

한편 당시 대불호텔 건너편에 중국인 이태호(怡泰號)라는 사람이 외국인 상대의 여관업을 시작하였는데 1층에는 잡화상점을 하면서 2층에 스튜워드 호텔(Steward Hotel)을 개업하여 서로 치열한 경쟁을 하였다고 한다. 참고로 커피[4]가 처음 판매된 곳이 대불호텔이라고도 하나 언제부터 판매되었는지 정확한 기록을 찾기 어렵다. 1890년경에는 헝가리인이 운영하는 한국호텔(Hotel de Coree)도 영업하면서 경쟁은 치열해져만 갔다.

1890년경 대불호텔의 객실료는 상등실 2원 50전, 일반실 2원으로 다른 여관에 비해 비쌌다. 당시 한국인 노동자 하루 임금이 23전이었던 사실을 고려해보면 상당히 비싼편에 속했다.
명칭 객실 수 숙박료
서양식 대불호텔 11실 2원 50전 2원 1원 50전
이태호텔 8실 2원
일본식 수월루 11실 1원 75전 50전

1899년 경인선이 개통하면서, 인천항에서 한성으로 가는 시간이 크게 줄어들었다.[5] 한성으로 가는 서양인들이 인천항에 머무를 필요가 없어지면서, 그리고 러일 전쟁으로 서양인들의 왕래가 급격히 줄어버림에 따라, 대불호텔은 경영난으로 쇠락하게 되어 문을 닫게 되었다.[6]

3.1. 제2의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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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루와 인수한 뢰씨 일가와 다른 중국인들
그뒤에 어느정도 방치가 되어 있던 호텔건물은 임대건물로 썼다지만, 당시 인천의 경제 규모가 크기는 커녕 오히려 모자랐기에 3층 높이의 대불호텔 건물은 그렇게 잘 쓰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던 중에 1918년경 뢰씨 일가를 비롯한 중국인들이 대불호텔을 인수하여 일본인과 중국 상인들을 상대로 중화루(中華樓)라는 북경요리 음식점으로 개업한 뒤 인천 3대 요리집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7] 특히 북경요리 전문점이어서 인천의 대표적인 명소가 되었다고 한다.

얼마나 유명했으면 명소까지 되었냐 한다면 당시 인천에는 이미 몇 개의 중국 요리점이 성업 중이었음에도, 중국풍 간판으로 호화롭게 장식하고서 당시 인천에는 어느정도 생소했을법한 3층 높이의 벽돌 건물로 중화루는 개점 하자마자 그 명성이 인천은 물론 경성에까지 알려질 정도면 위상이 얼마나 대단하지 알수 있는 부분이다.
파일:50_중화루.jpg
60년대쯤 중화루
그러나 60년대 이후 청관거리가 쇠퇴 하면서 중화루도 1970년대 초까지 운영되다 경영난으로 폐업하면서 사실상 제2의 전성기도 끝나게 되어 버렸다.[8]

3.2. 이후 용도변경과 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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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세집으로 이용할 당시의 대불호텔[9]
이후 임대건물과 월세집[10]으로 바뀌지만 1978년 화재 위험 등의 이유로 철거된 뒤 나대지로 방치되었다가 한동안 주차장으로 이용되었다.

3.3. 발굴 및 재현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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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당시 대불호텔 터

2011년 5월에 해당 부지에서 상가 신축공사를 하던 중 벽돌을 쌓아 만든 대불호텔 터가 발견되어 문화재청이 보존을 추진하였다. 2013년 인천시 중구는 터 위에 대불호텔 건물을 재현하는 사업을 추진하였고 2018년 완공하였다. 이 건물은 당시 대불호텔을 재현했으며, 대불호텔 전시관으로 쓰이고 있다.

3.4. 현재

2019년 4월 재현된 대불호텔 전시관에서 대불호텔의 역사를 알아보고 호텔 객실을 재현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대불호텔 전시관은 3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운영시간은 다음과 같다.

4. 관련 문서


[1] 大佛 hotel, 다이부츠 호텔(Daibutsu Hotel, 일본어: 大仏ホテル 다이부츠 호테루[2] 다만 말그대로 재현이라 그런지 몰라도 2층창의 아치가 두줄임에도 한줄로 되어있거나 난간 갯수와 형태가 다르고 지붕의 십자로된 무늬도 없다.[3] 왼쪽부터 1층, 2층, 3층이다.[4] '가배차'나 '가비차'는 영어 발음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양탕국'은 일반 민가에서 불렸던 이름이다.[5] 경인선이 개통되기 전에는 우마차로 12시간이 소요되었다. 때문에 인천에서 아침 일찍 출발해야 서울에는 저녁에 도착하기 때문에 인천에 점심 이후에 오면 필히 인천에서 하룻밤을 묵어야만 했다. 하지만 경인선이 개통되자 경인선으로 서울까지는 1시간 40분 1축구 밖에 안 걸리기 때문에 굳이 숙박을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인천에서 점심 식사를 마치고 출발해도 서울에 오후 3시 이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6] 서양인을 대상으로한 호텔이였기 때문에 다다미방이 익숙한 일본인 입장에서는 굳이 비싼돈 들여가며 맞지않는 서양식 호텔에 묵어야할 이유도 없었기 때문에 수요는 떨어질수밖에 없다.[7] 이때 발코니 부분이 변형되고 아치 부분에 '중화루' 간판이 걸렸었다.[8] 이후 중화루는 중구 홍예문로 12로인 현재 위치로 이동하게 되었다 여담으로 메뉴판에는 위에 있는 1918년에 뢰씨 일가와 다른 중국인들과 개업당시 찍은 사진을 쓰고 있으며, 중화루의 역사를 설명해주고 있다고 한다.[9] 사진에 보다싶히 아직도 중화루의 간판이 걸려있고, 옆에는 여인숙 건물이 새로 생겨있다.[10] 호텔과는 거리가 멀지만 건물의 원래 용도인 숙박으로서의 기능을 하게 된거니 어찌보면 원래 용도로 돌아온거나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