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의 축구인 | ||
<colbgcolor=#eee> 이름 | 델리오 오니스 Delio Onnis | |
출생 | 1948년 3월 24일 ([age(1948-03-24)]세) | |
이탈리아 라치오주 프로시노네 현 줄리아노 디 로마 | ||
국적 | [[아르헨티나| ]][[틀:국기| ]][[틀:국기| ]] | [[이탈리아| ]][[틀:국기| ]][[틀:국기| ]] | |
직업 | 축구선수 (중앙 공격수 / 은퇴) 축구감독 | |
소속 | <colbgcolor=#eee><colcolor=#000> 선수 | 클럽 알마그로 (1963~1968) 힘나시아 이 에스그리마 라플라타 (1968~1971) 스타드 드 랭스 (1971~1973) AS 모나코 FC (1973~1980) 투르 FC (1980~1983) SC 툴롱 (1983~1986) |
감독 | SC 툴롱 (1990~1991) 파리 FC (1992~1995) | |
국가대표 |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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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헨티나의 축구 선수 출신 감독. 리그 1 최다 득점자로, 2위인 베르나르 라콩브와의 격차는 무려 44골이나 차이가 난다.2. 선수 경력
1963년 클럽 알마그로의 유스 팀에 입단하여 1966년 1군 데뷔전을 치뤘다. 1968년까지 알마그로에서 적은 출전시간에도 불구하고 18경기에서 11골을 기록하며 주목을 받았고 결국 1968년 그를 지켜보던 힘나시아 이 에스그리마 라플라타가 그를 영입하였다. 힘나시아 이적 이후 맹활약하며 1970년에는 팀의 메인 스트라이커로 활약하며 1929년 이후 팀의 최고 성적인 3위를 기록하는데 공헌하였고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유럽 스카우터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1971년 당시 리그 1 소속이었던 스타드 드 랭스로 이적하였다. 이적 첫 해인 1971-72 시즌에는 적응기 없이 22골을 기록하며 득점 4위, 팀 전체 득점의 거의 50%의 육박하는 골잡이로서의 능력을 보여주었고 다음 해에는 17골을 기록하였다. 이러한 활약에 1부 리그로 승격하는데 성공한 AS 모나코 FC가 그를 영입하였다. 이적 첫 해, 리그에서 26골을 기록하며 팀이 리그 16위로 간신히 잔류하는데 공헌하였고 쿠프 드 프랑스에서도 9경기 10골을 기록하며 팀의 준우승과 유럽대항전 진출을 이끌었다.[1] 다음 시즌인 1974-75 시즌에는 커리어 첫 리그 30골을 기록하며 첫 득점왕을 차지하였고 유럽 대항전에서도 골을 기록하였다. 하지만 1975-76 시즌 29골을 기록하며 득점 2위를 기록하며 좋은 기록을 이어갔지만 팀은 뒤에서 2번째로 많은 실점을 기록하며 18위로 강등되었다. 강등 이후 팀에 잔류하여 리그 30골을 기록하며 득점왕과 2부 리그 우승 타이틀을 획득하였다. 1978-79 시즌, 29골로 당시 37골을 기록한 카를로스 비안치에 밀리며 득점왕을 차지하지 못했지만 팀은 리그 1 우승 타이틀을 획득하였다. 이후 모나코에서의 2시즌은 각각 22골과 21골을 기록하였고 1979-80 시즌에는 득점왕을 차지하였다. 1980년 투르 FC로 이적하여 2시즌 연속으로 득점왕을 차지하였으나 마지막 시즌에는 에이징 커브를 겪으며 11골을 기록하며 팀을 떠났다. 파리 FC에서는 첫 시즌, 전 시즌의 에이징 커브가 틀렸다는 듯이 21골을 기록하며 다시 한번 득점왕 타이틀을 차지하였고 다음 시즌에도 17골을 기록하였다. 1985-86 시즌에는 9경기 출전에 그쳤고 시즌이 끝나고 선수에서 은퇴하였다.1970년대와 1980년대 리그 1에서 득점왕을 5번이나 차지할 정도로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었지만 동시기 같이 리그 1에서 활약했고 똑같이 5번의 리그 득점왕을 차지한 카를로스 비안치와 라리가에서 활약했고 자국에서 열린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 득점왕이었던 마리오 켐페스, 국내파였던 레오폴도 루케에게 밀리며 한 번도 소집되지 못하고 선수에서 은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