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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1-25 17:13:06

독수리작전

2차대전 중 미국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가 한인을 대일전에 활용하기 위해 광복군과 합작으로 정보요원을 양성한 계획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독수리작전(Eagle Project))]

1945년에 시행하려고 했던 서울 진공 작전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8월 18일 미국군의 도움을 받아 수도 서울을 탈환하려고 했던 작전이다. 당시 미국은 전투기, 잠수함, 공수 부대를 지원해주기로 계획했으나,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함으로써 무산되었다. 미국 전략사무국은 독수리 작전이라고 불렀다.
[ 출처: 위키백과 서울 진공 작전]

태평양 전쟁 중 이승만은 미국으로부터 한국임시정부를 승인받기 위해 노력하는 동시에 미국 첩보당국과 협력하여 광복군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얻어내려고 애썼다. 미국 정부 역시 임시정부 승인에 대해서는 반대하였지만, 대일전에 한국인을 이용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높은 관심을 보였다. 이승만이 접촉한 기관은 미국 정보조정국(Coordinator of Information: 이하 COI))의 중국관련 특별고문이었던 에슨 게일(Esson M. Gale)이었다. 당시 COI는 윌리엄 도노반(William J. Donovan)이 책임자였는데 그는 동아시아지역에 대해서는 게일에 의존했다. 게일은 중국 전문가로서 이승만과 친분이 있었고 이승만을 한국의 손문이라 비유하며 높이 평가했다.

1942년 이승만은 게일을 통하여 전략첩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 이하 OSS)의 부국장인 엠 프레스톤 굿펠로우(M. Preston Goodfellow)를 만났다. 두 사람은 미국 내 한인들을 모집하여 특수훈련을 시키기로 결정했다. 1942년 7월 17일자 이승만의 비밀서신에 따르면, 모집인원은 군복무를 원하는 한인 50명으로 하고, 나이는 20세 이상 44세 이하로 했다. 50명 중 10명은 무선통신 훈련, 다른 10명은 해상전술 훈련을 받고, 나머지 30명은 여러 가지 중요 작전을 지도 조직하는 일을 맡기로 했다. 지원자들이 관계서류를 작성하여 주미외교부로 보내면 외교부에서 선별하여 관계당국에 추천하는 형식을 취했다. 2개월 정도 훈련을 받은 후 미국, 중국, 혹은 한국에 배치하기로 결정하였다. 1942년 10월 이승만은 50명의 명단을 OSS에 주었고, 그 중 12명이 선발되어 12월 4일부터 군사훈련을 받았다.

12명 중 9명이 훈련을 이수하였으나 해외로 파견되지 못했다. 1명을 제외하고는 육군에 등록하고 임무를 기다렸으나, 결국 원 계획대로 임무가 부과되지는 않았다. Ibid. 이승만이 추천하였던 요원들은 나중에 이승만 정권 하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장기영(체신장관), 이순용(내무장관), 장석윤(내무장관), 김길준(미군정장관 공보고문), 정운수(대한정치공작대), 김세선(뉴욕영사), 한표욱(주미공사), 이문상, 한승엽, 황득일 등이 있다.

[출처: 태평양 전쟁기의 ‘이승만 외교’ (1939-194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