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에드가 드가 Edgar Degas | |
본명 | 일레르제르맹에드가 드가 Hilaire-Germain-Edgar De Gas |
출생 | 1834년 7월 19일 |
프랑스 왕국 파리 | |
사망 | 1917년 9월 27일 (향년 83세) |
프랑스 공화국 파리 | |
국적 |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화가 |
사조 | 인상파 |
스승 | 루이 라모트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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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화가이자 조각가. 특히 발레리나 그림이 유명하다.2. 생애
파리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주로 발레 무용수와 경주마를 작품 소재로 삼았다. 주로 인상주의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그의 작품들 중에는 고전주의와 사실주의 색채를 띠고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들도 있다.
리세 루이르그랑을 졸업하고 파리 대학교 법학부에 들어갔으나 학업을 포기하고 1855년 앵그르의 제자 루이 라모트의 소개로 파리 보자르에 입학했다. 루브르 박물관을 드나들면서 거장들의 그림을 익혔다. 1856-1857년에 걸쳐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르네상스의 거장, 특히 기를란다요, 만테냐의 작품을 배우고, 또 푸생·홀바인의 그림도 배웠다. 1865년 살롱에 <오르레앙 시의 불행>을 출품하고,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후, 인상파 전람회에 참가했으나 뒤에는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1872년 어머니의 고향인 미국 루이지애나 주 뉴올리언스로 떠나 미국의 역동성을 목격했다. 1873년 파리로 돌아와 인상주의 화가들과 본격적인 교류를 시작했고, 말년에는 지병인 눈병이 악화되어 시력을 거의 잃는 바람에 주로 조각에 몰두했다.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어릴 적 어머니가 남편의 동생과 불륜을 하여 이 영향으로 여자를 싫어하게 됐다는 의견이 있다.
3. 작품
전기에는 가만히 서 있는 사람만을 그렸으나 후기 그림은 일상 생활을 하는 사람을 그림을 그렸다.초기엔 <보나의 초상> <꽃을 든 여인> <이오 부인> 등 초상화에서 출발했으나, 차츰 무용, 극장 등의 근대적 민중 생활의 묘사를 시작했다. 움직이는 것의 순간적인 아름다움을 포착하여 그리는 독자적인 수법을 썼다. 특히, 보는 각도를 바꾸어 가면서 정확한 데생과 풍부한 색감을 표현했다. 무희를 모델로 한 작품이 많아 '무용의 화가'로 불린다. 주요 작품으로 <댄스 교습소> <국화 옆의 여인> 등이 있다.
사실주의 그림을 싫어해 귀스타브 쿠르베가 그린 사실주의 그림을 보고 차라리 사진을 찍으라며 악평했다. 한 번은 거하게 취한 드가가 술자리에서 지팡이를 처들고 친구들 앞에서 "사실파 새끼들에게 쏘는 총이다! 탕! 탕!" 하며 크게 외친 적도 있었다고 한다.
3.1. 발레 작품
에드가 드가의 그림 중 특히 사랑 받는 것은 발레리나를 그린 작품들이다. 에드가 드가는 당시 유행하던 발레리나 그림을 그려 큰 수입을 얻었다. 당시 많은 화가가 발레리나 그림을 그려서 팔았지만 현재 명작의 반열에 오른 것은 드가의 그림 뿐이다.드가는 발레리나들과 친분을 쌓은 후 무대, 대기실, 연습실을 다니며 순간적인 모습을 스케치하였다.
무대 위 밝은 면 뿐만 아니라 당시 발레리나들의 어두운 면도 묘사하였다. 발레는 처음에 왕과 귀족을 위한 문화였다. 무대 위 출연자도 귀족 남성들이었다. 드가가 살았던 때도 발레가 아직 대중화되지 않았다. 관객 대부분이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람이었다. 하층민 여성에게 발레가 신분 상승 수단이었다. 발레리나들이 부유한 남성 스폰서를 끼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보여주는 작품이 '무대 위의 무희'이다. 발레리나의 아름다운 모습을 역동적을 그려낸 명작이면서 동시에 구석의 양복 입은 남자가 불길한 느낌을 준다.#
드가의 그림 속 발레리나들은 목에 검은 색 초커를 하고 있는 모습이 많다. 한국에서는 이 초커가 스폰서십 관계에 있는 남성의 구속을 가리킨다는 주장이 퍼져있다. 하지만 영어권에서 명성 있는 평론가가 이런 주장을 하는 글을 찾을 수 없다.
발레 수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