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ngéran Dipanegara(디파느가라 왕자).
1785 ~ 1855
1. 개요
욕야카르타 술탄국의 왕자로, 디파느가라 전쟁으로 유명하며 인도네시아의 3대 독립 영웅들 중 하나이다.2. 생애
2.1. 왕자 시절
할머니 라투 아긍(Ratu Ageng)과 함께 욕야카르타의 궁전에 가까운 트갈라자(Tegalraja)에서 살았다. 이 당시 자와의 고전 문학과 역사, 이슬람 신학을 공부하면서 이슬람 종교 학교인 프산트렌(pesantren)에서 주로 생활하며 하멩쿠부워노 2세 술탄의 궁정에는 그다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당시 자와에 만연해 있던 사회의 부패와 퇴폐스런 기풍, 궁정 음모 등을 혐오했기 때문이었다.디파느가라는 서민들에게 인기 있는 군주 후보로서 자와의 타락상이 악화되면 악화될수록 고결하고 신실한 그를 추종하는 이들은 늘어 갔다.
2.2. 디파느가라 전쟁
1825년 5월, 트갈라자 근방에 신설될 도로 문제를 놓고 디파느가라의 추종자들과 정적 다누르자 4세(Patih Danureja IV)의 부하들 사이에 충돌이 벌어졌는데, 이것이 큰 문제로 불거져 7월 20일 네덜란드 식민 정부는 디파느가라를 체포하기 위해 욕야카르타에서 군대를 파견하였다. 네덜란드군과 디파느가라의 추종 세력 간에 불가피한 무력 충돌, 약탈과 방화가 일어나자 디파느가라는 소동을 피해 피신하여 네덜란드에 대항하기 위한 세력을 끌어모았고, 곧 네덜란드에 대한 반란으로 비화되었다.그의 반란 세력은 급속도로 거대해졌다. 궁성의 왕자 29명 중 15명, 욕야카르타 지역의 부파티 88명 중 41명 반란 세력에 가담했고, 수라카르타 지역의 토착 세력 역시 디파느가라의 승세가 확실하다면 이에 가담할 기미를 보였다.
정신적 지주인 키야이 마자(Kiyai Maja)를 구심점으로 하는 자와 지역의 이슬람 사회 등의 많은 이들이 디파느가라를 위해 싸웠으며, 못한다면 포병 부대의 대포 끄는 일이라도 자원하였다. 망쿠느가라와 마두라의 군대도 합류했다. 네덜란드인을 포함한 유럽인에 대한 공격이 확대되어 갔고, 네덜란드 식민 당국은 중동부 자와 전 지역에서 군사적 위협을 받았다.[1]
디파느가라의 세력은 1826년 말까지 중부 자와 내륙 지방의 대부분을 통제하게 되었다. 자와인의 지지를 얻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네덜란드는 퇴위한 술탄 하멩쿠부워노 2세를 암본의 망명지에서 귀환시켜 욕야카르타 술탄국의 술탄으로 다시 앉히기도 했으나 전혀 효과가 없자 1827년부터 전면적인 진압 작전에 들어갔다. 이 때문에 1828년부터는 판도가 역전되어 디파느가라에게 불리하게 되었으며, 결정적으로 1829년 4월에는 키야이 마자가 네덜란드군에 체포되었고 마침내 1830년 3월 결국 협상에 응한 디파느가라가 말랑(Malang)으로 나갔다가 네덜란드군에게 체포되면서 디파느가라 전쟁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2.3. 체포 이후
체포된 디파느가라는 마나도를 거쳐 마카사르로 유배되었고, 그는 그곳에서 말년을 보내다 69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3. 여담
디파느가라 전쟁은 자와 지역에 엄청난 인명 피해를 주었는데 6천 명 가량의 네덜란드 군인과 유럽인, 7천 명 이상의 자와군이 사망하였으며 뿐만 아니라 최소한 20만 명의 자와인 역시 죽었고 결과적으로 욕야카르타의 인구는 절반으로 감소하게 되었다.[1] 그러나 욕야카르타의 술탄을 보좌하는 세력은 네덜란드를 지지하며 군대를 보내 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