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 | ||
시기 | 1212년 | |
장소 | 이베리아 반도, 나바스 데 톨로사 | |
원인 | 무와히드 왕조의 기독교세력 격멸 시도 | |
교전국 | 카스티야 왕국 아라곤 왕국 포르투갈 왕국 레온 왕국 나바라 왕국 성전 기사단 | 무와히드 왕조 |
지휘관 | 알폰소 8세 안초 7세 페드로 2세 | 무함마드 앗 나시르 |
병력 | 약 1만 2천명 | 약 2만 2천명 |
피해 | 사상자 2000명 미만 | 매우 큰 피해 |
결과 | 기독교 연합군의 승리 | |
영향 | 무와히드 왕조의 쇠퇴시작 레콩키스타의 큰 진전 |
스페인어 Battle of Las Navas de Tolosa,
아랍어 معركة العقاب
[clearfix]
1. 개요
레콘키스타의 향방을 결정 지은 전투1212년 7월 12일에 크리스트교 연합군 (카스티야, 포르투갈, 아라곤, 나바라, 성전 기사단) 세력과 무함마드 앗 나시르 휘하의 무와히드 왕조 간에 벌어진 대전투. 연합군이 한 목동의 도움을 받아 고갯길을 몰래 넘어 무와히드 군대의 숙영지를 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알 안달루스는 혼란에 빠지고, 레콘키스타 운동이 절정에 이르게 되며 무어 인의 중심지인 코르도바, 세비야, 카디스 등이 차례대로 함락되었다.
2. 배경
이 전투가 벌어진 나바스 데 톨로사는 하엔(Jaen)부근에 있다.
알라르코스 전투 (1195년) 이후 레콘키스타 세력의 남진을 저지한 무와히드 왕조는 3차 십자군에게 빼앗긴 포르투갈 남부의 알가르베를 수복하고 칼라트라바 기사단의 2번째 거점인 살바티에라를 점령하는 등 반격에 나섰다.
3. 전개
1212년 7월,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를 중심으로 아라곤의 페드로 2세, 나바라의 안초 7세, 포르투갈의 아폰수 2세의 연합군이 교황 특사 아르노 애므리와 함께 과달카비르 협곡을 따라 남하하였다. 그들은 현지 목동의 인도 하에 시에라 모레나 산맥 동쪽 끝의 데스페나페로스 고개를 통과, 기습적으로 무와히드 진영에 들이닥쳤다. 보초들이 적침을 알리기도 전에 기사들이 돌격해왔고 무와히드 군대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졌다. 안초 7세의 나바라 군대는 칼리파의 막사의 맘루크 근위대를 돌파하였고 이에 칼리파 앗 나시르는 도주하였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과장이긴 하지만 10만 무슬림 병사들이 전사하였고 기독교 연합측의 피해는 2천에서 3천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기독교도 전사자 중에는 산티아고 기사단장 페드로 아리아스가 포함되어 있었다. 칼라트라바 기사단장 루즈 디아즈 역시 중상을 입어 사퇴해야 했으며 칼리파의 휘장과 막사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보내졌다.칼리파가 도주하는 순간 이베리아에서의 무와히드 왕조의 패권은 붕괴되었다.
4. 영향
무와히드 왕조의 급격한 쇠퇴, 3차 타이파 시대 개막카스티야 측은 곧바로 칼라트라바를 수복하였고 동명의 기사단 역시 옛 본부로 복귀했으나 이내 1218년 12km 떨어진 칼라트라바 라 누에바로 본부를 옮긴다. 한편 참패 후에도 무와히드 조의 안달루스 지배권 자체는 유지되었으나, 1225년에 시작된 내전 시에 칼리파 알 아딜이 모로코의 경쟁자를 치기 위해 안달루스 병력을 동원하며 군사력이 부재하게 되었다. 그 틈에 군벌 이븐 후드가 자립하였고, 카스티야 군이 남하하였다. 그후 20여년간 코르도바, 세비야가 차례로 함락되었고 그라나다에 자리잡은 나스르 왕조 만이 카스티야의 봉신국이 되는 조건으로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모로코에 국한된 무와히드 왕조 역시 반세기간 이어진 밀고 밀리는 전쟁 끝에 옛 제후국이던 마린 왕조에 의해 멸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