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Riada del camping de Biescas1996년 8월 7일 스페인 아라곤 비에스카스의 라스 니에베스(Las Nieves) 캠핑장에서 일어난 홍수.
2. 라스 니에베스 캠핑장
라스 니에베스 캠핑장은 프랑스 국경으로부터 24km 가량 떨어져있는, 피레네산맥의 한 선상지에 위치한 캠핑장이었다. 캠핑장 위에서 내려오는 강물이 캠핑장을 만나면 갈라져서 양 옆으로 흘러가는 지형이었다. 캠핑장은 산으로 둘러 싸여있었고, 내부엔 수영장이 딸린 캠핑용 별장이나, 캠핑카 지역, 텐트 지역 등이 있어 스페인은 물론, 외국에서도 온 수많은 관광객들이 오고 간 인기 있는 곳이었다.해당 지역엔 과거 1913년, 그리고 1929년에 이미 홍수가 난적이 있었고, 지형상 물이 고이기 쉽다는 점 때문에 아라곤 지방정부의 자연환경보전국(Servicio de Conservación del Medio Natural) 소속 에밀리오 페레스(Emilio Pérez)는 해당 지역에 캠핑장을 세우는 것에 부정적 의견을 내기도 했었다. 혹시 모를 홍수를 대비한 댐과 배수로를 캠핑장 근처에 만들어두긴 했으나, 한계가 있었다.
3. 사고 당일
사고 당일 오후 7시경, 10분에 100mm씩 내리는 엄청난 양의 폭우가 오기 시작했다. 확률상 200년에 한번 올 확률의 폭우였다. 땅이 흡수하기엔 너무나 많은 양의 비였고, 흡수하지 못한 물은 그대로 강으로 흘러갔다. 캠핑장 위의 강물이 불어나 산을 타고 내려와 650여명이 있던 캠핑장을 그대로 덮쳤다. 단순 물만 떠내려온게 아니고, 물에 휩쓸린 진흙과 나무, 바위까지 통째로 떠내려 왔다. 당시 홍수의 양은 초당 500 입방미터의 물이 쏟아지는 정도였다. 거기에 더해 홍수로 떠내려온 나무와 바위들의 무게는 무려 13,000톤에 달했다. 휩쓸린 사람들은 그대로 캠핑장 밑의 리오가예고(Rio Gallego) 강까지 떠내려갔다. 양 옆이 산이어서 사실상 거대한 배수로나 다름 없는, 물이 고이기 쉬운 지형이었기에 피해가 커졌다.
사고 소식이 전해지고 인근 캠핑장에서도 비슷한 사태를 우려해 사람들이 급히 대피하기도 했다.
생존자를 찾고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소방관과 구조대원, 경찰에 인근 마을 주민, 자원봉사자, 그리고 스페인군까지 동원됐다. 다이버들도 시신 수습에 동원되어 불어난 강에서 시신을 수습했다. 시신 상당수는 거센 물살에 옷이 벗겨졌다. 한 시신은 그대로 강으로 떠내려가 13km 떨어진 늪지대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마지막 시신은 11개월이 지나고서야 잔해들 사이에서 발견됐다.
현지 경찰은 사망자 및 실종자 인원을 파악하려고 캠핑장 내 컴퓨터를 찾아 데이터를 조사하려 했으나, 컴퓨터가 전부 침수된 상태여서 소용 없었다. 생존자들은 인근 대피소에서 한동안 지내야 했다. 주민들이 음식과 물건들을 제공했다.
사고로 87명이 사망했고, 187명이 부상을 입었다.
4. 사고 이후
살아남은 사람들은 급히 비에스카스의 운동장에 대피했다. 그곳에서 정부가 급히 지원해준 음식과 옷가지로 한동안 살아야했다.당시 스페인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는 그리스와 덴마크의 소피아와 함께 사고 지역을 찾아 유가족들을 위로하고 구조를 돕는 사람들에게 격려를 보냈다.
사고 이후 위험 지역에 캠핑장을 세운 것에 대한 비판이 거셌다.
법원에선 아라곤과 주 정부에서 희생자와 유가족에게 1130만 유로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주 정부와 지역 행정부는 2억 스페인 페세타를 지불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사고 10년 후인 2006년 까지도 보상금 중 30% 가까이를 지불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강 유역은 공사를 몇번 해서 폭우가 또 오더라도 홍수가 나지 않게 대비했다.
캠핑장 지역은 통째로 버려졌다. 지역 내부에는 타 지역 사람들이 그리고 도망간 그래피티로 가득하다. 같은 이름의 캠핑장이 다시 세워지긴 했으나 다른 지역에 세워졌다.
사고 지역에는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져있다.#
비에스카스에선 매년 사고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식을 진행하고 있다. 2016년엔 위와 다른 추모비도 세워졌다.#
2년 뒤, 한국에서 비슷한 유형의 사고가 발생했다. 지리산 폭우 참사 항목 참조. 다만 지리산 폭우 참사는 피서객의 무단캠핑과 정부의 늑장대응, 기상청의 낙후된 기상장비로 인한 일기예보 실패가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