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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9-18 19:26:47

라이즈(리그 오브 레전드)/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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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식 배경2. 잿더미에서3. 오랜 친구4. 힘의 부름5. 구 배경 16. 구 배경 2

1. 공식 배경

이 세계의 형체를 만든 것이 비전의 힘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라이즈는 아직 젊고 미숙한 수련생에 불과했다.

라이즈의 스승인 마법사 “헬리아의 타이러스”는 고대에서부터 존재했던 어느 결사 조직의 일원으로, 룬테라에서 가장 위험한 유물을 모아서 수호하는 일을 사명으로 삼고 있었다. 어느 날 라이즈는 스승이 목소리를 한껏 낮춘 채 다른 마법사와 나누는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두 사람은 “세계 룬”이라는 것을 두고 논의를 벌이고 있었다. 라이즈가 듣고 있음을 알아차리자, 타이러스는 곧바로 대화를 끊어 버리고는 언제나 몸에서 떼놓지 않는 두루마리를 황급히 움켜잡았다.

결사 조직이 최대한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세계 룬에 대해 이런저런 말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세계 룬이 어떤 의미에서 중요한지, 그 안에 든 순수한 힘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그 세계 룬이란 것을 손에 넣으면 호적수를 물리칠 무기로 써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떠올리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라이즈와 타이러스는 발로란을 돌아다니며 숱한 부족들을 만나 세계 룬에 대해 막연히 갖는 공포심을 누그러뜨리는 한편, 아무 손에나 들어가서는 안 될 유물임을 알리는 데 힘썼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임무는 어려워지기만 했다. 라이즈는 스승 타이러스가 점점 더 초조해하는 기색임을 눈치챘다. 마침내, 라이즈가 태어난 곳이기도 한 녹시이라는 지역에서 첫 번째 재앙이 터지고 말았다. 후대에 “룬 전쟁”으로 불리게 되는 격동의 시작이었다.

두 개의 국가가 서로 반목하기 시작했고, 긴장은 커져갔다. 타이러스는 크홈이라는 마을에서 두 나라의 지도자를 만나 교섭을 벌였지만, 이미 분쟁은 그의 힘으로 중재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버렸다. 결국 전쟁이 터졌고, 타이러스와 라이즈는 근처 산악지대로 몸을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공포에 질린 채 세계 룬의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직접 목격했다.

발 밑에서 땅이 쩍쩍 갈라졌고, 단단한 암반이 헛구역질하듯 끄윽끄윽 소리를 냈다. 머리 위 하늘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기라도 한 것처럼 마구 뒤틀렸다. 양쪽 국가의 군대가 대치하고 있던 계곡을 돌아본 순간, 두 사람은 미치기 직전이 되어버렸다. 세계 룬의 어마어마한 파괴력은 이 세상의 물리 법칙을 모조리 무시했다. 그 많던 건물과 사람들이 한꺼번에 사라졌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쪽으로 꼬박 하루를 여행해야 볼 수 있었던 바다가 지금은 턱밑까지 밀려들고 있었다.

세계 룬의 힘은 이 세계를 찢고 거대한 구멍을 만들어 놓았다. 라이즈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하염없이 구멍을 응시했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자신이 고향이라 불렀던 마을은 흔적도 없었다.

이후 전쟁의 불길은 룬테라 전역에 급속히 번져나갔다. 라이즈는 어느 한쪽을 편들어 전장에 뛰어들어야겠다는 생각에, 대의를 위해 자신의 마법 능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타이러스는 제자를 타일렀다. 두 사람은 다른 이들을 이끌어 평화로운 길로 안내할 의무가 있고, 이 모든 것이 끝날 즈음에 이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기를 기도해야 한다면서.

세계 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타이러스는 자제를 부탁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세계가 전멸할 수 있다는 위험 앞에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실, 계속되는 전쟁에 이미 통렬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기꺼이 갖고 있는 룬을 타이러스에게 넘겨주고 싶어 했다. 다만, 그들 중 누구도 제일 처음으로 그런 일을 하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속절없이 시간이 흐르고 갈등은 더 멀리 퍼져나갔다. 라이즈는 스승 타이러스가 점점 더 무언가 다른 일에 신경을 쏟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타이러스는 고위 지도층이나 대마법사들과 비밀스러운 회동을 가질 때면 반드시 라이즈에게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임무를 맡겨 멀리 보냈다. 그런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오기까지는 몇 주가 걸리기 일쑤였다. 결국 라이즈는 타이러스의 지시를 거부하기로 마음먹었고, 곧 무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스승, 헬리아의 타이러스가 세계 룬을 하나도 아니고 두 개나 몰래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제자에게 비밀을 들키자 타이러스는 불같이 화를 냈다. 그는 평범한 필멸의 존재들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어린아이 같아서,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는 힘을 장난 삼아 만지작거린다고 강변했다. 그래서 자신은 더 이상 권력에 목매는 무지한 자들의 비위를 맞추는 외교관 노릇을 하지 않을 것이며, 이제부터는 그들을 막아내는 역할을 하겠다고… 라이즈는 논리적으로 타이러스를 설득하려 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한때 자기 자신이 그토록 매도했던 바로 그 유혹에 넘어가 버리기 직전인, 결함 투성이 인간이었다. 룬의 유혹적인 매력은 이미 타이러스의 정신에 침투했다. 과거에는 오로지 평화만을 바라던 타이러스가, 이제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종말로 몰아넣을 수단을 갖고 있었다. 라이즈는 행동에 나서야 했다. 비록 그 행동의 결과가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진정한 친구를 잃는 것이라 하더라도.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라이즈는 자신이 가진 마법의 힘을 모두 내쏘았다. 다음 순간, 타이러스는 검게 그을린 주검이 되어 바닥에 쓰러졌다.

라이즈는 온몸을 덜덜 떨면서, 자신이 벌인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고민했다. 타이러스처럼 강하고 고결한 인품의 마법사도 룬의 치명적인 힘에 타락해 버렸는데, 나 같은 사람이 어찌 이런 룬을 다룰 수 있겠단 말인가? 하지만, 이제는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에게도 룬을 맡길 수 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장 위대한 문명국들이 서로를 거의 파멸시키다시피 하면서 전쟁은 끝을 맺었다. 라이즈는 자신이 물려받은 임무가 무엇인지를 확실히 깨달았다. 세계 룬을 안전하게 지키지 못한다면 룬테라는 분명 멸망하게 될 것이다. 그 사실을 안다는 것은 오롯이 혼자서 짊어져야 하는 짐이었다. 그날부터 라이즈는 마지막 남아 있는 룬들을 찾아 이 세계를 샅샅이 뒤지고 있다. 룬에 깃들어 있는 막강한 힘이 약속하는 바를 계속 거부하고, 그 힘을 이용하기는커녕 누구도 알지 못하는 곳에, 호기심과 탐욕이 가득한 눈을 피해 속박시켜 놓은 채.

룬 마법에 노출된 덕분에 수명이 비정상적으로 길어졌지만, 라이즈에게는 휴식을 누릴 여유가 없다. 세계 룬에 대한 소문이 또다시 룬테라를 들쑤시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룬테라 주민들은 세계 룬의 힘을 멋대로 휘둘렀다가는 어떤 대가를 치르는지를 까맣게 잊어버린 듯하다.

2. 잿더미에서

"못 하겠습니다."

케간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다시 들어가려는 말을 간신히 내뱉었다.

"스승님, 전 못 해요."

패배를 인정한 케간은 잠시나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실패가 이렇게 심신을 지치게 할 줄은 몰랐다. 케간은 눈을 들어 스승을 쳐다보았다. 역겹게도 스승의 눈에서 맑게 갠 하늘만큼 또렷한 연민이 내비쳤다.

스승이 이국적인 억양으로 경쾌하게 말했다. "할 수 있냐 없냐는 문제가 아니야. 의지의 문제인 거지." 이곳 북부에서는 거의 들을 수 없는 억양이었다.

스승이 손가락을 튀기자 보라색 불꽃이 일며 장작더미에 불이 붙었다. 의지만으로 순식간에 모닥불을 피운 것이다.

케간은 모닥불에서 눈을 돌리며 눈 덮인 땅에 침을 뱉었다. 전에도 들은 말이었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참 쉽게도 하시네요."

스승은 제자의 말이 생각해볼 가치도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간단할지는 모르지만 쉽지는 않아. 간단한 것과 쉬운 것은 다르단다."

"그래도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을 텐데..." 케간이 무의식적으로 뺨에 난 흉측한 화상 자국을 손가락 끝으로 더듬으며 중얼거렸다. 케간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방법이 있을 것이다. 항상 이런 식일 수는 없다. 아니 이런 식이어서는 안 된다.

"어째서지?" 스승이 호기심에 빛나는 눈으로 케간을 쳐다보며 물었다. "왜 꼭 다른 방법이 있어야 하느냐? 네가 계속 실패해서냐?"

케간이 툴툴대며 말했다.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는 건 비겁한 사람들이나 하는 행동입니다."

스승이 짙은 눈썹 한쪽을 치켜세웠다. "이것 보게? 글도 모르고 손가락 개수를 넘어가면 셀 줄도 모르는 야만인 녀석이 말은 제법이구나."

살짝 긴장했던 케간은 스승이 약간 경직된 미소를 띠자 긴장을 풀었다. 그들은 타닥거리는 모닥불 주변에 앉아 상아로 만든 컵에 고깃국물을 데워 마셨다. 끝없이 펼쳐진 툰드라 위로는 모래알 같은 별이 반짝였다.

케간은 희뿌연 달무리와 여느 때처럼 그 주변을 비추는 별빛을 쳐다보았다. 이 지긋지긋하게 추운 땅에서도 찾고자 하면 아름다움은 많았다.

고개만 들어도 말이다.

"오늘 밤에는 영혼들이 춤을 추는군요."

스승이 고개를 젖혀 하늘을 바라보며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북극광 말이냐? 저건 춤추는 영혼이 아니라 태양풍이 대기권 상층부에..."

케간이 멍한 눈빛으로 스승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스승이 중간에 말을 끊고 어색하게 헛기침했다. "관두자꾸나."

다시 침묵이 흘렀다. 케간은 벨트에서 단검을 꺼내 아직 불에 타지 않은 나뭇조각을 능숙한 솜씨로 깎아냈다. 불을 지르고 목숨을 빼앗던 손을 훨씬 평화로운 일에 쓰기 시작한 것이다.

케간의 시선 끄트머리에 자신을 주시하는 스승이 보였다.

"숨을 깊게 들이쉬거라." 스승이 말했다.

케간을 단검을 놀리는 손을 멈추지 않고 말했다. "숨이야 항상 쉬는데요."

"어서." 스승이 살짝 조급함을 드러내며 말했다. "그렇게 아둔하게 굴지 말고 내 말대로 해봐라."

"제가 어떻게 굴었다고요?"

"아둔하다는 말은... 아니 됐다. 그냥 숨을 들이쉬고 참을 수 있을 만큼 참아 보아라."

"도대체 왜요?"

스승이 한숨 비슷하게 숨을 내쉬었다.

"알았어요." 케간이 깎던 나뭇가지를 모닥불에 던지고 단검을 벨트에 꽂으며 말했다. "할게요. 하면 되잖아요."

케간은 가슴과 어깨를 한껏 부풀려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조용히 숨을 참으며 스승의 말을 기다렸다.

"네가 마신 공기는 네가 만든 것이 아니다." 스승이 말했다. "네가 살기 위해 들인 것일 뿐, 몸이 필요하니 들이마셨다 뱉었다 하는 것이지, 결코 네 것이 아니다. 넌 공기를 담는 그릇일 뿐이야. 공기가 널 통해 들어왔다 나왔다 하는 거란다."

케간이 숨을 내쉬려고 하자 스승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아니다. 네 폐에 있는 공기를 느껴 보아라, 케간. 공기가 빠져나가려고 네 갈비뼈를 미는 걸 느껴봐."

젊은 야만인 제자의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케간은 입 대신 눈으로 스승에게 물어보았다.

스승이 퍼런 손을 저으며 대답했다. "아직 아니야. 더 참아라."

한계에 다다른 인내심이 반항심으로 바뀌었다. 헐떡이는 가슴에서 밀려오는 통증 때문에 반항심도 조금씩 사라지자 순수한 오기가 솟아올랐다. 케간은 숨을 참으려 부들부들 떨며 스승을 쏘아보았다. 자신을 시험한다고 확신한 케간은 뭔지는 몰라도 그 시험을 통과해 조금이라도 인정받고 싶었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며 귓가에 심장 소리가 고동쳤다. 하지만 스승은 케간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케간은 마침내 차가운 밤공기에 숨을 내뱉고 헐떡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 순간 케간의 모습은 다친 들짐승이 이빨을 드러내고 경계하는 것처럼 보였다.

스승은 케간의 그런 모습도 놓치지 않고 보았다.

"정말 까무러칠 때까지 버티려나 하고 궁금해하던 참이었다." 그가 중얼거리며 말했다.

케간은 그토록 오래 숨을 참은 자신이 자랑스러워 미소를 띠며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그게 바로 네 문제다." 스승이 그의 자세를 관찰하며 말했다. "공기는 네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하지만 넌 네 안에 공기를 한참 가둔 것에 뿌듯해했다. 마법도 마찬가지야. 넌 마법을 네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어 자신이 마법을 담는 그릇일 뿐이라는 사실을 망각했다. 마법을 가슴과 손에 가둬 네 뜻대로 옭아매려고 하지 않았느냐. 하지만 마법은 절대 그런 것이 아니다. 마법은 주위에 있는 공기와 같아서 몸 안에 들여 잠시 사용한 뒤 풀어줘야 하는 거야."

야만인 제자와 그의 마법사 스승은 다시 침묵에 빠졌다. 바람이 남쪽에 있는 계곡을 통과하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케간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스승을 쳐다보았다. "그러면... 그냥 그렇다고 말씀하시지, 왜 굳이 숨을 참게 했습니까?"

"이미 수십 번이나 말하지 않았느냐? 아무리 말해도 말귀를 못 알아먹으니 몸으로 느끼면 이해할까 싶었다."

케간은 콧방귀를 끼며 모닥불을 노려보았다.

"스승님, 요즘 제 마음을 어지럽히는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스승은 둘둘 말아 등에 멘 두루마리를 툭툭 치고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안 된다. 네가 봐선 안 되는 거야."

젊은 야만인 제자는 떨떠름한 미소를 지으며 스승을 응시했다. "그걸 보고 싶다는 게 아닙니다. 배우는 쪽이 아니라 가르치는 쪽이 문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스승은 근심 가득한 눈으로 모닥불 위에서 춤추는 불꽃을 응시했다.

"가끔은 나도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가 대답했다.


다음 날 그들은 북서쪽으로 이동했다. 관목이 발에 차이는 바위투성이의 황량한 땅을 따라 조금만 더 가면 드문드문 툰드라가 얼어붙은, 얼음으로 뒤덮인 불모지가 나올 터였다. 스승은 주변 경관처럼 황량한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케간은 불평하거나 기뻐하는 일 없이 평소처럼 묵묵히 인내했다.
"요전에 하신 말씀 말입니다." 야만인이 스승을 따라잡으며 물었다. "뭔가 거짓말처럼 들린 말이요."

스승이 두건 그림자에 가려진 얼굴을 살짝 돌리며 말했다. "내가 지금까지 올바른 일만 한 것은 아니지만, 거짓말을 한 적은 없다."

케간은 사과인 듯 아닌 듯 애매한 목소리로 툴툴댔다. "그렇다면 거짓말이 아니라... 허황된 이야기라고 해두죠."

스승이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계속해 보아라."

"그 제국이라는 곳 말입니다. 아주 오래전에 멸망했다는 왕국이요."

"슈리마 말이냐? 그게 왜?"

"그 왕국이 서리도 내리지 않고 얼음도 얼지 않는 땅에 있었다고 하셨죠?" 케간이 농담을 건네듯 씩 웃으며 말했다. "전 그런 말을 믿을 만큼 어수룩하지 않습니다, 스승님."

스승은 호기심 왕성한 야만인 제자 덕분에 황량한 생각을 떨칠 수 있었다. 그는 배낭을 한쪽 어깨에서 다른 쪽 어깨로 옮기며 옅은 미소를 드러냈다.

"거짓말이 아니다." 그가 걸음을 멈추고 남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남쪽으로 멀리, 수백 일을 걷다 보면 다른 바다가 나오고 그 바다를 건너면..."

그는 잠시 생각했다. '겨울밖에 모르는 녀석에게 사막을 어떻게 설명하나?' 얼음밖에 못 봤을 텐데 모래는 또 어떻게 설명한담?'

"... 눈이라곤 구경도 할 수 없는, 뜨거운 먼지로 가득한 땅이 나온다. 태양은 지글거리고 비도 거의 오지 않아 항상 메말라 있는 곳이지."

케간이 스승을 다시 쳐다보았다. 자칫 그대로 믿었다가는 멍청해 보일 테니 믿지 않겠다는 눈빛이었다. 스승은 지금까지 버림받은 아이나 심약한 어른에게서 이런 눈빛을 많이 보았다.

"애니비아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라니." 케간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렇게 오래 걸어도 세상의 끝이 나오지 않나요? 정말 세상은 그렇게 넓은가요?"

"사실이다. 세상에는 여기처럼 얼어붙지 않는 곳도 많단다. 너도 시간이 지나면 프렐요드처럼 추운 곳도 드물다는 사실을 알게 될 거야."


그날 내내 딱딱한 대화가 오갔고 야영할 때쯤 되자 말할 거리가 떨어졌다. 젊은 야만인 제자는 그래도 평소처럼 묵묵히 인내했다. 그는 모닥불 건너편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긴 스승을 바라보았다.

"제게 뭔가 가르쳐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스승이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그래야 하나?"

스승은 그의 제자가 옆에서 숨을 쉬기만 해도 방해가 된다는 느낌을 풍겼다. 그와 몇 주를 함께 지낸 케간에겐 익숙한 느낌이었다. 케간은 손으로 지저분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상아로 만든 어머니의 장신구를 얼굴에 문대며 뭔가를 중얼거렸는데, 어찌어찌 스승의 말에 동의하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스승이 계속 대답하지 않자 케간이 물고 늘어졌다.

"아무튼,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안에 도착하나요?"

스승은 조금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니. 앞으로 몇 주는 더 가야 할 거다."

농담이 아닌 듯했다.

"네가 재능을 뜻대로 발휘하는 데 애를 먹고 있다는 사실을 곰곰히 생각하고 있었다." 스승이 무미건조하게 덧붙였다.

케간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이럴 때는 그냥 입을 다물고 있어야 무식하다거나 참을성이 없다는 소리를 듣지 않았다. 케간의 침묵이 통했는지 스승이 말을 이었다.

"네게 어느 정도 재능이 있다는 건 사실이다. 네 피에 흐르는 재능 말이다. 넌 마법이 너와 대립하는 외적인 힘이라는 인식을 버려야 돼. 마법은 가둬두는 게 아니라... 유도해야 하는 거야. 그동안 널 유심히 지켜본 바, 넌 마법을 쓰려고 할 때 네 의지대로 통제하려고 해."

케간은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게 마법이잖아요. 어머니는 항상 뜻대로 마법을 부렸어요. 원하는 대로 마법이 일어났단 말입니다."

스승이 짜증을 억누르며 말했다. "마법은 일어나게 할 필요가 없다. 이미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이지. 우리 주변을 둘러싼 원초적인 창조의 기운을 손에 쥐고 뜻대로 구부릴 필요는 없어. 그저... 그 기운이 네가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도록 이끌면 된다."

스승이 진흙으로 공을 빚듯 손을 움직이자 허공에서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희미한 종소리가 들렸다. 실체가 없는 듯한 에너지가 마법사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타고 올라 천천히 엉겨 붙더니, 구체에서 몇 가닥이 떨어져 나와 스승의 퍼런 손을 휘감고는 시커먼 유기체처럼 끓어올랐다.

"어느 시대에든 고지식한 방법으로 마법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마법이라는 원초적인 힘을 의지대로 부리려는 방법에 얽매이는 자들이지. 그런 어설픈 방법도 어느 정도는 통한다. 결과가 느리고 신통치 않을 뿐이지. 하지만 넌 그럴 필요가 없단다. 내가 지금 이 에너지를 구체 모양으로 빚은 것처럼 보이느냐? 아니다. 난 그저 구체 모양이 되도록 이끈 것뿐이다. 이해하겠느냐?"

"알았어요.” 케간이 인정했다. “하지만 이해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에요."

스승은 제자가 드디어 뭔가 쓸만한 말을 했다는 듯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규칙을 철석같이 믿거나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들은 이 세계와 다른 세계를 관통하는 마법 에너지를 규정한다. 그 에너지를 조작하고 속박해 마법을 사용하려고 하지. 그들은 동굴을 비추는 한 줄기 빛을 보고 감탄하는 사람들이다. 동굴 밖에 나가면 온 세상을 비추는 빛을 볼 수 있는데 말이야." 그가 날카로운 한숨을 쉬었다. "네 어머니는 그런 마법사 중 하나였다, 케간. 반복적인 의식이나 대대로 전해지는 조제법을 통해 간단한 마법을 부렸지. 하지만 네 어머니나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의식이나 부적, 마법서를 통해 세상을 움직이는 순수한 힘과 자신 사이에 벽을 쌓을 뿐이다."

케간은 잔물결을 일으키며 회전하는 구체를 쳐다보았다. 스승의 손은 구체에 닿지 않았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포개지며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보였다.

"내가 비밀을 알려주마."

그 순간 스승과 제자의 눈이 마주쳤다. 케간의 눈은 색이 옅은 평범한 인간의 눈이었지만, 스승의 눈은...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의 눈이었다.

"듣고 있습니다." 케간은 의도했던 것보다 부드럽게 말했다. 그는 자신이 느낀 경외심과 무지함을 스승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마법은 쓰이기를 원한다." 스승이 말했다. "마법은 창조의 첫 조각에서 뿜어져 나와 우리 주변을 채운다. 마법은 다루어지기를 원하지. 그게 우리처럼 마법을 다루는 사람이 가장 극복하기 힘든 점이야. 마법이 뭘 원하는지, 그것을 얼마나 원하는지 깨닫게 되면... 마법을 어떻게 다뤄야 할 지가 아니라 마법을 멈춰야 할 때를 아는 게 어려워지지."

그가 손을 벌리더니 폭포처럼 쏟아지는 힘을 분출하는 구체를 살며시 밀어 제자에게 보냈다. 케간이 구체를 잡으려고 살며시 손을 뻗었지만 손가락이 표면에 닿자 구체가 터져 버렸다. 결국 안개처럼 옅어지더니 점점 희미해지는 종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너도 알게 될 거다." 스승이 약속하는 투로 말했다. "인내심과 수치심은 배우기 가장 어렵지만 그 둘만 배우면 다른 것은 필요 없다."

케간이 한 가닥 의심에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스승은 털가죽으로 만든 조잡한 담요를 덮고 누워 어두운 하늘에 일렁이는 북극광을 바라보며 밤을 지새웠다. 흙으로 묻어 둔 모닥불 반대편에서는 야만인 제자가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분명 굴레를 벗어던진 자가 꾸는 꿈이겠지.' 스승은 생각했다.

스승의 생각은 옳지 않았다. 케간은 야만인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끝없는 시련의 땅에서 거칠게 단련된 젊은이였다. 프렐요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생존을 최우선 과제로 여긴다. 프렐요드의 짐승은 가죽이 갑옷처럼 두꺼웠고 송곳니가 창만큼이나 길다. 얼음으로 뒤덮인 해안을 따라 보이는 마을은 서로 약탈과 살인을 일삼는다. 수천 년이나 겨울이 지속된 곳이다. 이들이 사는 곳에서 글이나 예술은 사치였고 책을 읽는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지식은 기력이 쇠한 노인이나 부족 주술사의 속삭이는 듯한 이야기를 통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구전되었다.

케간은 고집불통이었지만 굴레를 벗어던진 건 전혀 아니었다.

'저 녀석을 데리고 오지 말 걸 그랬나? 측은한 생각이 들어서였을까, 마음이 약해져서였을까?'

스승도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냥 버려두고 올 수도 있었어.'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씁쓸하지만 다음 생각이 이어졌다. '누굴 버리는 게 처음인 것도 아닌데...'

스승은 사그라지는 모닥불 위로 아지랑이처럼 솟는 열기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잠든 야만인 제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입술을 씰룩거리더니 그에 맞추어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네가 무슨 꿈을 꾸는지 궁금하구나, 케간 로디. 잊어버릴 만하면 다시 나타나 널 괴롭히는 기억은 도대체 무엇이냐?" 스승이 속삭였다.

매일 밤 케간은 꿈속에서 과거를 되새겼다. 그의 스승을 만나기 전 그는 마을에서 추방당해 얼어붙은 황야를 홀로 떠돌았다. 죽지 않겠다는 집념으로만 버텼다.

추방당하기 전에 그는 싸움꾼이자 되다 만 주술사, 차가운 어머니의 아들이었다.

겨울의 추위를 겨우 열아홉 번 뼈에 새긴 케간은 프렐요드뿐만 아니라 어느 기준으로도 젊었다. 그는 기지와 칼끝으로 치열하게 살며 약간의 명성을 얻었지만 지나칠 정도의 수모를 겪었다.

매일 밤 꿈속에서 그는 누더기를 걸치고 격렬한 눈보라를 헤치며 방황하다 눈에 파묻혀 천천히 얼어 죽었다. 케간은 빗속에서 돌멩이를 들추며 덤불 사이에서 귀중한 약초를 캐는 치료사였고 어머니의 동굴에 쭈그려 앉아 야속한 세상을 피할 수 있었지만 불안에 찬 어머니의 시선은 피할 수 없었던 소년이었다.

그리고 매일 밤 그의 꿈엔 잿더미가 된 리간 유역이 보였다.


케간이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게 된 건 그가 일곱 살이 되던 해였다. 하루는 케간의 어머니가 케간 앞에 쭈그리고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잡고 긁힌 자국과 멍을 살폈다. 어머니가 그를 만지는 일은 거의 없었으므로 케간은 살짝 놀랐고 불안해했다.

"누가 이랬니?" 어머니가 물었다. 케간이 대답하려고 숨을 들이쉬자 어머니의 익숙한 잔소리가 이어졌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니? 뭘 잘못했기에 이렇게 맞은 거야?"

어머니는 케간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에게서 멀어졌다.

그는 살갗에 닿은 어머니의 손길에 두려움과 어색한 따스함을 동시에 느끼며 몸을 떨었다. “마을에서 애들하고 씨름했어요, 엄마. 여자애들도 같이요."

어머니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아들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그건 씨름으로 생긴 상처가 아니야, 케간. 엄마는 바보가 아니란다."

"씨름이 끝나고 싸운 거예요. 그중 몇 명이 내가 이겼다고 앙심을 품었거든요." 그는 반쯤 마른 진흙이 덕지덕지 붙은 소매로 코를 닦았다.

약자가 도태되는 이 땅은 어머니같이 앙상하게 마른 여자에게 가혹한 곳이었다. 말 못 할 슬픈 일을 겪고 마법 때문에 사람들에게서 버림받은 어머니는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 고작 일곱 살이었던 케간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법사인 어머니의 피를 이어받은 케간은 감각이 예민한 아이였다.

그들의 거처인 동굴 입구에 서 있는 어머니를 올려다본 케간은 어머니의 눈에서 자신인 방금 느낀 생소한 감정인 부드러움을 느꼈다. 케간은 어머니가 털썩 앉아 자신을 안아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편으로는 불안하면서도 내심 어머니가 그래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어머니의 검은 눈동자는 차가웠다.

"애들을 건드리지 말라고 하지 않았니? 네가 자꾸 그러면 마을 사람들이 널 미워하게 되고 우리가 사는 게 더 힘들어진단다."

"그치만 걔들이 먼저 싸움을 걸었어요."

그녀가 말을 멈추고 반쯤 돌아서더니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눈빛만큼이나 어둡고 차가웠다. 어머니를 쳐다보는 케간의 눈은 옅은 녹색이었는데, 어머니는 종종 그 눈이 아버지의 눈을 닮았다고 말했다.

"보통은 네가 먼저 싸움을 걸잖니. 네 성질은 정말..."

"아니에요." 소년은 거짓말을 했다. “걔네가 시비를 걸 때도 있어요."

동굴 뒤쪽으로 간 어머니는 모닥불 옆에 쭈그리고 앉아 엘누크 비계를 끓인 멀건 국물을 저었다. 그들이 앞으로 사흘은 먹을 저녁이었다. "너나 내 피와 숨결에는 마법이 흐른단다. 넌 다른 아이들이 조심할 필요가 없는 것들도 조심해야 해."

"그렇지만-"

"마을에서 말썽부리지 말아라. 마을 사람들이 많이 양보해서 우리가 여기 살 수 있는 거란다. 리간 장로님의 배려 덕분인 거지."

케간이 거리낌 없이 입을 놀렸다. "우린 바위 동굴에 살고 있잖아요. 우리한테 못되게 구는 사람들 치료해 주지 말아요. 우리 그냥 떠나요."

"함부로 말하지 말 거라. 내가 사람들을 치유하는 건 내게 그런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 머무는 건 갈 곳이 없어서야." 그녀가 달빛을 받아 끄트머리만 밝게 빛나는 시커먼 나무로 가득한 산비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너머로 가면 온 세상이 얼음과 눈으로 덮여 있단다. 거기서는 아무도 살지 못해. 마을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신경 쓰지 마. 말썽을 일으키지도 말고, 마법을 일으키려고 하지도 말아라."

소년은 동굴 가장자리에 선 채 말했다. "사람들이 날 욕하거나 때리면 나도 맞서 싸울 거예요. 난 엄마처럼 겁쟁이가 아니에요."

그다음에 일어난 일은 소년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이 되었다. 소년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고개를 숙이는 대신 작은 주먹을 꽉 쥐고 미간을 찌푸렸다.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소년은 어머니가 자신의 뺨을 때리거나 우시겠거니 생각했다. 어머니의 따귀는 약했지만 어째서인지 맞으면 한 시간은 얼얼했다. 어머니는 밤이 깊어 소년이 잠에 빠졌다고 생각할 때면 혼자 눈물을 삼키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소년은 어머니의 눈에서 두려움을 느꼈다.

"그 아비에 그 아들이구나." 어머니는 차분하게 또박또박 말했고, 그래서 더 끔찍했다. "널 보면 니 아비의 눈과 그가 한 짓이 아직도 생각난다. 이젠 험한 말까지 똑같이 하는구나".

소년은 놀람과 철없는 분노가 섞인 눈으로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절 그렇게 싫어하시는 건가요?"

그녀는 대답을 망설였다. 소년에게 그 망설임은 어떤 대답보다 큰 의미로 다가왔다. 어머니의 가냘픈 시신이 화장불에 재가 된 지 몇 년이 흐른 뒤에도 그는 그때 그 망설임을 기억했다.


소년이 즈반나와 처음 만난 건 열세 살 때였다. 즈반나의 부족은 원래 황야를 떠돌던 유목민 부족이었는데, 한 세대를 거치면서 수가 줄어 이십여 명만 살아남았다. 이들은 다른 부족처럼 약탈에 의존하지 않고 리간 유역의 풍족한 어촌에 정착했다. 이들의 손재주와 사냥 기술은 마음 사람들에게 보탬이 되었다.

케간은 어느 날 해가 질 무렵에 즈반나를 만났다. 그때 그는 남쪽 언덕에서 야생화와 약초를 캐 줄기에서 가시를 떼고 수사슴 가죽으로 만든 가방에 넣는 중이었다. 원래 천천히 조심스럽게 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급하게 하는 바람에 손가락이 수백 군데도 더 찔렸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드니 즈반나가 있었다.

소년은 하던 일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쓰라린 손에 잔뜩 묻은 흙을 털어냈다. 소년의 잘생긴 얼굴은 호기심과 당황스러움에 소녀를 경계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소년 자신은 이를 알 길이 없었다. 어머니도 그에게 세상 모두에 복수하겠다는 표정으로 노려보지만 않는다면 잘생긴 얼굴이라고 한 적이 있었다.

"넌 누구지?" 그가 물었다.

질문을 받은 소녀는 움찔했다. 소년의 귀에도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그게... 네가 마을에 새로 온 사람이라는 건 알겠는데, 이름이 뭐야? 여기서 뭐 하는 거지? 길을 잃었어?"

소년은 쉴 새 없이 질문을 퍼부었다. 소녀는 소년보다 기껏해야 한두 살 위로 보였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눈이 큰 소녀는 두꺼운 털외투에 푹 파묻힌 채로 소년을 마주 보며 생쥐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치료사 아줌마 아들이니?"

소년이 이를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지만 기쁘지 않았다. 처음으로 마을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험담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쓰렸다. 그 소녀도 마을에서 그 끔찍한 소문을 수백 번은 들었을 것이다.

"케간이라고 해." 소년은 침을 삼키고 최대한 부드럽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치료사의 아들이야. 넌 누구니?"

"난 즈반나야. 아빠가 편찮으셔. 좀 와줄래?"

케간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는 행여 소녀가 놀라 달아날까 봐 목소리를 낮추어서 말했다.

"난 치료사가 아니야. 우리 엄마가 치료사지. 난 그냥 엄마를 돕고 있어." 말을 마치자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후련했다.

"너희 엄마가 마을로 오는 중인데, 필요한 약초가 네게 있다며 널 찾아오라고 하셨어." 소녀가 말했다.

케간은 약초가방을 메며 속으로 욕을 했다. 소년은 검은 흙과 자갈을 사뿐히 밟으며 소녀에게 다가갔다. "지금 갈게. 너희 아버지는 뭐 하는 분이야? 어디가 아프셔?"

"우리 아빤 돛 만드는 사람이야." 즈반나가 대답하며 마을로 앞장섰다. "물도 못 마시고 음식도 못 드셔. 배가 아프시대."

"우리 엄마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아실 거야." 케간이 즈반나를 따라 마을 쪽으로 산비탈을 내려가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그녀가 자신을 흘끗 쳐다볼 때마다 가슴이 뜨끔하며 그녀가 마을 아이들에게서 무슨 소리를 들었을지 궁금해 했다.

하지만 궁금증은 오래 가지 않았다. 소녀가 악의 없이 부드럽게 말했다.

"리간 장로님이 너보고 약탈자의 자식이래."

땅거미가 깔리자 두 사람 주변이 컴컴하게 변했다. 케간은 아무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 말이 맞아."

"그럼 정말 넌 불운을 가져오니? 전설에 나오는 것처럼?"

"어떤 전설을 믿냐에 따라 다르지..." 케간은 제법 재치 있게 빠져나갔다고 생각했지만 잠시 뒤 소녀가 그의 대답을 비틀어 다시 물어보았다.

"넌 어떤 전설을 믿는데?" 소녀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석양에 비친 부드러운 소녀의 눈빛이 그의 가슴을 후볐다.

'전설 따위는 믿지 않아. 그건 다 진짜 마법을 두려워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지어낸 거야.' 케간은 속으로 말했다.

"글쎄."

소녀는 그 말에 반응하지 않고 대신 다른 질문을 했다.

"너희 엄마는 치료사인데 왜 넌 아니야?"

'난 마법을 부를 줄 모르거든.' 하마터면 그대로 내뱉을 뻔했지만 더 좋은 답을 생각해냈다. "난 전사가 되고 싶으니까."

즈반나는 얼음으로 뒤덮인 바위 위를 가볍게 걸으며 쭉 앞장서서 걸었다. "하지만 여기는 전사가 없잖아. 사냥꾼뿐이야."

"그래도 난 전사가 되고 싶어."

"마을 사람들에게는 전사보다는 치료사가 더 필요해." 소녀가 지적했다.

"그래?" 케간은 덤불에 침을 뱉었다. "그럼 왜 주술사는 친구가 없지?"

케간은 답을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사람들이 자신을 두려워한다고 지겹도록 말했다.

하지만 즈반나의 대답은 달랐다.

"아빠를 도와주면 친구가 되어줄게."


케간이 에라크의 턱을 부순 건 열여섯 살 때였다. 나이에 비해 몸집도 힘도 어른 같았던 케간은 자신의 주장을 내세울 때 말보다 주먹이 앞섰다. 어머니는 싸우지 말라고 몇 번이나 다그쳤고, 즈반나도 마찬가지였다.

오죽했으면 즈반나도 어머니와 같은 말투로 "네 성질은 정말..."이라고 했을까.

그가 열여섯 살이 되던 해, 마을에서 동지 축제가 열렸다. 멀리 남서쪽에 있는 발라 분지에서 온 상단과 세 명의 악사들 덕분에 예년보다 더 떠들썩했다. 해안에서는 서약식이 있었다. 여기저기서 열렬하고도 어리숙한 구애와 함께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다. 젊은 전사들은 불춤을 추며 옆에서 지켜보는 처녀들의 환심을 샀다. 가슴이 찢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는 사람도 있었고 원한이 생긴 사람도, 원한을 푼 사람도 있었다. 사람들은 약혼 문제, 재산, 명예를 놓고 싸웠다. 술도 풍족해 축제 분위기가 더해졌다.

다음 날 차가운 새벽이 되어 숙취가 조금씩 가시고 땅에 쌓인 눈이 또렷하게 보이자 어제 일을 후회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케간과 에라크의 싸움은 달랐다.

불춤으로 땀에 흠뻑 젖은 케간은 해안선을 따라 즈반나를 찾았다. 케간은 그녀가 자신의 춤은 보았는지, 자신의 거친 춤사위를 따라오지 못한 다른 청년들이 헉헉대는 모습을 보았는지 궁금했다.

케간의 어머니는 바다표범 가죽 망토를 두른 막대기 같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지저분했고 장신구와 뼈 부적이 엮인 더러운 줄이 두뺨에 붙어 있었다. 그녀는 아들의 손목을 잡았다. 동지 축제는 그들 모자가 마을에 내려와도 되는 얼마 안 되는 날이어서 아들과 함께 마을로 내려온 것이다.

"즈반나는 어디 있어요?" 그가 물었다.

"흥분하지 마, 케간." 어머니가 그의 손목을 잡으며 주의를 주었다.

케간은 불꽃의 열기도, 피부를 타고 흐르는 땀도 느끼지 못했다. 피가 차갑게 식었고 뼈는 얼음 같았다.

"즈반나는 어디에 있냐고요?" 그가 이번에는 으르렁거리듯 물었다.

그의 어머니가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지만 들을 필요도 없었다. 이미 알아챈 것이다. 서서히 올라오던 분노와 함께 찰나의 직감이 발동한 것일 수도, 훗날 스승이 말 한대로 그의 몸에 잠들어 있던 마법이 준 지혜였을 수도 있었다.

진실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그는 어머니를 밀치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젊은 부부들이 겨울꽃으로 엮은 화환을 쓰고 가족들 앞에서 평생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겠노라고 약속하고 있었다.

케간이 다가오자 군중 속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가 사람들을 밀치며 지나가자 웅성거림이 증오와 비난으로 바뀌었지만 그 역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늦지 않았고 그걸로 족했다. 아직 시간이 있었다.

"즈반나!"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이 케간을 쳐다봤지만 그에게는 즈반나의 눈길만이 중요했다. 케간은 자신의 표정을 본 즈반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시는 걸 보았다. 그녀의 머리에 놓인 하얀 겨울꽃이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과 대비되었다. 케간은 즈반나의 머리에 놓인 화환을 집어 던지고 싶었다.

즈반나의 옆에 있던 젊은이가 그녀를 보호하려는 듯 움직이자 즈반나가 그를 말리며 케간과 대면했다.

"이러지 마, 케간. 아버지가 주선하신 거야. 내가 원했다면 거절할 수도 있었어. 이번만큼은 제발 참아."

"하지만 넌 내 거잖아."

케간이 팔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즈반나는 피할 틈도 없이 손을 잡혔다. 손을 피했다가는 케간이 불같이 화를 낼까 봐 그냥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난 네 물건이 아니야."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들의 모습은 마치 많은 이들에 둘러싸여 신들에게 평생을 약속하는 연인 같았다. "난 말비르의 서약을 받아들이기로 했어."

그다음에 일어난 일만 아니었다면 케간은 얌전하게 물러날 생각이었다. 여태 온갖 수모를 견딘 케간에게 잠시 스치는 수치심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케간은 바로 자리를 뜰 수도 있었다. 심지어 그가 어서 사라지기만을 바라는 마을 사람들을 무시하고 웃으며 그녀의 결혼을 축하해 줄 수도 있었다.

쉽지는 않았겠지만 즈반나를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었다.

케간은 잡았던 손을 놓았다. 떨떠름한 미소를 지으며 사과하려던 순간 손 하나가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 애를 내버려 두거라."

늙은 리간의 쉰 목소리가 침묵을 갈랐다. 리간은 이 마을을 세운 사람이자 세상보다도 늙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는 칠십을 넘어 팔십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어깨를 짓누른 건 그의 손이 아니었지만, 그의 말에 남자들이 케간을 에워쌌다.

"언제까지 우릴 괴롭힐 생각이냐. 썩 꺼져라, 이 약탈자의 자식아."

어깨를 누르던 손이 케간을 끌어내려고 했지만 케간은 꿋꿋이 버티며 서 있었다. 케간은 소년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어른만큼 힘이 셌다.

"내 몸에 손대지 마." 그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의 표정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즈반나가 뒤로 물러섰다. 다른 사람들이 가세해 그를 끌어내자 케간이 비틀거렸다.

언제나 그랬듯, 본능이 케간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케간은 몸을 돌려 괴성을 지르며 그를 끌어내려는 무리 중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주먹을 날렸다.

턱이 깨진 즈반나의 아버지가 흐느적거리며 쓰러졌다.

케간은 그 자리를 떠났다. 그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욕지거리를 퍼붓는 사람은 있었지만 그의 앞을 막아서거나 쫓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케간은 이에 만족감을 넘어 뿌듯함마저 느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케간은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눈알에 힘을 주고 이리저리 굴렸다. 얼얼한 주먹에서 전해오는 감미로운 고통이 그의 마음을 진정시켰다.


케간이 열아홉 살이 되던 해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케간은 시신을 화장하고 다음 날 아침 리간 유역이 내려다보이는 산비탈에 유골을 뿌렸다. 어머니는 마을에 헌신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케간은 아무도 장례를 찾지 않을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마을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귀한 존재였지만 동시에 두려운 존재이기도 했다.

하지만 거친 바람에 어머니의 유골을 뿌리고 바다표범 자매에게 기도를 올릴 때 그의 옆을 지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케간은 마을 사람들의 반응이 어떨지 상상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에 보일 반응은 자신들이 겪을 고통을 걱정하는 이기심과 근심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죽은 치료사의 아들이 나서기를 바랄 수는 없을 터였다. 어머니가 약탈자의 아들을 낳았을 때 그 피에 불행이 섞여들었으니 치료사의 대가 끊긴 것이다.

마을 사람들 모두 지금쯤이면 무의미한 감상에 젖어 푸념하거나 어쩌면 생전에 어머니에게 저지른 짓거리에 대한 죄책감을 잊기 위해 늦게나마 몇 마디 덕담을 늘어놓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보다 자신들의 삶에서 저주의 그림자가 사라졌다며 조용히 축하하고 있을 것이다.

'하나같이 미신이나 믿는 미개한 종자들.'

마을에서 케간을 찾아온 사람은 셋뿐이었고 그나마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려고 온 것이 아니었다. 외로운 장례식이 끝난 후 즈반나가 찾아왔다. 즈반나를 닮아 머리카락이 검은 그녀의 세 살배기 아들은 케간 근처로 오지 않으려고 했다. 아이는 약간 떨어진 곳에서 아버지와 함께 기다렸다.

"애가 날 무서워하나 봐." 케간이 무심하게 아이를 바라봤다.

즈반나는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진실을 말하기 전 머뭇거렸다. "마을에서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 그래."

"그랬겠지." 케간은 목소리에 아무런 감정도 싣지 않으려고 애썼다. "여긴 왜 온 거야?"

즈반나가 케간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어머님 일은 정말 안됐어, 케간. 친절한 분이었는데."

케간은 어머니를 친절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지금은 그런 일로 말다툼을 할 때가 아니었다. "그랬지. 근데 그 이야기를 하러 온 거야? 한때 친구로서 나한테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그녀가 미소를 띠지 않은 채 대답했다. "리간 장로님이... 널 내쫓으실 거야."

케간은 뺨을 긁었다. 그날 너무 지쳐서 놀라움을 비롯해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리간이 그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물을 필요도 없었다. 마을에 드리운 저주의 그림자가 아직 하나 남아 있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그 그림자를 몰아낼 기회가 왔으니까.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이제 재수 없는 놈이 마을 근처를 기웃거리는 것도 못 보겠다 이거지." 그는 잿빛 흙에 침을 뱉었다. "적어도 어머니는 쓸모라도 있었지. 마법을 다룰 줄 알았으니까."

"유감이야, 케간."

몇 년 전, 그녀를 산비탈에서 만났을 때의 느낌이 잠시 들었다. 그녀는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케간의 분노를 누그러뜨렸고 그는 항상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며 그녀의 손을 잡으려는 충동을 참아야 했다.

"그만 가봐." 그가 중얼거리고는 말비르와 그의 아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들이 기다리잖아."

"어디로 가려고?" 그녀가 털가죽 외투를 여미며 물었다. "이제 뭘 할 거야?"

몇 해 전 어머니가 한 말이 머릿속을 울렸다. '저 너머로 가면 온 세상이 얼음과 눈으로 덮여 있단다. 거기서는 아무도 살지 못해.'

"아버지를 찾을 거야." 그가 대답했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케간은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의심과 공포를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그의 말이 진심일지도 모른다는 공포였다.

"진심은 아니겠지? 넌 아버지가 어느 지역의 어느 부족 출신인지도 모르잖아... 아무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찾겠다는 거야?"

"시도는 해 봐야지."

케간은 바닥에 또 침을 뱉으려는 충동을 억눌렀다. 불가능한 말일지라도 '나도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즈반나. 아마 저 너머 어딘가에서 얼어 죽겠지'라고 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지난 몇 년간 거의 말을 하지 않던 그녀가 그의 말에 반박하려고 하자 그가 머리를 저으며 말렸다. "떠나기 전에 보러 갈게. 그때 이야기하자. 내일 마을에 내려가서 식료품과 여행에 필요한 것들을 살 거야."

즈반나가 다시 머뭇거렸고 케간은 그 이유를 정확히 눈치챘다. 바람결에 실려온 영혼이 속삭임이라도 들은 것처럼.

"리간이 마을에 내려오지도 못하게 했겠지?" 그가 한숨을 쉬었다. 그의 말은 질문이나 추측이 아니었다. "물건을 사러 오는 것도 안 된다고 했겠지."

그녀는 그의 가슴에 작은 가방을 안겨주는 것으로 그것이 사실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건조한 식량과 즈반나의 가족이 챙겨줄 수 있었던 조잡한 여행 장비 정도겠지. 케간은 어색한 고마움에 몸서리쳤고 하마터면 그 선물을 받을 뻔했다.

하지만 그는 가방을 돌려주었다.

"난 괜찮아." 그가 다짐하듯 말했다. "내 걱정은 하지 마. 난 괜찮을 거야."


그날 밤, 그는 홀로 리간 유역으로 내려갔다.

그는 등에 일주일 치 식량을 지고 손에는 상아로 만든 창을 들고 있었다. 머리카락에는 그의 어머니가 쓰던 뼈 부적이 엮어져 있었다. 몸집은 우람했고 몸놀림은 민첩했지만, 그의 어머니처럼 행색이 꼭 떠돌이 주술사 같았다.

세 시간 뒤면 동이 틀 것이다. 지금은 하루 중 가장 고요한 시간이었다. 케간은 흙으로 지은 마을 사람들의 집 사이를 과장돼 보일 정도로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짧고 거친 삶 내내 그와 그의 어머니를 거부했던 사람들이 사는 집이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마을 사람들에게 적개심을 느끼지 않았다. 대신 묵은 분노가 잉걸불이 되어 마음 한 켠에서 작게 타고 있었다. 그가 마을 사람들에게 느끼는 감정은 마음 깊이 새겨진 지긋지긋한 연민이었다. 그들은 오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딱한 사람들이었다.

그의 진정한 분노는 딱 한 사람을 향한 것이었다.

리간 장로의 집은 마을 중앙에 당당히 자리 잡고 있었다. 케간은 지는 달이 만든 그림자 사이를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무심한 보초의 눈길을 피해 집으로 다가갔다. 불침번은 워낙 따분한 일이어서 규칙을 제대로 지키는 이가 없었다. 주변이 허허벌판 아니면 바다인 마을을 누가 노린단 말인가? 약탈자들의 배가 리간 유역에 나타난 것도 아주 오래전 이야기였다.

케간은 집 안으로 조용히 들어갔다.


잠에서 깬 리간은 침대 맡에 쭈그려 앉은 그림자를 보았다. 그림자의 창백한 눈에는 달빛이 살짝 반사되어 보였고 그림자의 손에는 상아로 만든 칼이 쥐어져 있었다. 며칠 전에 죽은 주술사 크레지아 로디가 가지고 다니던 의식용 단검이었다. 제물을 바칠 때 쓰는 칼이라고 했다.

그림자가 미소를 짓더니 낮고 거칠게 속삭였다.

"내 허락 없이 찍 소리라도 내면 죽는다, 늙은이."

사물을 거의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본 리간은 백 살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등불의 기름 냄새와 침입자가 풍기는 짐승 땀 같은 냄새가 리간의 코를 찔렀다. 리간은 무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자가 가까워지자 어둠 속에서 음흉한 미소를 띤 케간의 얼굴이 보였다. 케간의 표정은 차가웠지만 이 상황을 즐기는 듯했다.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으면 얌전히 듣는 게 좋을 거야."

드류바스크 이빨을 깎아 만든 단검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 케간은 날카롭게 갈아 만든 칼끝으로 리간을 위협했다.

"알았으면 고개를 끄덕여."

리간은 현명하게도 입을 열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좋아." 케간은 단검을 거두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증오의 눈물이 맺혔고 그의 이는 분노를 참지 못한 듯 잘게 떨렸다. 금방이라도 흉포한 짐승으로 돌변할 것 같았지만, 일말의 인간성 덕분에 간신히 참는 듯 보였다.

리간은 아무 말 없이 침을 꿀꺽 삼켰다. 리간도 몸을 떨고 있었는데, 케간과는 분명 다른 이유였다.

"당신이 내 어머니를 죽였어." 케간이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어머니는 병 때문에 시름시름 앓다 돌아가신 게 아니야. 당신의 오해와 배은망덕에 서서히 죽어간 거지. 네가 어머니를 차가운 동굴로 내쫓았기 때문에 돌아가신 거야. 네가 믿은 어리석은 미신 때문에 돌아가신 거라고."

케간은 리간의 뺨에 단검을 대었다. 언제라도 그을 준비가 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이제는 날 죽이려 하지." 케간이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내 아버지의 피 때문에 날 비난하고 내가 불행을 가져온다고 저주하는 것으로는 모자라나 보지. 당신의 소중한 마을에서 꼬마애를 내쫓고 그 어린 마음에 증오심을 심어준 것만으로는 모자란 거야. 어머니를 화장한 불이 아직 꺼지지도 않았는데 이젠 내가 황무지를 떠돌다 죽길 바라다니."

그리고는 단검을 거두었다.

침입자는 침대 맡을 떠나 방을 가로질러 나갔다. 케간은 크게 웃었지만, 침대 맡 탁자에서 집어 든 등불은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 미소는 보일 듯 말 듯 했다.

"하고 싶은 말은 다 했어. 이제 내가 사라지면 내가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봐. 어머니와 함께 추위에 떨도록 내친 아이를 생각해보란 말이지."

리간은 어찌해야 될지 몰랐다. 치료사의 아들이 대꾸를 원하는지조차도 알 수 없었다. 리간은 지혜와 공포가 적당히 섞인 침묵으로 일관했다. 방에서는 기름 냄새가 진동했다.

케간이 등불의 겉막이를 벗기자 방 안이 환해졌다. 끈적한 물질이 바닥과 벽, 찬장, 심지어 이불까지 덕지덕지 발라져 있었다. 침입자가 그를 깨우기 전에 미리 손을 쓴 것이다.

"자- 잠깐." 노인이 공포에 질려 말을 더듬었다. "잠깐만-"

"갈 길이 멀어서 말이야." 케간은 평범한 대화를 나누듯 말했다. "그리고 떠나기 전에 손을 좀 녹여야겠어. 그럼 이만."

"잠깐, 기다려!"

케간은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문 쪽으로 물러나 작별 선물을 주듯 등불을 던졌다. 거친 침실 바닥에 떨어진 등불이 산산이 조각났다.

불은 순식간에 방을 집어삼켰고, 케간은 자신의 얼굴에 불이 닿았는지도 모른 채 웃고 있었다.


불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이 탐욕스럽고 게걸스럽다. 욕망이 가득하고, 변덕스러우며, 인간의 운명처럼 장난기가 가득하다. 불은 장로의 집을 부드럽게 핥고는 프렐요드의 매서운 바람을 타고 근처 집의 지붕으로 번졌다. 불은 닿는 곳마다 부수고 집어삼켰다.

케간은 자신이 일으킨 참상을 보지 못한 채 북쪽 저지대에 있는 숲으로 곧장 갔다. 그에게는 리간 장로의 집이 전소될 때까지 지켜보는 일보다 더 급한 일이 있었다. 얼굴 왼쪽을 뒤덮은 화상이 지독한 통증이 일으켰다. 통증은 눈 덮인 바닥에 얼굴을 댈 때만 가라앉았다.

케간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정말 자신이 불행을 가져오는 존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마을이 내려다보일 정도로 높은 곳에 이른 케간은 몸을 돌려 마을을 바라봤다. 태양이 바다 위로 고개를 내밀고 불길은 짙은 연기로 변해 잔잔한 아침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며 흩어졌다. 케간은 뺨에 한 움큼 얼음을 대며 까맣게 타버린 리간의 집을 찾기 위해 마을 중앙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케간은 질겁했다. 자신의 부주의로 일어난 충격적인 장면에 말문이 막힌 케간은 비틀거리며 마을로 되돌아갔다.

처음에는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생존자들은 뼈대만 남은 집 사이를 돌아다녔다. 그들은 모든 것을 잃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그는 그저 연기 사이를 헤매는, 화상을 입은 생존자 중 한 명에 불과했다.

케간은 시커멓게 탄 집 앞에서 즈반나를 찾아냈다. 즈반나와 그녀의 가족은 숯이 된 이불을 덮고 말없이 누워있었다. 머리가 멍하고 힘이 쭉 빠진 그는 한동안 그들 곁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화상을 입은 뺨을 타고 흐르는 짭짤한 액체가 느껴지긴 했지만, 자신이 울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케간이 즈반나 옆에 있는 동안 또렷하게 기억하는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불에 탄 이불을 들치고 그들의 얼굴을 확인한 것이다. 분명 즈반나의 가족이었다. 그는 얼굴을 확인한 다음 이불을 다시 덮었다.

다른 기억은 그가 장갑을 벗고 불에 탄 이불에 손을 올리고는 어머니의 마법을 부릴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이었다. 하지만 여느 때처럼 그에 피에 흐르고 있다는 마법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깨어나지 않았고 케간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쯤 지났을까. 마을 사람들이 그에게 다가왔다. 케간은 그들이 자신과, 자신이 몰고 온 불행, 핏줄에 저주를 퍼붓는 동안에도 즈반나의 곁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케간은 그들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을 뿐이었다. 마음의 공허함과 얼굴이 녹아내리는 듯한 통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생존자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미신을 믿는 그들은 그저 누구를 비난해야 할지 몰라 케간을 비난했지, 그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전에도 케간의 행실이 아니라 케간의 피를 비난한 사람들이었다.

케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잿더미가 된 마을을 떠났다. 그는 계획한 대로 황야로 발걸음을 옮겼지만, 기대했던 의기양양함은 없고 입안에 텁텁함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는 그 뒤로 몇 주를 떠돌았다. 케간은 짐승이 지나간 자취와 무역로 흔적을 따라 내륙으로 향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랐고 어디에 어떤 마을이 있는지도 몰랐다. 그가 잘 알고 있는 지역은 기껏해야 어머니가 약을 만들 때 필요한 약초가 자라는 외딴 공터나 산자락뿐이었다. 가장 가까운 정착촌인 발라 분지까지 몇 주는 더 가야 했고, 그곳은 리간 유역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정착했을 것이 뻔했다. 케간이 그곳에 도착한다 하더라도 따듯한 환대가 아니라 죽음이 기다릴 터였다.

그는 사냥을 하기도 했지만 소질은 없었다. 한번은 반쯤 익은 토끼를 허겁지겁 먹었는데 몇 시간 후 다 토해내기도 했다.

며칠이 몇 주가 되고 몇 주가 한 달이 되고 몇 달이 되었다. 하늘이 어둑어둑하고 눈보라가 몰아친 어느 날이었다. 부족민이나 마을의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몰아치는 세찬 눈발을 헤치며 몇 시간을 헤맸고 추위에 반쯤 정신이 나가기도 했다. 매일 매일 그는 눈 덮인 벌판뿐인 고향 땅을 돌아다녔다. 프렐요드는 그가 캍바람에 죽든 살든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인간의 나약함과 하찮음을 느끼기에 여기보다 좋은 곳은 없었다.

행운인지 잔인한 운명의 장난인지 모르겠지만 케간은 어머니와 살던 동굴과 비슷한, 옅은 바위 사이에 난 동굴에 다다랐다. 그날 입은 화상과 추위로 쇠약해진 케간은 차가운 바위 바닥에 몸을 뉘었다. 살이 돌에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는 이 동굴에서 눈보라가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렸던 것일까, 아니면 죽음을 기다렸던 것일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날 밤, 자신의 스승이 될 사람을 만났다.

눈보라 속에서 한 남자가 나타나,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잔뜩 구부린 채 터벅터벅 다가왔다. 텁수룩한 수염은 온통 회색이었는데 나이를 먹어서가 아니라 바람에 날린 눈이 붙어서였다. 두건 밑으로 보이는 얼굴은 수척했고 눈은 묘한 무지개색으로 빛났다. 가장 이상한 건 문신이 새겨진 얼룩덜룩한 피부였다. 폭풍을 뚫고 나온 빛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점점 짙은 파란색으로 변했다.

나중에 불빛이 비치는 곳에서 자세히 보았을 때 그의 피부는 보라색이었다.

이들의 운명적인 만남은 음유시인의 노래나 옛이야기와는 정반대였다. 이들은 신비한 주문을 외우지도 않았고 계약을 맺지도 않았다. 케간의 눈앞에 나타난 남자는 그저 동굴 입구에 서서 시체처럼 누워있는 케간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이건..." 남자가 중얼거렸다. "도대체 뭐람?"

케간은 의식은 물론 감각마저도 오락가락한 상태였다. 케간이 겨우 쥐어짜듯 한 말은 눈앞의 사내가 영혼인지 환상인지 묻는 말이었다.

남자는 대답 대신 케간의 옆에 앉아 손을 내밀었다.

남자의 손에서 온기와 함께 간지러운 "생명"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 기운은 불처럼 뜨겁지는 않았지만, 케간의 몸을 부술 정도로 격렬하게 요동치며 그를 회복시켰다.

"난 유령이나 허깨비가 아니다." 남자가 말했다. "난 라이즈라고 한다. 그나저나 꼴이 말이 아니군. 네 이름은 무엇이냐?"


케간은 새벽이 한참 지나서야 눈에 붙은 모래를 비비며 일어났다. 그는 이미 일어나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서 명상하는 스승의 모습에 놀라지 않았다. 야만인 제자는 스승이 명상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하루에 한 시간 가만히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도대체 명상하는 이유가 뭘까? 스승은 자는 것도 아니고 깨어 있는 것도 아닌 해괴한 상태에서 무엇을 추구하는 걸까?

"일어났군." 스승이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잠을 설쳤느냐." 그가 덧붙였다. 으레 그렇듯 질문이 아니라 단정이었다.

케간은 재가 된 모닥불에 대고 한쪽 코를 풀며 투덜거렸다. "스승님은 눈을 감고 있는데 왜 자꾸 절 쳐다본다는 느낌이 들까요?"

"그건 네가 다른 사람이 있으면 불안해하기 때문이다. 그런 불안은 타인의 의도를 의심하게 하지."

케간이 다시 투덜댔다. "적당한 의심은 나쁘지 않습니다만."

그러자 스승은 명상하는 자세로 웃었다.

케간이 그 웃음에 발끈했다. "뭐가 그렇게 우스운가요?"

"네 녀석이 가끔 나와 같은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나도 너처럼 불신을 미덕으로 여기지. 네가 겪은 일을 생각해보면 네 잘못이라고 할 수도 없겠구나."

케간이 그를 쳐다보았다. '내 마음을 읽을 수 있나? 내 꿈이 보이나...?'

스승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 한 군데 꿈틀거리지도 않았다.

젊은 야만인 제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우두둑 소리를 내며 밤새 뻣뻣해진 몸을 풀었다. "어… 아침으로 마지막 남은 고깃국을 데울까요?"

"네가 그래도 막돼먹지는 않았구나. 그럼 장작을 모을 테냐, 마법을 쓸 테냐?"

스승의 이 유도 질문은 거의 꾸지람에 가까워 딱히 애를 써 대답을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장작이요. 마법은 나중에 시도해볼게요."

스승이 다시 웃으며 말했다. "그러려무나." 그의 웃음은 언제나 케간의 화를 돋우었다.

케간은 느긋하게 마른 나뭇가지를 모았다. 머릿속에서 지난 몇 주간 스승과 나눈 대화가 맴돌았다. 상처가 아물 때 가려운 것처럼 머릿속에서 뭔가가 간질간질했다. 그는 임시 야영지로 돌아와 나뭇가지 한 아름을 내려놓고서야 그게 뭔지 알아냈다.

"스승님."

스승은 몸을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들 주위의 공기가 변한 것 같았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주변 공기가 더 날카로워졌다. 어쩌면 더 차가워진 것일 수도 있었다.

"왜 그러느냐?"

케간이 헛기침을 하며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고민했다. "어제 마법에 관해 말씀하실 때 말입니다. 그... 창조의 기운이라는 것이 있다고 하셨죠?"

스승은 가만히 앉아 마법으로 시커메진 입술만 놀렸다. "그래, 그랬지."

케간은 숨을 삼키며 자신이 내뱉으려는 심오한 주제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니까, 물은 비나 얼음, 바다에서 나오잖아요? 불은 불꽃이나 부싯돌, 아니면 숲에 떨어진 번개에서 나오고, 숲을 이루는 나무는 씨앗에서 나오고요."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아침부터 꽤나 감상적인 말을 하는구나. 그래서, 네 가설의 결론은 무엇이냐?"

"제 뭐요?"

스승이 악의 없이 웃으며 말했다. "네가 하려는 말이 무엇이냐?"

"전 그냥 이 세상 모든 것에는 근원이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겁니다. 그것들은 다… 어디선가 태어나는 거죠. 마법도 그렇지 않을까요? 이 세상에 마법의 근원이 있나요?"

스승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순간 케간은 스승이 평온함을 느껴 움직이지 않는 게 아니라 일부러 움직이지 않으려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똑똑한 질문이구나. 네 원시적인 사고방식에는 순수함이 있어. 이번엔 칭찬해주마. 하지만 넌 그 주제를 논하기엔 아직 이르다."

야만인 제자는 이를 악물고 화를 삭였다. 드디어 쓸만한 질문을 했는데 스승이 대답을 거부한 것이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비를 다룰 수 있다면 새로운 강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씨앗 수천 개가 있다면 새로운 숲을 만들 수 있겠죠. 철이 있다면 도끼를 만들 수 있을 것이고 마법의 근원을 다룰 수 있다면 어떨까요? 그러면 마법을 인도하거나 유도할 필요가 없겠죠. 그냥 마법을 부릴 수 있을 테니까요."

스승이 마침내 눈을 떴다.

그의 눈은 프렐요드의 바람보다 차가웠다. 그의 눈에는 자비로움과 감탄이 서려 있었지만 더 밑에는 두려움이 깔려 있었다.

'스승이 두려워한다.' 케간은 그 생각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유는 몰랐다. 그가 한 말 중 무엇이 스승을 그렇게 두려워하도록 만들었는지 추측할 수 없었다. 하지만 평생 남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케간은 공포심에 질린 눈이 어떤지 잘 알고 있었다.

"아직은 이르다." 스승이 중얼거렸다. "넌 아직 이 이야기를 나눌 준비가 안 됐어."

케간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불안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스승에게 호기심을 느꼈다. 공포심이란 일종의 약점이고, 약점은 부딪혀야 한다.

그래야 극복할 수 있으니까.

3. 오랜 친구

온 몸이 긴장의 에너지로 불타고 있지 않았다면 라이즈는 차가운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날 짊어지게 된 무거운 부담 때문에 그는 프렐요드의 매서운 눈보라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굶주린 얼음 트롤의 울음소리도 무섭지 않았다. 그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즐겁지는 않지만 반드시 해야만 하는,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임무였다.


성문 앞에 다다르자 그를 검문하기 위해 군사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소나무 숲 사이로 그들의 털옷이 스치며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군사들은 몇 초 만에 성벽으로 올라가 창을 높이 올려 들고 진열을 갖췄다. 라이즈에게서 조금이라도 수상한 점을 찾으면 단숨에 처단할 태세였다.


“이아고를 만나러 왔다.” 외투에 달린 모자를 보랏빛 피부가 보일 만큼만 벗고 라이즈가 말했다. “급한 용무가 있다.”


결연한 표정으로 성벽 위에 서 있던 군사들은 룬 마법사를 보고 놀란 기색을 보였다. 그들은 아래로 내려 와 육중한 목재 성문을 열었다. 성문은 침입자의 등장에 걱정 어린 한숨을 쉬듯 끼익 소리를 냈다. 이 마을은 찾는 이가 별로 없었다. 있다 해도 외부인들에게 보내는 경고의 의미로 죽임을 당하곤 했다. 하지만 라이즈는 룬테라의 가장 적대적인 지역에 출입할 수 있을 정도로 드높은 명성을 갖추고 있었다.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겨우 몇 분이긴 하지만…


마을 주민들은 찬바람에 튼 얼굴로 그를 매섭게 노려보며 공격할 명분을 찾고 있었다. 라이즈는 그 사이를 담담한 표정으로 걸었다. 다섯 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 소년이 할머니 옆에서 라이즈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용기를 내어 다가왔다.


“주술사세요?” 소년이 물었다.


“뭐, 그렇게도 볼 수 있지.” 라이즈는 소년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성큼성큼 발을 내딛었다.


라이즈는 마을 뒤편으로 가는 길을 찾았다. 놀랍게도 마을은 수년 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달라진 점이 거의 없었다. 그는 수정처럼 빛나는 얼음 돔을 한눈에 알아 보고 그곳으로 향했다. 나무와 흙이 거의 전부인 이곳에서 푸른 얼음 돔은 단연 눈에 띄었다.


‘언제나 현명한 친구였지. 아마 협조해 줄 거야.’ 라이즈는 심호흡을 하고 사원 안으로 들어가며 생각했다.


사원 안에선 나이 든 마법사가 제단 위의 접시에 술을 따르고 있었다. 라이즈가 다가오자 그는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머릿속으로 라이즈에 대해 판단하고 있는 듯했다. 라이즈는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마법사의 얼굴에 이내 미소가 번졌고 그는 오래 전 잃어버린 형제를 만난 듯 라이즈를 꼭 안아주었다.


“너무 말라 보이네.” 마법사가 말했다. “뭘 좀 먹어야지.”


“자네는 먹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살짝 처진 이아고의 뱃살을 향해 고갯짓을 하며 라이즈가 답했다.


두 사람은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어제도 만났던 친구 사이처럼 편안해 보였다. 라이즈는 긴장이 천천히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이 세상에 별로 없었지만 어쩌다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 영혼이 충만해졌다. 두 사람은 한 시간 동안 추억을 떠올리고 식사를 하며 그동안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것이 얼마나 유쾌한 일인지 라이즈는 잊고 있었다. 이아고와는 술 한 잔과 함께 승리와 패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몇 주고 함께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어쩌다 프렐요드의 한복판까지 오게 되었나?” 이아고가 마침내 물었다.


그 물음에 라이즈는 퍼뜩 현실로 돌아왔다. 이 때를 대비해 철두철미하게 준비한 말들을 재빨리 기억해냈다. 슈리마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거의 하룻밤만에 소왕국 수준으로 보유 재산과 토지를 늘린 유목 민족을 조사하기 위해 라이즈는 슈리마에 갔었다. 자세히 들여다 보니 그들은 룬을 갖고 있었다. 라이즈가 추궁하자 그들은 저항을 했다. 그리고…


라이즈는 사원 안에 흐르는 정적만큼 조용히 목소리를 낮추었다. 세계가 무사하려면 지독한 짓을 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라고, 끔찍한 재앙이 일어나는 것보단 지독한 짓을 하는 편이 나을 때도 있다고 이아고에게 설명했다.


“룬은 안전하게 보관되어야 하네.” 라이즈가 마침내 결론을 말했다. “하나도 남김없이.”


이아고는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 사이에 돌아왔던 온기는 곧바로 증발해버렸다.


“룬은 트롤로부터 우리 마을을 보호하는 유일한 수단이네. 그걸 알면서도 가져가겠단 말인가?” 이아고가 물었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지 않았는가.” 라이즈는 어쩔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지난 긴 세월 동안 알고 있었겠지.”


“시간을 좀 더 주게. 봄이 되면 남쪽으로 내려갈걸세. 룬 없이 겨울을 어떻게 보내나?”


“자네는 전에도 그렇게 말했네.” 라이즈가 냉정하게 말했다.


이아고는 라이즈의 손을 잡고 정중하게 부탁했다. 의외의 반응이었다.


“이 마을엔 어린 아이가 많네. 뱃속에 아기를 품은 여인도 셋이나 있어. 그들을 전부 희생시킬 순 없잖나.”


“마을 인구가 어떻게 되나?” 라이즈가 물었다.


“모두 아흔 두 명일세.” 이아고가 답했다.


“그럼 세계 인구는?”


이아고가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은 못 기다리네. 룬을 차지하려고 어두운 세력이 모이고 있어. 이곳의 룬은 오늘 내가 가져가겠네.” 라이즈가 말했다.


“네 사리사욕을 위해 쓰려고?” 이아고가 시기 섞인 분노를 터뜨리며 말했다.


그의 얼굴은 전과 달리 험상궂은 적의 얼굴로 변해 있었다. 라이즈는 설명하기 시작했다. 룬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것을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룬을 사용하면 반드시 참혹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고. 하지만 격분한 이아고를 설득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라이즈는 돌연 극심한 고통을 느끼고 바닥에 쓰러져 침을 뚝뚝 흘리면서 몸부림쳤다. 위를 올려다보니 이아고가 사정거리에 서서 필멸자가 소유해서는 안 되는 힘을 손가락으로 내뿜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라이즈는 마력의 원을 만들어 이아고를 그 자리에 묶었고 그 틈을 타 두 발로 일어섰다.


라이즈와 이아고는 오랫동안 세상이 보지 못한 힘을 서로에게 발사하며 빙글빙글 돌았다. 이아고는 스무 개의 태양만큼 뜨거운 열기로 라이즈의 피부를 그을렸다. 라이즈는 강력한 마력으로 반격했다. 몇 시간 동안 이어진 마법 공격으로 인해 사원의 벽엔 구멍이 뚫렸고 급기야는 두툼한 얼음 돔이 무너지기에 이르렀다.


중상을 입은 라이즈는 잔해를 헤집고 밖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상처 입은 이아고가 잔해 속에서 꺼낸 자물통을 열려고 손을 더듬는 형상이 흐릿하게 보였다. 라이즈는 이아고의 두 눈 속에서 이글거리는 탐욕을 보고 이아고가 무엇을 꺼내려고 하는지, 그리고 이아고가 그것을 손에 넣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마법 에너지가 소진된 라이즈는 이아고의 등 위로 뛰어올라 자신의 겉옷에 있던 허리띠로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단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깊이 사랑했던 친구는 이제 끝마쳐야 하는 임무에 불과했다. 이아고는 있는 힘을 다해 발버둥쳤지만 이내 숨이 끊어졌다.


라이즈는 이아고의 목걸이에서 열쇠를 꺼내 자물통을 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따뜻한 주황색 빛을 발하며 고동치는 룬을 꺼냈다. 라이즈는 죽은 친구의 옷자락을 뜯어 룬을 감싸 가방 속에 조심스레 넣고는 절뚝거리며 사원 밖으로 나왔다. 또 한 명의 친구를 잃었다는 생각에 애통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룬 마법사 라이즈는 마을의 성벽을 향해 절뚝거리며 걸었다. 도착할 때 그를 지켜보았던 거친 얼굴들이 길가에 서 있었다. 라이즈는 공격을 예상하고 의심의 눈길을 보냈지만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마을 주민들의 사나운 방어태세는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 그들은 눈 앞에 닥친 종말에 망연자실한 힘 없는 백성일 뿐이었다. 그들은 무력한 큰 눈으로 라이즈를 바라보았다.


“이제 우린 어떡하죠?” 소년의 할머니가 물었다. 소년은 할머니의 털옷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나라면 떠날 겁니다.” 라이즈가 말했다.


떠나지 않으면 어두운 밤을 틈타 트롤이 마을을 습격하여 주민을 몰살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마을 밖엔 더 심각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같이 가면 안 돼요?” 소년이 물었다.


라이즈는 걸음을 멈췄다. 분별 없는 연민이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소리치고 있었다. 이 사람들을 데려가자고. 이 사람들을 보호하자고. 다른 세상 사람들은 그냥 잊어버리자고.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수북이 쌓인 프렐요드의 눈밭 속으로 그는 터덜터덜 걸어갔다. 남겨둔 이들의 얼굴은 다시 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죽은 거나 마찬가지인 사람들이니까. 그리고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을 구하러 가야 하므로...

4. 힘의 부름

5. 구 배경 1

룬테라에는 마법 연구나 최근 각광받고 있는 마법기계공학 분야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많다. 대부분은 전문대학이나 종합대학 같은 정규 교육을 통해 그런 지식을 배운다. 하지만 스승들보다도 오히려 더 룬테라의 마법에 순수하고 원초적인 유대를 느끼는 라이즈로서는 전통적인 학습 방법이 맞지 않았다. 젊은 라이즈는 자신을 부르는 소명을 따라서 홀로 공부했다. 발로란에서 배울 수 없던 것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은둔자와 마녀, 그리고 주술사든 가리지 않고 찾아다니며 지혜를 배우기 위해 전 세계를 떠돌아다녔다.

배울 수 있는 것을 다 섭렵한 다음에는 이미 자취를 감추거나 잊혀지고 금지된 지식을 찾아 다른 이들이 두려워하는 신비한 세계로 향했다. 라이즈는 끊임없이 마법에 대한 지식을 찾아 헤맸고 결국에는 가시 마법이라는 고대의 주문을 발견한다. 이 마법을 사용하려면 온 몸에 주문의 문신을 새겨넣어 거대한 신비의 힘을 몸 속으로 불어넣어야 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룬테라의 신비한 에너지와 혼연일체가 될 수가 있었다.

등에 짊어지고 다니는 거대하고 파괴할 수 없는 두루마리 또한 여행 중에 발견했다. 이 두루마리에 새겨진 주문의 용도는 라이즈만이 알고 있으며, 이 주문이 너무나 끔찍한 것이기 때문에 악용되지 않도록 자신이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이 많은 이들의 궁금증을 증폭시켰지만 두루마리를 라이즈에게서 떼어낼 방법도, 무서운 마법사에게 강제로 두루마리를 벗도록 만들 사람도 없었다.

이후 라이즈는 신비로운 룬테라의 비밀을 밝혀내고 마법 생물들과 리그를 위해 싸우는 챔피언들의 강력한 의지를 연구하기 위해 리그 오브 레전드에 합류했다.

"라이즈는 더 이상 보통 마법사가 아니다. 이제 마법 그 자체인 생명체가 되어버렸다."
-헤이원 렐리바시 상임의원

6. 구 배경 2

룬테라의 최고 마법사로 널리 알려진 라이즈는 산전수전을 겪으며 중차대한 임무를 수행하는 고대의 대마법사다. 가공할 마력과 무한한 체력을 보유한 그는, 태초에 무에서 세계를 창조한 원초적 마법의 파편인 룬을 찾기 위해 쉴 틈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고 있다. 룬이 룬테라에 어떤 참사를 일으킬 수 있는지 알고 있기에 라이즈는 룬이 잘못된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빠짐없이 찾아야만 한다.


세계 각지에 숨겨진 강력한 마법의 힘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라이즈는 젊은 청년이었다. 외교 임무 수행 중에 그는 스승 타이러스가 쭈글쭈글하게 늙은 어느 마법사와 이야기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그들은 ‘룬’이라는 물건의 잠재적 위험성에 대해 낮은 목소리로 논의하고 있었다. 라이즈가 듣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 타이러스는 항시 몸에 지니고 다니는 두루마리를 꼭 붙들고 서둘러 대화를 끝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룬 채굴이 늘어나면서 룬에 대한 지식도 확산되었다. 고대 문양인 룬의 위력을 알아내기 위해 전세계의 지식인들은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룬의 기원의 중요성이나 룬 속에 담긴 힘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일각에서는 룬이 룬테라의 탄생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추론해 냈다. 미지의 유물 룬이 처음으로 사용되었을 때 그 결과는 참담했다. 룬테라 내 모든 국가의 지형이 모조리 바뀌었기 때문이다. 룬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창조자의 위력’이 무기로 쓰일지 모른다는 우려가 생겨났고, 그에 따라 서로 간의 불신이 삽시간에 번져 나갔다.


타이러스와 라이즈는 만연한 공포감을 가라앉히고 룬 사용을 방지하기 위해 여러 나라를 방문했지만 임무를 성사시키기는 점점 더 어려워졌다. 끈질긴 노력 끝에 재앙을 여러 차례 막긴 했지만 라이즈는 스승의 근심이 날로 깊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두 전시 국가 사이를 중재하던 어느 날, 타이러스가 우려한 최악의 상황이 현실이 되었다. 양국 군대는 라이즈의 어릴 적 고향 크홈에서 멀지 않은 곳에 대치 중이었다. 양측 모두 상대국이 룬을 무기로 사용하려 했다고 주장했고 룬으로 방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양국 간의 긴장이 통제할 수 없을 만큼 고조되자 타이러스는 도저히 중재할 수 없는 싸움이란 걸 알게 되었다. 양측이 전쟁을 불사하는 상황에서 그는 제자와 함께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인근의 산맥을 반쯤 넘고 있을 때, 전투가 시작되었다. 라이즈는 발 밑에서 땅이 갑자기 꺼지는 것을 느꼈다. 땅이 요동치며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머리 위의 하늘은 치명상을 입은 듯 움츠러들었다. 타이러스가 그를 잡고 소리치며 지시사항을 말했지만 초자연적인 정적이 내려앉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 맞붙은 두 룬의 파괴력을 난생 처음으로 목격하고 있었다.


몇 초가 지나자 감각이 돌아왔다. 두 사람은 초토화된 근처 산봉우리로 기어 올라가 양국 군대가 대치했던 골짜기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말도 안 되는 참상이 펼쳐져 있었다. 물리적 원칙에 위배될 정도로 모든 것이 심각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군인과 백성은 물론, 토지마저 사라지고 없었다. 하루 거리에 떨어져 있던 바다는 이제 두 사람 쪽으로 몰아쳐 오고 있었다. 라이즈는 털썩 무릎을 꿇고 앉아 세상 한가운데에 뚫린 거대한 구멍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파괴되어 있었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의 정든 고향마저도.


이후 전쟁이 격화되면서 룬테라는 전 지역이 포화에 휩싸였다. 전쟁의 참상을 통해 룬의 위력을 깨달은 룬 보유자들 사이에선 공포가 확산됨과 동시에 침공도 빈번해졌다. 라이즈도 고향의 가족을 앗아간 것과 같은 재앙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전쟁에 뛰어들어 싸우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그의 손을 꼭 붙들고 타이러스는 복수는 더 많은 상처를 남길 뿐이라고 타일렀다. 라이즈는 스승의 말을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속에 담긴 지혜를 이내 받아들이게 되었다.


타이러스는 전세계를 다니며 룬 보유자들을 만나 협조를 구했다. 룬테라의 미래를 위해 모든 룬을 인간의 손에 닿지 않는 곳에 가두어 보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계 멸망의 위협이 목전에 다가오자 타이러스에게 룬을 넘긴 사람도 있었지만 룬 덕에 새로이 갖게 된 힘과 영향력을 포기하지 않으려 하는 사람도 있었다.


타이러스는 인류가 보유하고 있는 룬을 모두 찾아내기 위해 쉼 없이 일했다. 세계가 치유될 수 있다는 희망은 날로 커져 갔지만 그와 라이즈의 사이는 뜻밖에도 점점 더 소원해졌다. 타이러스가 조금씩 변해갔기 때문이다. 타이러스는 룬 수집이 아닌 다른 사소한 임무를 라이즈에게 맡기기 시작했다.


그런 사소한 임무를 수행하러 나간 어느 날, 라이즈는 끔찍한 대재앙이 또 한 차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번에는 이케시아 발로란 남서부였다. 라이즈는 스승이자 친구인 타이러스가 살아있길 기도하며 부리나케 현장으로 달려갔다. 도착하자 마자 라이즈는 타이러스가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 뛸 듯이 기뻐했다. 하지만 기쁨이 오래 가진 못했다. 라이즈가 단 한 번도 읽어 보지 못한 두루마리 옆에 두 개의 룬이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타이러스는 룬이 효력을 발한 이상 자신이 직접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라이즈는 타이러스가 단순히 재앙에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재앙을 일으킨 장본인이란 것을 깨닫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타이러스는 장황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무모한 어린 아이처럼 인류가 알지도 못하는 힘을 가지고 놀았다고...무지한 권력자들을 상대로 외교관 노릇만 할 수는 없었다고…직접 나서서 그들을 막아야 했다고…


라이즈는 타이러스가 정신을 차리도록 설득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어릴 적부터 존경해 마지않은 지혜로운 스승은 사라지고 없었다. 눈 앞의 사내는 자신이 폄하한 어리석은 이들만큼이나 쉽게 유혹에 흔들리는 불완전한 인간이었다. 룬으로 인해 뼛속까지 부패한 그는 룬을 쓰고 또 써서 세계를 시나브로 파괴할 것임이 분명했다.


하나뿐인 진정한 친구를 잃는 한이 있더라도 라이즈는 조치를 취해야 했다. 그는 갖고 있는 마법 에너지를 한데 모아 공격을 가했다. 타이러스는 룬만큼은 뺏기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룬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던 중 라이즈에게 순간 틈을 보이고 말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타이러스는 검게 그을린 주검이 되어 바닥에 쓰러졌다.


라이즈는 격한 감정에 휩싸여 덜덜 떨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는 영롱한 빛을 뿜으며 유혹하는 두 개의 룬 옆에 홀로 서 있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하나씩 룬을 집어 들자 온몸이 더욱 강력하게, 아니 더욱 끔찍하게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라이즈는 부르르 떨면서 룬을 놓아버리고 뒤로 물러섰다. ‘스승님처럼 강하고 청렴한 마법사까지 망가뜨린 룬을 내가 어떻게 다룬단 말인가?’ 하지만 그가 포기하면 다른 누군가가 룬을 찾아 사용할 것이 분명했다. 그 순간 라이즈는 자신의 임무가 얼마나 막중한지 깨달았다. 룬이 효력을 유지하는 이상 룬 전쟁은 계속되고 룬테라는 멸망할 터였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던 중, 타이러스가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던 두루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두루마리를 조심스레 펼치자 찬란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바로 그 때, 라이즈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날부터 라이즈는 보이지 않는 부름에 이끌려 세계를 떠돌기 시작했다. 라이즈에게 그 부름은 안내자인 동시에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는 룬의 유혹에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고 그 어떤 생명체도 접근할 수 없도록 비밀의 장소에 룬을 묶어 놓았다. 이 일을 하며 라이즈는 수 세기를 보냈고, 그 과정에서 흡수한 마법으로 인해 수명이 비정상적으로 길어졌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라이즈는 아직도 속도를 늦추지 못하고 있다. 룬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세상은 룬을 휘두른 대가를 이미 잊었기 때문이다.

6.1. 리그의 심판

원문 링크

후보: 라이즈
날짜: CLE 10년 9월 24일

관찰

라이즈가 대리석 복도로 성큼성큼 들어선다. 신중한 표정에 강인한 인상의 턱선이 두드러진다. 걸음걸이만큼이나 눈빛 역시 긴박하고 단호한 기색이 묻어난다. 여행자 같은 소박한 옷차림은, 여위었지만 강단 있는 몸을 한치도 빼놓지 않고 뱀처럼 휘감은 정교한 문신과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건장한 등에는 두루마리를 하나 걸쳤는데, 다루는 품을 봐서는 아주 소중한 물건인 것 같다. 손에 들고 있는 돋을새김의 주문책이나 허리춤에 달려 있는 양피지 조각들도, 등에 걸친 두루마리만큼 경건하게 다루는 기색은 아니다. 한 쌍의 문이 있는 아치형 입구 아래에 잠시 멈춘 라이즈는 거기 새겨진 글을 읽는다. "진정한 적은 그대 안에 있나니." 방랑 마법사는 손을 뻗어 문을 열고 대담하게 안으로 들어선다.


회고

라이즈는 어둠 속에서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침착하게 서서 기다렸다. 공기 중에 떠도는 냄새를 맡아보니, 분명 어떤 존재가 느껴졌다… 분명 유령은 아니었다.

"손님인가?"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상하네. 난 불청객이라면 질색인데 말야!"

온 몸의 근육이 마치 용수철처럼 팽팽하게 긴장했다. 어둠 속에서 느슨한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여인의 나긋나긋한 자태가 드러났다. 그런데 목덜미에서부터 손가락 끝까지, 온 몸이 문신으로 뒤덮여 있지 않은가.

"릴리스?" 숨이 턱 막혀서 간신히 말을 뱉어냈다. "어떻게 날 찾아낸 겁니까?"

릴리스는 가냘픈 손을 뻗어 라이즈의 드러난 가슴팍을 기다란 손톱으로 가볍게 쓸어 내렸다.

"라이즈." 교태 어린 목소리였다. "넌 나한테서 숨을 수 없어." 가까이 다가와 라이즈를 끌어안은 그녀는 "비밀이 하나 있는데."라며 뺨에 바싹 다가붙으며 속삭이는가 싶더니, 돌연 "절대 놓아주지 않을 거라고!"라고 소리지르며 도발적으로 라이즈의 귓불을 깨물었다. 라이즈는 몸이 부르르 떨렸다.

가볍게 물린 귓불에 문득 예리한 통증이 느껴졌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휘청이며 땅에 고꾸라지던 라이즈는 반사적으로 아무 그림도 새겨지지 않은 깨끗한 손을 뻗었다. 이게 내 손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맨 살을 보지 못한 지도 이미 몇 년이나 흐르지 않았던가.

"침입자!" 릴리스가 거칠게 내뱉았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라이즈는 스산한 오두막집의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현관을 가까스로 디디고 서며 말했다. "너무 지쳐, 오늘 밤 몸을 누일 곳을 찾고 있었습니다. 울부짖는 늪은 어둠이 내린 후엔 있을 데가 못 돼서요."

"내 집에 구역질 나는 나그네를 들일 생각은 없어." 완강하게 팔짱을 끼며 릴리스가 대답했다. 산들바람이 불어와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조소하듯, 라이즈는 말했다. "저를 우습게 보지는 마십시오. 전…"

"우습다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을 끊더니, 릴리스가 손가락을 뻗었다. 팔을 따라 새겨진 문양에서 에너지가 새어 나와 둘 사이를 가로질렀다. 처음에는 가벼운 충격이 왔지만, 곧 폐에서 공기가 확 빠져 나오며 라이즈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정신이 들고 보니, 진흙탕에 드러누운 채 헐떡거리고 있었다. 온 몸이 얼얼했고 머리부터 발 끝까지 덜덜 떨렸다.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는 릴리스의 석양을 등진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문신을 아로새긴 염료를 따라 에너지는 여전히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내가 예의를 좀 가르쳐 주겠어, 이 부랑자야." 이제 차분해진 목소리로 릴리스가 말을 이었다.

"부탁입니다, 아가씨." 숨을 몰아 쉬며 라이즈는 말했다.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릴리스가 코가 닿을 만큼 아주 가까이 몸을 기울이자, 라이즈의 얼굴 위로 그녀의 머리카락이 쏟아져 내렸다. 라이즈의 가슴을 덮은 셔츠 위로 릴리스의 손톱이 파고들었다. "이 귀여운 것, 왜지? 왜 널 살려두어야 하는데?"

날카롭게 가슴을 파고 드는 고통에 라이즈는 숨을 훅 들이켰다. "한 평생을 당신을 찾아 헤매왔어요." 더듬거리며, 그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지금 죽게 된다면, 가슴이 찢어질 겁니다."

릴리스가 약간 몸을 들어 앉더니 미소를 지었다. "재밌는데." 대답을 듣자마자, 라이즈는 기운이 쇠진하여 의식을 잃고 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땐 푹신한 매트리스에 대자로 뻗고 엎드린 채였다. 움직여 보려 했지만 단단히 묶여 있어 아무 소용도 없었다. 옆에 있는 베개에는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가시들과 보랏빛 액체가 담긴 그릇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일찍도 일어나셨군." 릴리스가 구슬로 된 커튼을 들추고 들어오며 교태를 부리듯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침대 위로 올라와 라이즈의 등허리를 타고 앉았다. "말해 봐, 방랑자." 준비해 둔 도구에 손을 뻗으며 빈정댔다. "내 어디에 그렇게 반한 건데?" 그러면서 가시 촉을 잉크 그릇 깊숙이 담갔다.

"어렸을 때부터 마법을 공부해 왔습니다." 라이즈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간신히 말했다. 목 뒤쪽에 찌릿하는 통증이 오자, 자연히 몸이 움찔거렸다.

"꿈틀대지마!" 릴리스가 어깨를 찰싹, 소리 나게 때리며 버럭 소리질렀다. 라이즈는 이를 악물고 참아냈으나 고통은 멈추지 않았다. 피비린내 나는 작업이 이어질수록, 타는 듯한 감각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제 스승님께서는 항상 인내하라고, 자기 자신을 제어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또 제 감정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고도 말씀하셨죠." 릴리스가 이제 바늘을 바꿨다. 벌어진 상처에 피와 잉크가 고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 분들은 저를 골칫덩이 취급했고, 급기야는 더 이상 가르쳐주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당신은 다른 방법을 아니까요."

"사기꾼들." 릴리스가 내뱉듯 말하더니, 드레스 자락으로 라이즈의 등을 타고 흐르는 피를 훔쳐 냈다. 그녀가 몸을 굽히자 뜨거운 숨결이 목에 느껴졌다. 속삭임이 들려 왔다. "하지만 우리가 더 잘 알잖아, 안 그래? 마법은 에너지야. 열정, 황홀경, 그리고 분노 그 자체지. 그런 것들이 우리의 힘을 이끌어내는 거고." 그녀가 입술을 핥았다. "내가 방법을 알려주지."

이윽고 릴리스는 라이즈를 자유롭게 풀어 주었다. "이제 돌아 누워." 다른 바늘을 손가락 사이에 살짝 쥐고서, 그녀가 쏘아 붙였다. "아직 안 끝났어."

몸이 고통으로 욱신댔지만, 라이즈는 마지못해 그 말에 따랐다. 저 위 서까래에 융단보다도 커다란 양피지로 만든 정교한 두루마리가 걸쳐져 있었다. "저게 뭡니까?" 문득 정신을 차린 라이즈가 질문을 던졌다.

릴리스의 얼굴이 돌연 사색이 되더니, 방이 어둠으로 물들어 갔다. "네가 훔쳐 갔지!" 팔을 마구 흔들며, 악을 쓰는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이 배신자! 배신자!" 릴리스가 여남은 번이나 때린 후에야 라이즈는 그녀를 붙들어 말릴 수가 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라이즈가 울부짖었다. "내 말을 안 듣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우리 모두를 파멸로 몰고 갔을 겁니다!"

비웃음이 담긴 질문이 돌아왔다. "왜 리그에 참가하려 하는 건데, 라이즈?"

라이즈가 놓아주자 릴리스는 뒤로 물러났다. 그는 등에 매달린 두루마리 위치를 바로잡았다. "이걸 안전하게 보관해야만 합니다."

릴리스가 미소 지었다. "속마음을 드러내니 기분이 어떤가?"

이제 단호한 표정으로 돌아온 라이즈가 대답했다.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리그 오브 레전드로 통하는 문이 열리고 빛이 쏟아져 들어오자, 라이즈는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