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지키스탄 공화국 대통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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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어 : Рахмон Набиевич Набиев
타지키스탄의 제2대 대통령. 두 차례에 걸쳐 제2대 대통령[1]을 역임했다.
2. 초기 생애
1930년 후잔트의 농민 집안에서 태어났다. 16세 때인 1946년부터 집단농장에서 근무하다가,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타슈켄트로 건너가 유학 생활을 하기도 했다.[2] 타지키스탄으로 돌아온 후에는 수리공으로 일했다.3. 정치 활동
1961년 소련 공산당[3]에 입당하였으며, 1971년부터 1973년까지 타지키스탄의 농업부 장관을 지냈다. 장관 퇴임 이후에는 타지키스탄 장관회의 주석에 올라 실질적인 정부 수반 역할을 하기도 했다.1983년 타지키스탄 공산당 제1서기에 오르면서 명실공히 타지키스탄 지역의 실권자가 되었으나, 2년 만에 해임되었다. 표면상의 사유는 "방탕한 사생활 및 알코올 중독"이었지만, 실제로 그 정도로 망나니였는지는 불명. 다른 말로는 그가 부정부패 때문에 실각했다는 얘기도 있다.
3.1. 대통령
1991년 소련이 해체되기 시작하면서 각 공화국들의 독립 선언이 잇따랐고, 타지키스탄도 이 대열에 합류, 9월 9일 전격 독립을 선언한다. 23일에는 8월 쿠데타를 지지했다가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눈 밖에 난 카하르 마흐카모프를 대신해 새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내부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단 몇 주만에 사임했다. 허나 소련 해체를 극렬히 반대하던 민심[4]은 나비예프로 기울고 있었고, 마침내 11월 24일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 출마, 민주당 다블라트 후도나자로프를 압도적인 표차로 꺾고 당선되어 대통령직에 복귀했다. 하지만 소련 유지를 지지하던 민심과는 달리, 대세가 소련 해체로 기울게 되면서 타지키스탄도 결국 반강제로 독립하게 된다.그렇게 독립국 타지키스탄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지만, 현실은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소련 해체가 아쉬웠는지 일종의 대리만족(?) 차원에서 러시아군 제201군사기지를 주둔하게 하여 야권의 반발을 종용했다.[5] 외교적으로도 철저한 친러 노선을 고집했는데, 이 또한 야권 및 반대파들의 반감을 샀다.
야권의 반발이 무슨 죄냐고 생각될 수 있겠지만, 당시 타지키스탄이 처해있던 상황은 단순히 여-야 대립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그간 곪아있던 각종 내부 갈등이 소련 해체 후 폭발한 상황이었고, 결국 전국적 시위가 발발하다못해 내전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3.2. 실각과 사망
그렇게 민심을 잃어가던 1992년 9월 7일, 나비예프는 수행단과 함께 두샨베 국제공항으로 향했으나, 공항에서 그를 기다리던 건 다름아닌 그를 겨냥한 총(...)이었고, 결국 대통령직을 전격 사임하게 되었다. 그는 잠시 구금되어있다가 풀려났으나, 이미 실권은 그의 동지였던 에모말리 라흐몬에게 넘어간 뒤였다.이후 1993년 4월 11일 향년 62세로 사망했다. 공식적인 사망 원인은 "심장마비"였지만, 딸 무나바라 나비예바는 이러한 정부의 공식 발표를 믿지 않았다. 총기에 사망했다는 얘기도 있지만, 이게 사실이라고 쳐도 자살인지 타살인지는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는 중.
4. 평가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카자흐스탄), 이슬람 카리모프(우즈베키스탄),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투르크메니스탄), 아스카르 아카예프(키르기즈스탄)과 더불어 중앙아시아 5개국의 초대 지도자 중 한 명이기도 하지만, 언급된 4인방에 비해 인지도는 듣보잡(...) 그 자체다. 나름 실권을 쥔 대통령이기는 했지만 막상 그럴 만한 업적을 남기지 못하고 1년 만에 불명예스럽게 축출되었으니, 그가 국제적인 인지도를 가질 리는 만무하다. 오죽하면 사진조차 얼마 없어서, 구글에 그의 이름을 검색해봐도 그의 사진보다 "라흐몬"이라는 이름을 공유하는 후임자의 사진 위주로 뜰 정도다(...).어떻게 보면 1년 남짓밖에 안 되는 매우 짧은 임기에 그럴 만한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고 퇴장했다는 점에서 콘스탄틴 체르넨코와 비슷하다.[6]
다만 타지키스탄 내부에서는 그를 나름 국부 중 한 명으로 추켜세우는 듯 하다. 그래도 초대 대통령이기는 한 지라, 장례식도 국장으로 치러졌고, 그의 이름은 학교를 비롯한 각종 공공기관에 붙여졌다.
5. 여담
- 축빠였다고 한다. CSKA 파미르 두샨베의 팬이었다고한다.
- 모국어인 타지크어 외에도 러시아어와 우즈베크어를 능숙하게 할 줄 알았다고 한다. 후자야 그렇다 쳐도, 전자는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게, 타지키스탄은 수십년 동안 소련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학교에서부터 러시아어를 가르쳐왔다. 실제로 구소련 국가의 국민들은 대부분 러시아어를 문제 없이 구사할 줄 안다. 다만 타지크어와 사실상 같은 언어인 페르시아어와 다리어를 구사하는 데는 어려움을 겪었다고.
[1] 독립 후 기준으로는 초대.[2] 말이 유학이지, 당시 타지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과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소련에 속했기 때문에 당시 기준으로는 유학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3] 타지키스탄 지부로, 소련 해체 후에는 타지키스탄 공산당으로 분리되었다. 금지되거나 해체된 타국의 공산당들과는 달리, 타지키스탄 공산당은 현재까지도 활동 중이다.[4] 당시 중앙아시아 5개국은 소련 해체를 강경하게 반대했다.[5] 다만 반발을 아주 의식하지 않은 건 또 아니어서, 중요한 참모직들은 타지크인이 맡도록 법률을 개정해 놓기는 했다.[6] 다만 건강이 최악이라서 제대로 된 업무 수행이 아예 불가능했던 체르넨코와는 달리, 이 쪽은 건강이 그렇게 나빴는 지는 불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