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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7-18 21:56:14

랄프 네빌(제2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제2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
Ralph Neville, 2nd Earl of Westmorland
파일:랄프 네빌(제2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webp
성명 랄프 네빌
Ralph Neville
출생 1406년
잉글랜드 왕국 컴브리아 코커머스 성
사망 1484년 11월 3일
잉글랜드 왕국 웨스트모어랜드 백작령
아버지 네빌 남작 존 네빌
어머니 엘리자베스 홀랜드
형제 , 토머스, 마거릿
배우자 엘리자베스 퍼시, 마거릿 드 코밤
자녀 존, 마거릿
직위 제2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1. 개요2. 생애3. 가족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조앤 보퍼트의 자식들이 자신이 정당하게 계승받아야 할 조부의 영지를 가로챘다고 간주하고 오랫동안 무력 충돌을 벌였으며, 장미 전쟁 시기 랭커스터 왕조를 지지했지만, 별다른 행적을 보이지 않았다.

2. 생애

1406년경 잉글랜드 왕국 컴브리아 코커머스 성에서 네빌 남작 존 네빌과 제2대 켄트 백작 토머스 홀랜드의 딸인 엘리자베스 홀랜드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조부인 초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은 잉글랜드 북부의 더럼, 노스 요크셔, 링컨셔 등지에 걸친 대규모 영지를 경영한 귀족으로, 스코틀랜드 왕국과의 국경을 전담했다. 그러다가 헨리 4세찬탈을 지지한 대가로 여러 직위와 상을 받았으며, 퍼시 가문의 반란 진압에 공헌하면서 명실상부한 잉글랜드 북부 최강의 귀족이 되었다.

아버지 존 네빌은 네빌 남작으로서 랄프 네빌의 영지와 작위를 물려받을 예정이었으며, 어머니 엘리자베스 홀랜드의 아버지 토머스 홀랜드는 모계를 통해 에드워드 1세의 증손자이자 리처드 2세의 이복형제였다. 그러던 1420년 5월 20일, 아버지 존 네빌이 프랑스 전선에서 병사했다. 존 네빌의 장남 랄프 네빌은 아버지가 죽을 당시 14살의 미성년자였다. 1425년, 장남보다 오래 산 초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이 사망했다. 이후 그가 죽기 직전에 작성한 유언장이 큰 파장을 일으켰다.

랄프 네빌은 유언장에서, 장손인 랄프 네빌에게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칭호를 계승하도록 했다. 그러나 유언장에 영지 분할에 관련해 손자 랄프 네빌이 언급되지 않은 것 때문에, 재산의 대부분은 랄프 네빌의 두번째 아내 조앤 보퍼트가 낳은 자식들에게 상속되었다. 결국 손자 랄프 네빌은 작위만 주어졌을 뿐 대부분의 영지를 상실했다. 역사가 찰스 로스는 이에 대해 "야심찬 가족 사기"라고 평했으며, 일부 역사가들은 초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이 이런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해, 자기가 잉글랜드 북부에 건설한 대규모 영지를 상속인이 보존할 수 있기를 바랐으며, 성인 아들이 미성년 손자보다 이를 잘 할 수 있으리라 믿었기에 이런 유언장을 남겼을 거라고 추정한다.

아무튼 조부의 유언장 때문에 대부분의 영지를 잃은 랄프와 그의 두 동생 존, 토머스는 매우 가난해졌다. 거기에 더해, 1425년 10월에 브랜스페스가 계모 조앤 보퍼트에게 지참금으로 할당되면서 더욱 줄어들었다. 세 형제는 이 상황에 몹시 분노했고, 영지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랄프 네빌이 취한 첫번째 조치는 수입을 어떻게든 늘리기 위해 애쓰는 것이었다. 1426년 3월 16일, 랄프는 연간 임대료 인상을 요청해 102파운드로 인상되었다. 5월에 레스터로 소환된 뒤 5월 19일 의회에서 기사 작위를 받았다.

또한 랄프는 고인이 된 헨리 '핫스퍼' 퍼시의 딸이며 제7대 클리퍼드 남작 존 드 클리퍼드의 미망인인 엘리바제스 퍼시와 결혼하는 걸 허락받았다. 결혼식은 1426년 7월 20일 요크셔의 로슈 수도원에서 거행되었다. 당시 랄프 네빌은 2,000 마크에 달하는 막대한 빚을 지고 있었는데, 왕실은 그가 빚 일부를 구제하기로 했고, 엘리자베스 퍼시는 원하는 대로 결혼하기 위해 왕실로부터 200마크를 받았다. 엘리자베스 퍼시는 노섬벌랜드에 있는 하터 영지를 보유했으며, 전 남편 존 드 클리퍼드 영지 대부분에 대한 관리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랄프의 수입을 늘리는 데 보탬이 되었다.

1427년, 랄프는 자기 땅에 대한 보호권을 왕에게 청원했다. 그는 아직 미성년자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후견인의 지위는 유지되었지만, 그의 재산에서 연간 200파운드의 임대료가 할당되었다. 후견인의 역할은 1429년 2월에 종료되었다. 이제 랄프는 조앤 보퍼트의 자식들을 상대로 상속 재산에 대한 소송전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잉글랜드 국정을 거머쥔 보퍼트 가문의 비호를 받은 조앤 보퍼트의 자식들을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이에 세 사람은 보퍼트 가문의 전횡에 반감을 품은 귀족들을 끌어들여 무력으로 해결하려 했고, 이 때문에 1430년대 내내 무력 충돌이 벌어졌다. 존과 토머스는 형 편에 서서 조앤 보퍼트의 자식들이 가진 영지를 종종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당시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있던 잉글랜드 왕실은 잉글랜드 북부에서 일어난 네빌 가문의 분쟁을 어떻게든 중재하려 애썼다. 1430년 8월 18일, 양 진영은 1년간 상대방의 땅을 공격하지 않기로 약속하는 협정을 맺은 대가로 왕실로부터 2,000 파운드를 받았다. 1431년 5월 13일, 제5대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은 서부 변경백작의 관리인으로 임명되어 여름에 프랑스로 갔다. 이때 왕실 위원회는 웨스트모어랜드 백작에게 솔즈베리 백작이 없는 동안 그의 영지를 공격하지 말라고 강요하고, 그 대신 4,000 파운드를 지불했다. 1434년 11월 6일, 의회는 1436년 부활절까지 계약을 갱신하기 위해 다시 4,000마르크를 지불했다. 또한 의회는 네빌 가문 상속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영주 3명과 판사 2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세우기로 했다. 1435년 2월 4일, 의회는 요크 대주교 존 캠프, 제13대 워릭 백작 리처드 뷰챔프, 제3대 크롬웰 남작 랄프 드 크롬웰, 판사 체인과 코츠모어로 구성된 위원회를 설립했다.

1443년, 랄프 네빌과 존 네빌, 토머스 네빌 형제는 잉글랜드 정부의 강력한 권고에 따라 조앤 보퍼트의 자식들과 비로소 합의를 맺었다. 랄프 네빌은 라비의 남작권을 되찾았지만, 나머지 분쟁 지역은 초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과 조앤 보퍼트의 장남인 제5대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의 소유가 되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갈등은 이것으로 해소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 홀랜드의 세 아들들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령을 온전히 가지지 못한 것에 강한 불만을 품었고, 조앤 보퍼트의 자식들은 유언장대로 따랐을 뿐인데도 그들이 행패를 부린다며 반감을 품었다.

그 결과, 장미 전쟁으로 이어진 1450년대의 정치적 사건 동안, 네빌 가문의 두 분파 대표자들은 서로 다른 진영에 속했다. 랄프 네빌, 존 네빌, 그리고 토머스 네빌 형제는 앙주의 마르그리트 왕비를 지지했고,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과 두 아들 제16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과 존 네빌은 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를 지지했다. 하지만 웨스트모어랜드 백작은 정치 및 군사 활동을 거의 벌이지 않았는데, 일부 기록은 그가 정신병에 걸렸다고 밝혔다. 그 대신, 존이 주도권을 쥐고 솔즈베리 백작과 대립했다. 토머스 네빌도 형 존을 도왔지만 1458년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1461년 3월 29일, 동생 존 네빌이 토우턴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 해 11월 4일, 요크 의회는 존 네빌을 반역자로 규탄하고 그의 영지와 작위를 몰수했다. 또다른 동생 토머스 네빌의 아들이자 상속인인 험프리 네빌은 에드워드 4세를 축출하기 위한 음모에 가담했다가 발각되어 1469년 9월 29일에 참수되었다. 이리하여 웨스트모어랜드 백작은 가족 대부분을 잃고 무기력해졌다. 남아있는 기록에 따르면,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가 웨스트모어랜드 영지에 대한 이익을 얻었고, 가끔 네빌 가문의 거점인 라비 성을 거주지로 삼았다고 한다. 이로 볼 때, 글로스터 공작이 정신이상에 시달리는 웨스트모어랜드 백작의 보호자 역할을 하면서 수입을 챙겼던 것으로 추정된다.

1484년 11월 3일, 랄프 네빌이 사망했고 더럼 주 브랜스페스에 있는 세인트 브랜던 교회에 안장되었다. 사후 동생 존의 아들이자 그의 조카인 랄프 네빌이 제3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에 선임되었다.

3. 가족


[1] 제3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