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 공항 테러 テルアビブ空港乱射事件 הטבח בנמל התעופה לוד Lod Airport massacre | ||
<colbgcolor=#bc002d><colcolor=#fff> 발생일 | 1972년 5월 30일 오전 12시 4분~12시 28분[1] | |
발생 위치 | ||
이스라엘 로드 로드 공항 | ||
유형 | 총기난사, 폭탄 테러 | |
인명피해 | <colcolor=#fff><colbgcolor=#bc002d> 사망 | 28명[2] |
부상 | 81명[3] |
[clearfix]
1. 개요
1972년 5월 30일 이스라엘 로드 공항[4]에서 발생한 테러. 이 사건으로 인해 28명이 사망하고 81명이 부상을 입었다.2. 전개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이 이스라엘의 공항에서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 테러를 시행하기 어려울 것을 예상하고 이들과 동맹 관계인 일본의 신좌파 중에서도 무장테러 단체인 일본적군의 단원들을 모집해 테러를 계획했다.5월 30일 이탈리아 로마에 도착한 에어 프랑스 기체에서 일본적군 단원 3명이 내리자마자 바이올린 보관함에서 Vz.58을 꺼내 개머리판 없는 상태로 직원들을 향해 총기를 난사하기 시작했고 탄창 교체를 할 때는 수류탄을 던졌다. 야스다 야스유키는 동료가 실수로 쏜 총에 맞아 사망했고 오쿠다이라 쓰요시는 착륙지로 자리를 옮겨 엘알 항공기에서 내리는 승객들을 향해 난사하다가 본인의 수류탄에 의해 사망했다. 오카모토 고조는 보안관이 쏜 총에 맞아 부상을 입은 후 터미널에서 도망가려고 했으나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미국 푸에르토리코 출신 개신교 성지순례자 17명, 이스라엘인 8명, 캐나다인 1명이 사망했다. 이스라엘인 사망자 중에는 아하론 카치르[5] 이스라엘 인문과학 아카데미 회장이자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생물리학자가 포함되어 있다.
3. 가해자
가해자 3명은 모두 일본적군 소속 단원으로 레바논 바알벡에서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의 와디 하다드에 의해 훈련을 받았고 1972년에 발생한 루프트한자 649편 납치 사건으로 인해 서독으로부터 받은 몸값 5백만 미국 달러 중 일부를 지급받아 테러를 진행했다.4. 사건 이후
일본에서는 테러를 일으킨 주범들이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다가 일본 대사관 측에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오카모토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해 줬다. 오카모토는 이 테러가 본인이 반유대주의 성향이 있어서가 아니라 임무 수행을 한 것일 뿐이라고 전했다.오카모토는 1972년 6월 재판에서 사형은 면했으나 종신형을 선고받았는데 1985년에 이스라엘이 이스라엘군 포로와 죄수 1,000여명을 맞바꾸면서 석방되었고 이후 레바논에 정착했다. 1997년에는 위조 여권 등의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2000년 레바논에서 난민 지위를 얻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에서는 아직 지명 수배하고 있다.
2006년 푸에르토리코 의회는 5월 30일을 로드 학살 추모일로 지정했다.
2008년 푸에르토리코 출신 사망자의 자녀들이 북한이 이 테러를 지원했다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을 상대로 고소했다.
2010년 7월 미국 법원에서 북한이 테러를 지원한 혐의로 유가족들에게 3억 7800만 달러를 지급하도록 명령을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