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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 | |||||
<colbgcolor=#2b5df2><colcolor=#fcef3c> 국가 | 프랑스 | ||||
행정단위 | 코뮌 | ||||
레지옹 | 브르타뉴 | ||||
데파르트망 | 모르비앙 | ||||
아롱디스망 | 로리앙 | ||||
INSEE 코드 | 56121 | ||||
인문지리 | |||||
시장 | 파브리스 로어 | ||||
면적 | 17.48㎢ | ||||
인구 | 57,412명(2020년) | ||||
인구밀도 | 3,300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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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브르타뉴 반도에 위치한 항구 도시로 전통적으로 프랑스의 무역항이자 군항으로 사용된 도시이다. 그것은 현재도 마찬가지로 현재 로리앙에는 프랑스 해군의 특수부대인 해군 코만도와 란 비후에 해군 항공대 기지가 위치해있다.2. 역사
1672년부터 1678년 사이 일어난 프랑스-네덜란드 전쟁에서 프랑스 동인도 회사가 있던 르아브르가 위협을 받자 회사를 한적한 시골이었던 로리앙으로 이전하였다. 로리앙은 이 지역에서 처음 건설한 배인 Le Soleil d'Orient에서 유래하였으며, 이 단어의 축약어가 로리앙이다. 그 이후 1690년 프랑스 왕립 해군의 기지가 들어섰고 18세기에 들어서는 대서양 삼각 노예 무역의 중심지로서 번영하였다. 또한 1717년 스코틀랜드의 금융인인 존 로가 세운 미시시피 회사의 본사가 위치해 신대륙 무역의 중심지로도 발전하였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당시 영국군이 로리앙을 습격하면서 프랑스 동인도 회사는 다시 본사를 낭트로 옮겼다. 그래서 로리앙은 침체일로로 들어섰지만 산업 혁명이 시작되면서 도시는 다시 발전하였다.1825년 근대식 조선소가 들어선 것을 시작으로 동년도에는 정어리 통조림 공간이 들어섰다. 19세기 후반 증기기관이 대대적으로 보급되면서 어선에도 증기기관이 장착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업이 발전하였으며, 현재 프랑스 최대의 어항인 로리앙-케로만 어항이 이때 건설되었다.
1940년 프랑스를 점령한 독일은 이 지역에 잠수함 기지를 건설하였다 연합군은 4,000톤의 폭탄을 투하하였지만 잠수함 기지를 파괴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로리앙은 1944년 8월 12일 연합군에 포위되었다. 연합군은 로리앙을 포위만하고 점령하지는 않았고, 독일이 공식적으로 항복한 이틀 뒤인 5월 10일 로리앙에 있던 독일군은 항복하였다.
3. 스포츠
로리앙에서 가장 인기있는 축구 클럽은 FC 로리앙이다.4. 경제
로리앙은 전통적으로 군사, 어업, 상업, 여객 및 요트 항구가 있어서 다섯 개 항구의 도시로 불렀다. 또한 조선업도 발달해서 주로 프리깃함을 건설하고 있다.5. 명소
- 호텔 가브리엘(Hôtel Gabriel) : 18세기 프랑스의 건축가인 자크 가브리엘이 설계한 이 건물은 원래 상품 경매장으로 시작되었다. 현재 로리앙 시가 이 건물을 인수해 전시관 및 시립 기록 보관소로 쓰고 있다.
6. 기타
- 로리앙은 2차 대전 시기 독일군에 의해 잠수함 기지가 건설되었다. 유보트 함대의 수장인 칼 되니츠는 1940년 11월부터 1942년 1월까지 여러 개의 철근 콘트리트 구조물을 건설하였다. 이 기지는 30척의 잠수함을 수용할 수 있었고 연합군이 폭격을 하였지만 피해는 별로 입지 않았다. 독일이 항복한 이후 그 기지는 프랑스 해군이 사용하였고, 기지의 이름으로 독일군에 살해된 레지스탕스 대원인 자크 스토스코프의 이름을 붙였다. 자크 스토스코프 기지는 현재 폐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