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로베르 드 파인즈 Robert de Fiennes | |
생몰년도 | 1308년 또는 1309년 ~ 1384년 | |
출생지 | 프랑스 왕국 파인즈 | |
사망지 | 프랑스 왕국 파인즈 | |
아버지 | 장 드 파인즈 | |
어머니 | 이자벨 드 플란데런 | |
누이 | 잔, 마틸드, 아녜스 | |
아내 | 베아트리스 드 아브르, 마르그리트 드 멜룬 | |
직위 | 파인즈 영주, 프랑스의 무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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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귀족, 장군. 백년전쟁 시기에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맞섰다.2. 생애
1308년 또는 1309년경 파인즈와 텡그리 영주인 장 드 파인즈와 플란데런 출신의 이자벨의 아들로 출생했다. 누이로 잔[1], 마틸드[2], 아녜스[3]가 있었다. 1340년 장 1세 다르마냐크 휘하의 군대에 들어가 4명의 기사와 23명의 종자로 구성된 분견대를 이끌고 로베르 3세 다르투아가 잉글랜드군을 이끌고 포위하던 생오메르 요새를 구원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노르망디 공작이자 프랑스 왕위 계승자인 장 왕자가 1342년부터 1344년까지 가스코뉴 방면에서 군사 활동을 벌일 때 참여했다.1347년 기 2세 드 네슬과 함께 생오메르 수비 대장에 선임된 뒤 아르투아를 습격하는 잉글랜드-플란데런 연합군과 맞섰다. 그는 이 시기에 자비로 프랑스-플란데런 국경에 위치한 자신이 소유한 요새를 방어하는 데 돈을 써야 했는데, 이를 마련하기 위해 롬바르디아 금융가들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빌려야 했다. 그는 돈을 갚기 힘들어지자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에게 호소했고, 필리프 6세는 1347년 2월 그를 대신해 빚을 갚아줬다. 그 대가로, 그는 프랑스 재무부가 그에게 갚아야 할 돈을 탕감했다. 이후 1349년 필리프 6세의 원정 기간 동안 30명의 기병을 이끌고 3개월 동안 왕을 위해 싸웠다.
1350년 조프루아 드 샤르니의 칼레 습격전에 참여했고, 아군이 패퇴할 때 적의 추격을 막아서 궤멸당하지 않게 하였다. 1350년부터 1355년까지 아르눌 도드랭의 지휘를 받으며 프랑스 북부에서 잉글랜드군과 맞섰으며, 1356년 프랑스 국왕 장 2세가 브레퇴유 요새를 공략하는 데 일조했다. 이 공으로 장 2세로부터 불로뉴의 벨폰테인을 수여받았다.
1356년 장 2세의 원정에 참여했지만, 푸아티에 전투에 참여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 무관장 고티에 6세 드 브리엔이 전사하자, 그가 무관장에 선임되었다. 1357년 에티엔 마르셀의 난이 발발했을 때 샤를 왕자의 편에 서서 마르셀과 정치적 동맹을 맺었던 나바라 왕국의 국왕이자 에브뢰 백작인 카를로스 2세와의 협상에 참여했다. 1358년 피카르디, 베르망두아, 보베지의 세네샬로 선임되었으며, 카를로스 2세의 지지자들이 아미앵을 공략하려는 시도를 저지했다.
1358년 8월부터 1359년 4월까지 생발레리쉬르섬 요새에서 나바라군을 포위하고 있다가 카를로스 2세의 동생인 필리프 데브뢰가 이끄는 또다른 나바라군이 접근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수비대와 협상한 끝에 신변의 안전을 보장하는 대가로 항복을 받아냈다. 이후 필리프를 추격했지만 무리하게 쫓으려 하지 않았고, 그 사이에 필리프는 노르망디로 퇴각했다.
로베르는 본래 필리프 6세로부터 군사 활동에 참여하는 대가로 2,000리브르의 연간 수입을 제공받기로 했다. 그러나 프랑스 재무부는 자금 부족으로 인해 이를 지불하지 못했다. 이에 샤를 왕자는 1358년 10월 22일자 서한을 통해 로베르에게 생캉탱 성과 도시에서 평생 1,100리브르의 연간 수입을 받게 했다. 1359년 나바라군이 점령했던 멜룬을 탈환했으며,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가 파리 원정을 감해앴을 때 오세르를 지켜내고 잉글랜드군이 일시적으로 점령했던 여러 요새를 탈환했다.
1359년 말 오세르를 공략한 뒤 심한 약탈을 일삼는 잉글랜드 용병대장 로버트 놀스와 협상한 끝에 놀스가 다량의 와인을 받는 대가로 와인과 기타 물품을 실은 프랑스 배가 레젠느 수로를 무료로 통과할 수 있게 했다. 또한 놀스가 점령한 영토는 그대로 가지는 게 혀용되었지만, 1년간 어떤 마을, 성, 요새도 추가로 점령하지 않고 적대행위를 벌이지 않아야 했다.
1360년 3월, 잉글랜드군이 파리에 접근하자, 그는 롱주모에서 에드워드 3세와 평화 협상을 했다. 이후 10월 26일 브레티니에서 열린 평화 협약 서명식에 참여했다. 이후 조약을 보장하기 위해 잉글랜드로 간 인질 중 한 명이 되었다가 나중에 돌아와서 1360년 12월 랑그독 보안관에 선임되었다. 1360~1361년 자유 용병대에 대항해 프랑스 남부에서 군사 작전을 이끌었고, 1361년 9월 아르눌 도드랭으로 교체된 뒤 생오메르로 파견된 후 부르고뉴로 이동하여 1362년 7월부터 1364년 4월까지 용병대와 맞섰다.
1364년 5월 19일 랭스에서 샤를 5세의 대관식에 참여했으며, 1365년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의 도움으로 용병대가 점령한 샤리테쉬르루아르 시를 탈환했다. 1366년~1367년 피카르디와 아르투아를 공격하는 잉글랜드군에 맞섰으며, 1367년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과 함께 샹파뉴와 피카르디를 약탈하는 용병대를 몰아낸 뒤, 그들이 피난처로 삼으려 했던 부르고뉴에서도 쫓아냈다. 1369년 샤를 5세가 아키텐 공작령을 흑태자 에드워드로부터 몰수하겠다는 칙령을 반포하면서 백년전쟁이 재개된 뒤 아르드레를 포위했으나 공략에 실패했다. 1370년 무관장 직임에서 물러났고,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그의 뒤를 이어 무관장에 취임했다. 이후 샤를 5세로부터 4,000 리브르의 연금을 받고 조용히 지내다 1384년경에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아브르 영주의 딸인 베아트리스와 처음으로 결혼했고, 장 2세 드 멜룬의 딸인 마르그리트 드 멜룬과 두번째로 결혼했다. 그러나 두 결혼 모두 자녀를 낳지 못했다. 그가 사망한 뒤 조카인 마틸드 드 샤티용이 그의 재산을 물려받았고, 마틸드가 시집간 뤽상부르리니 가문이 이를 물려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