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트레벨리우스 피데스 라틴어: Lucius Trebellius Fides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43년 이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
사망지 | 미상 |
지위 | 에퀴테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루키우스 트레벨리우스(아버지) |
참전 | 무티나 내전 |
직업 | 호민관, 조영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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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군인, 정치인.2. 생애
기원전 67년 호민관을 역임한 루키우스 트레벨리우스의 아들이다. 기원전 47년 호민관을 역임하면서 주택 비용을 낮추고 부채를 탕감하자는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의 주장을 결사 반대했다. 두 호민관의 지지자들은 로마에서 각자 무력 집단을 갖추고 시가전을 벌였다. 당시 폼페이우스파를 토벌하고자 먼 원정을 떠난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대신하여 로마를 다스려야 할 이는 기병대장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였다. 안토니우스는 로마에서 혼란이 일어나길 원치 않은 카이사르의 뜻에 따라 트레벨리우스를 심정적으로 지지했지만, 돌라벨라와 친구 사이였기에 어느 한쪽을 선뜻 지지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시가전이 갈수록 심각한 수위로 이어지자, 안토니우스는 비상사태를 선포하여 군대를 도시에 투입하여 최대 800명에 달하는 돌라벨라 지지자들을 죽이고 돌라벨라를 체포했다. 일설에 따르면, 돌라벨라는 안토니우스의 아내와 간통했고, 안토니우스가 이 사실을 알게 되자 돌라벨라에게 등을 돌렸다고 한다.그 후 조영관에 취임한 그는 인기를 끌어모으기 위해 거대한 행사를 연이어 벌였으나, 이로 인해 막대한 빚을 져야 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에 따르면, 그는 빚에 허덕인 끝에 모든 부채를 탕감하자는 주장을 열렬하게 지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기원전 43년 초 무티나 내전을 치르고 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군영에 가담했다는 기록을 끝으로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