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10px" |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fff,#1f2023><tablebgcolor=#ffffff,#1f2023> [[르노 FT| | }}} | |||
실전 | 운용국 | 미디어 |
1. 제1차 세계 대전
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3,400여대가 생산되었는데 이는 1차대전에서 실전 투입된 전차 가운데 가장 많은 생산량으로 가히 1차대전판 T-34 전차라고 할만한 전차였다.비록 성능 면에선 이미 앞서 개발된 전차들에 비해서는 몇몇 부분은 떨어지고, 특히 참호를 전방위적으로 휩쓸 수 있는 기존 전차들과 비교한다면 화력 면에선 크게 열세였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본다면 생산성에 비하여 나쁘지 않은 공방능력의 희생이었다. 37mm 전차포는 Mk 시리즈의 6파운더나 생샤몽의 75mm 전차포 등 기존 전차포들에 비해 화력과 사거리가 열세였지만 보병들 입장에서 대항하기 힘들긴 매한가지였고, 무엇보다 3천대 가량 뽑아져서 전선에 전방위적으로 투입된 르노 전차는 점차 대전차화기를 개발하거나 수류탄 등으로 발악하며 서서히 적응하던 독일 육군에 자비 없는 공세를 펼쳐 독일 육군의 군사적 능력을 철저하게 파괴시켰다는 점에서 가장 큰 의의를 가진다.
1.1. 백일 전투
르노 FT는 1918년 독일 제국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한 백일 공세에서 승리를 앞장서서 이끌었다.2. 전간기
1차 대전 기간 동안 FT는 약 440대가 손실되었고 정전협정 당시 프랑스는 2,720대의 FT를 보유하고 있었다. 전후에도 생산이 계속되었고 총 4,517대가 생산되었다. 프랑스 뿐 아니라 세계 각지로도 베스트셀러로 팔려나갔다. 전간기에는 미국, 러시아, 폴란드, 중국에도 수출되며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리프 전쟁 등에 참전하여 크게 활약하였다. 이외에도 여러 중소국가들에서 기갑 학교나 기갑부대를 꾸릴 때 FT로 시작한 국가들이 많았다. 물론 본가인 프랑스에서도 꾸준히 사용되었다. 1차 대전 이후 기갑부대를 해산시킨 미국, 영국과는 달리 프랑스는 전후에도 여전히 기갑부대를 유지했다. 하지만 베르사유 조약 덕택에 가상적국 1호인 독일의 군사적 위협이 없어진 상황이었다. 때문에 전차부대의 근본적인 현대화를 추구해야할 이유도 마땅치 않았다. 그 결과 슈나이더 CA1과 생샤몽, Mk 시리즈 등의 구세대 전차들이 줄줄이 퇴역하는 동안에도 절찬리에 장수만세로 현역에서 사용되었다. 나치가 집권하고 베르사유 조약 파기와 재무장 선언을 선포하기 직전인 1934년 시점에서도 서류상으로 무려 3,499대가 동원 가능했다.2.1. 러시아 내전
2.1.1.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붉은 군대는 장비하지 않았으나 프랑스 제3공화국이 지원한 수량이 폴란드군에 의해 사용되었다. 바르샤바 전투(1920년)에 르노 FT 전차 대대들이 활약했다.2.1.2. 시베리아 내전
소비에트 측의 극동 공화국 인민혁명군 소속으로 소량 투입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역시 보유하고 있었고 탈출하면서 장쭤린의 봉천군벌에 판매해 처분한다.2.2. 만주사변
2.3. 제1차 상하이 사변
2.4. 리프 전쟁
2.5. 폴란드 5월 쿠데타
|
5월 쿠데타 당시 우야즈도프스키 거리에서의 쿠데타군 소속 르노 FT |
2.6. 스페인 내전
3. 제2차 세계 대전
3.1. 폴란드 침공
3.2. 겨울전쟁
3.3. 프랑스 침공
하지만 아무리 명전차라도 세월의 흐름을 이길 수는 없는 법. 더욱이 나치가 집권한 이후 유럽의 안보정세가 요동치면서 프랑스군은 부랴부랴 기갑부대의 현대화와 신형 전차 생산을 서둘렀다. 그 덕택에 1940년, 독일 국방군의 프랑스 침공 당시 프랑스 육군은 주력 보병전차로 르노 R35나 호치키스 H35 등을 운용할 수 있었다. 이들 전차는 개전 시점에서 각기 1,500대 이상 생산되어 있었고 FT는 예비역 내지 보조 정도의 위치만 차지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도 프랑스군은 여전히 상당한 수량의 FT를 운용하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 개전 시점에서 프랑스 본토에는 각 63대[1]의 7개 일선대대를 비롯한 504대가 배치되었다. 프랑스군의 기갑부대가 전체수량에서 독일군보다 오히려 우세하긴 했으나 프랑스 쪽에는 상당수의 FT가 포함되었다는 허점이 있었다. 또한 FT를 대체한 R35나 호치키스 H35 역시 근본적인 설계사상과 운용방식이 FT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도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물론 FT에 결함이 있어서라기보다는 1차 대전에서의 성공에 안주한 것이 문제였지만.당장 FT에 장착된 퓌토 SA18 21구경 37mm 전차포는 400m에서 35도 경사 장갑 21mm(사실상 26mm)를 관통하는 정도의 단포신 보병포라 사실상 유탄발사기에 불과하므로 전차전에는 그다지 쓸모가 없었다. 장갑도 연강(軟鋼)판을 리벳 접합한 것이라 20mm 기관포, 수류탄에도 구멍이 숭숭 뚫렸다. 때문에 1930년대 초 근대화개장을 거쳤던 것도 8mm 호치키스 기관총을 7.5mm 레이벨 MAC Mle 31 기관총으로 교체하고 주행성능을 개선하는 정도로 그쳤다. 르노 또한 FT의 성능한계를 인정해서 르노 NC라는 개량형을 이미 1926년에 제시했지만 설계 자체가 구식이라 채용되지 못했다. 37mm L/21 SA18 퓌토 전차포는 후일 37mm L/21 SA18 M37이라는 개량형이 등장, 관통력을 배 이상 증가시키는데 성공했다. 이는 르노 R35/40이나 호치키스 H35/39, FCM 36에 탑재되어 그 우수함을 증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스페인 내전에서 45mm 20-K(500mm에서 46mm 관통력) 전차포를 장착한 T-26 중기형과 BT-5까지 상대해본 독일군 대전차포 중대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못했다.
여기에 더하여 프랑스 항복 때까지 전선에 동원할 수 있었던 건 기껏 520대 정도였고 나머지는 헌병대나 식민지군이 순찰용도로나 사용했다. 굳이 패인을 제공한 것이라면 프랑스군의 고위 관료들에게 전차는 두 명이 타는 물건이라는 인식을 박아놓은 점이다.
이후 보관중이던 물량까지 포함하여 1704대가 프랑스, 벨기에, 유고슬라비아 등에서 독일군에게 노획, 접수되었다. 차마 이런 빈약한 장갑과 화력을 지닌 물건을 일선에서 쓰기엔 무리가 있었던 터라 주로 루프트바페의 비행장 경비용 차량, 경찰 등의 후방부대에서 파르티잔 소탕용으로 쓰이거나 포탑을 떼내어 탄약운반차나 트랙터 대용으로 쓰고 떼낸 포탑은 대서양 방벽의 고정포대 대용으로 사용했다.#
3.4. 유고슬라비아 침공
3.5. 중일전쟁
[1] 다른 전차를 장비한 기갑대대는 45대로 구성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