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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1 09:19:03

리리싼 노선

1. 개요2. 배경3. 전개4. 참고문헌

1. 개요

1928년부터 1930년까지 중국공산당실권을 잡았던 리리싼이 주도한 좌경 노선. 1930년 창사 폭동을 통해 소비에트 정권을 수립하고자 했으나 국민혁명군에게 진압당하고 실패했다. 이후 코민테른으로부터 좌경 모험주의적 노선이라는 비판을 받고 리리싼이 실각하면서 폐기되었다.

2. 배경

1927년 7월 국공결렬이 일어난 이후 소집된 8.7 긴급회의는 총서기 천두슈를 퇴진시키고[1] 취추바이를 새로운 총서기로 추대했다. 취추바이는 코민테른의 지령에 따라 매우 강경한 폭동과 파업을 교사하는 취추바이노선을 전개했는데 이 결과로 추수폭동이 일어났지만 국민혁명군에게 패퇴했다. 취추바이는 추수폭동의 실패는 노선의 오류가 아니라 마오쩌둥을 비롯한 일선 간부들의 지도에 오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1927년 11월 상하이에서 열린 확대회의에서 마오쩌둥과 펑공다를 비롯한 책임자들을 징계하고 12월 11일 광저우 폭동을 일으켰지만 폭동 주도자 장타이레이가 전사하는 등 참혹한 피해만을 입었다. 5만 8천에 달했던 공산당원은 1만명으로 격감하는 등 중국 공산당의 피해는 격심했다. 1928년 2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9차 확대회의는 2월 결의를 통해 중국의 혁명이 퇴조기에 들어갔음을 인정하고 중국공산당에게 노동운동의 활성화, 당조직 재건, 토지혁명 확대, 홍군 건설에 주력함으로 새로운 혁명 고조기를 준비할 것을 주문했다. 이 때문에 중국에서 당대표회의를 가지는 것 자체가 너무 위험하여 중국 공산당 제6차 대표대회는 스탈린의 초청이라는 명목으로 모스크바에서 개최될 정도였다.[2]

1928년 6월 18일 모스크바에서 6차 대회가 개최되었다. 저우언라이가 회의의 총서기 역할을 맡았고 모스크바에 리리싼, 장궈타오, 차이허썬, 취추바이, 저우언라이 등 84명의 대표와 34명의 후보위원들이 모여 혁명이 고조기인지, 저조기인지를 논했다. 저우언라이는 혁명이 썰물, 즉 저조기에 있다면서 성급한 폭동을 비난하며 대중의 지지를 획득하여 혁명의 동력을 키워야 한다고 발언했다. 참석자들은 저우언라이의 견해에 찬성을 표했고 취추바이는 좌경모험주의, 맹동주의를 실행한 과오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아 총서기에서 쫓겨나고 특색 없는 샹중파가 새로운 총서기로 추대되었다. 물론 취추바이에게 책임을 돌린 것은 무모한 투쟁을 지시한 스탈린과 코민테른의 책임전가에 가까웠다. 이 때문에 취추바이는 중국 공산당 내부의 소요를 피하기 위해 가혹한 처벌을 받지는 않고 모스크바에 잔류하여 각각 중화전국총공회 대표단, 중국공산당 대표단, 공산주의청년 대표단을 맡게 되었다. 그외에 장궈타오, 여비, 등중하, 관향응 등도 모스크바에 잔류했다.

신임 총서기 샹중파는 노동운동 지도자인 무산계급 출신이지만 한번도 공산당 내부의 중요인물로 인식된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중국 공산당은 실질적으로 중앙군사부장 저우언라이와 중앙상무위원 겸 조직부장이며 샹중파의 비서장인 리리싼이 중국 공산당을 영도하게 되었다. 한동안 중국 공산당은 당조직 재건과 혁명역량 확보를 위해 무모한 무장투쟁을 회피하고 농촌근거지 확대에 주력하였다.

3. 전개

당의 앞날에 있어서 이와 같은 임무를 설정하는 것은 곧 투장 자체 과정에서 역량을 준비하여 가장 가까운 장래의 결전을 맞이하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은 진정으로 혁명 정신을 이용하여 수천 수백만의 군중의 혁명 기백과 투쟁에 모든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 이러한 투쟁 조건 아래에서의 주요 위험은 우경 기회주의 경향이다.
코민테른 정치처 1929년 6월 결의안

그런데 6차 대회가 끝난 직후인 1928년 7월 17일 코민테른 제6차 대표대회가 개최되어 스탈린부하린의 충돌이 벌어졌다. 스탈린은 자본주의 세계가 위기에 처했다고 주장하며 부하린을 우경주의자로 공격했고 소위 '제3시기 이론'을 내놓아 전쟁과 혁명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했다. 1929년 7월 3일 열린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10차 전체회의는 기회주의 척결, 반우경투쟁 강화를 각국 공산당에게 주문했고 코민테른이 급격히 좌경화되면서 중국 공산당도 영향을 받게 되었다. 1929년 2월 8일 코민테른은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서신>을 보내 중국 공산당 내부의 주요 위험이 우경이라고 지적하며 이를 예방하라고 지시했다. 6월 코민테른 정치처 결의안 역시 중국 공산당에게 반우경 임무를 하달했다. 코민테른으로부터 엄청난 자금 지원을 받는[3] 중국 공산당은 코민테른에게 비우호적이었지만 그렇다고 감히 크렘린의 스탈린에게 거스를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던 중 1929년 중동로 사건이 발생하자 코민테른은 이를 제국주의 국가가 소련에 대한 새로운 전쟁을 일으킨 것으로 간주하고 각국 공산당, 특히 중국 공산당에게 소련을 무장보위하라고 지령했다. 1929년 7월 17일 중국 공산당은 <제41호 통고>를 통해 중국의 민족해방을 돕는 것은 소련이며 자산계급은 제국주의의 주구에 불과하다고 비난하며 노동자계급의 조국 소련을 옹호하자고 나섰다. 또한 <광대한 군중을 동원하여 소련을 공격하는 것을 반대하라>라는 42호 통고도 내놓아 제국주의 전쟁을 국내 혁명전쟁으로 전환할 것을 촉구했다. 9월에 이르러 소련이 장쉐량의 봉천군벌을 침공했고 중국 공산당과 코민테른은 6차 대회의 평가를 비판하며 중국이 사실 혁명 고조기에 이르렀다고 말을 바꾸게 되었다.

4. 참고문헌



[1] 천두슈 본인은 7월 12일 코민테른의 지도부 개편 지시가 있은 후 사직서를 내고 우한에 잠적한 상황이었다.[2] 여기에는 스탈린이 중국 공산당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려는 목적도 있었다는 바르바라 바르누앙의 분석도 있다.[3] 1925년부터 1930년까지 모스크바의 중국노동자손일선대학에서만 500만 루블이 중국 공산당원을 위해 지급되었고 1930년 2월부터 9월까지만 중국 공산당에게 22만 3천 멕시코 달러가 지급되었으며 10월에도 1만 미국 달러가 지급되었다. 공산주의청년단도 7만 원을, 특별 코민테른 조직도 1만 1400원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