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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6-15 19:47:39

리스 압 토머스

파일:리스 압 토머스.jpg
성명 리스 압 토머스
Rhys ap Thomas
출생 1449년
잉글랜드 왕국 웨일스 공국 카마던셔 뉴턴 하우스
사망 1525년
잉글랜드 왕국 웨일스 공국 카마던셔
아버지 토머스 압 그루퍼드 압 니콜라스
어머니 엘리자베스 그루퍼드
배우자 에파 압 헨리, 조넷 매튜
자녀 그루퍼드 압 토머스 압 토머스
직위 배너릿 기사, 브래컨셔의 보안관, 카마던셔와 카디건셔의 재판관, 하버포드웨스트, 라우즈, 빌스의 대법관, 사우스 웨일스의 사법관, 전 웨일스 총독

1. 개요2. 생애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기사, 군인. 헨리 7세보스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를 격파하는 데 일조했다.

2. 생애

웨일스의 지주인 토머스 압 그루퍼드 압 니콜라스와 엘리자베스 그루퍼드의 세번째 아들이다. 조부 그루퍼드 압 니콜라스는 디네프워 성의 영주이자 카마더녀 뉴턴 하우스의 지주였으며, 외할아버지인 토머스 그루퍼드는 웨일스의 소왕국인 데후바르트 왕국 왕실의 일원으로 12세기에 잉글랜드 왕국에 복종한 대표적인 웨일스 군주인 리스 압 그루퍼드의 후손이었다. 장미 전쟁이 발발했을 때, 아버지 토머스 압 그루퍼드는 랭커스터 왕조를 지지했다. 그러나 토우턴 전투에서 랭커스터군이 와해된 뒤, 토머스는 요크 왕조 추종자들에 의해 카레그 센넨 성에서 포위당했고, 1462년 항복했다. 그 후 아버지 토머스가 부르고뉴 공국으로 망명했을 때, 리스도 그를 따라갔다. 그들은 아마도 1467년경에 웨일스로 돌아왔을 것이다.

아버지 토머스가 1474년에 사망했을 때, 두 형은 이미 죽어서 리스가 가무늬 영지를 물려받았고, 외가의 광대한 영지도 물려받았다. 그는 에드워드 4세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그를 위해 웨일스 궁병대를 보내줬으며, 1483년 버킹엄 공작의 반란이 발발했을 때 버킹엄 공작과 영지 분쟁이 있었기 때문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3세는 리스가 반란을 일으킬 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고, 그의 유일한 적장자인 그루퍼드를 인질로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충성심을 확보하기 위해 연간 40마크의 연금을 지불했다. 리스는 리처드 3세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비밀리에 브르타뉴 공국에서 망명생활하던 헨리 튜더와 연락해, 그가 웨일스로 상륙할 때 지원해주겠다고 약속했다.

1485년 8월 7일 헨리 튜더가 펨브로크셔에 상륙했을 때, 리스는 리처드 3세로부터 헨리 튜더를 제압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8월 16일 웰시풀에서 2,000 장병을 이끌고 헨리 튜더에게 귀순했다. 그 후 그는 1485년 8월 22일 보스워스 전투에 참여해 헨리 7세가 리처드 3세를 꺾고 잉글랜드의 유일한 국왕이 되는 데 기여했다. 웨일스 시인 구토르 글린은 리처드 3세의 상징인 멧돼지를 언급하면서, 리스가 멧돼지를 죽이고 머리를 깎았다고 기록했다. 이는 리스가 장창을 사용해 리처드 3세를 직접 찔러 죽였다는 걸 암시한다고 여겨졌지만, 리스의 웨일스 창병 중 한 명이 왕을 죽였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부르고뉴 연대기 작가 장 몰리네는 리스의 부하 중 한 사람인 웨일스인이 창으로 리처드 3세에게 치명타를 가했다고 밝혔다.

리스는 1486년 브레콘에서 발발한 요크파 잔당의 반란을 진압했고, 1487년 램버트 심넬의 반란 진압 작전에 참여했으며, 뒤이은 퍼킨 워벡을 상대로 한 원정에도 참여하는 등 헨리 7세에 대한 변함엇는 충성심을 보여줬다. 또한 1497년 콘월 농민 반란 진압에도 참여해 블랙 히스 전투에서 반란군 지도자인 제7대 오들리 남작 제임스 투쳇을 생포했고, 그 공로로 베너릿 기사에 선임되었다. 그는 이러한 공적에 대한 보답으로 사우스 웨일스에서 많은 토지와 수익성 있는 관직을 받았다. 그가 역임한 관직은 브래컨셔의 보안관, 카마던셔와 카디건셔의 재판관, 하버포드웨스트, 라우즈, 빌스의 대법관, 사우스 웨일스의 사법관, 그리고 전 웨일스 총독이었다.

1505년 가터 기사단의 일원에 선임되었고, 1507년 케어우 성에서 대규모 기사 토너먼트를 개최했다. 헨리 7세가 사망한 뒤 헨리 8세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1513년 헨리 8세의 플아스 원정에 참여해 스퍼스 전투에 참여하여 프랑스 기병대 군기 4개를 탈취하는 공적을 세웠다. 1520년에는 헨리 8세가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를 접견했을 때 그의 곁은 수행한 가터 기사 중 한 사람이었다. 1525년경 카마던셔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카마던 수도원에 안장되었다가 헨리 8세가 수도원을 폐지한 뒤 역시 카마던에 있는 성 베드로 교회로 이장되었다.

리스는 생전에 에파 압 헨리, 조넷 매튜와 잇달아 결혼했으며, 여러 정부와 여러 사생아를 낳았다. 그의 유일한 적장자였던 그루퍼드 압 리스 압 토머스는 아버지보다 4년 빠른 1521년에 사망했다. 그의 영지는 손자이자 상속인인 리스 압 그루퍼드에게 상속될 예정이었지만, 헨리 8세는 이를 압수하여 초대 헤리퍼드 자작이자 10대 샤틀리 페러스 남작 월터 데버루에게 넘겨줬다. 리스 압 그루퍼드는 이에 분개해 월터 데버루와 분쟁을 벌이고 카마던 시민들을 선동했다가 1531년 헨리 8세에 의해 반역 혐의로 참수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