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의 오페라 | |||||||
리엔치 |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 탄호이저 | 로엔그린 | 트리스탄과 이졸데 |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 니벨룽의 반지 | 파르지팔 |
Rienzi
리엔치 서곡 |
1. 개요
리하르트 바그너가 작곡한 5막의 오페라로 원래 제목은 Rienzi, der Letzte der Tribunen(마지막 호민관 리엔치)이다. 전형적인 프랑스식 그랜드 오페라이며 바그너의 출세작이자 당대 최고의 인기작이었다. 극 내용은 실존인물을 바탕으로 한 소설에 기반하고 있으며 대본은 바그너가 직접 썼다.곡 전체에서 선배 작곡가인 지아코모 마이어베어 등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그랜드 오페라답게 발레나 화려한 무대장치 등 볼거리가 많고 음악도 상당히 웅장하고 화려하다. 현재는 후술되는 이유로 서곡만 가끔 연주될 뿐 오페라 자체는 별로 공연되지 않고 있지만 바그너 당대에는 큰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었다.
2. 작곡과 초연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항목과 민나 플라너 항목에 있듯이 바그너와 그의 첫 부인이 된 민나 플라너는 정말 우여곡절 끝에 결혼했으며, 결혼 후에도 애정문제로 삐걱거리고 빚쟁이들에게 쫓겨 다니는 등 온갖 풍파를 겪은 후에 1839년 간신히 프랑스 파리에 살림을 차렸다. 하지만 프랑스에서의 생활도 녹록지 않아서 바그너는 한동안 악보를 사보하거나 음악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등으로 푼돈을 받아서 연명해야 했다.그럼에도 그가 프랑스에서 3년 가까이 버틴 것은 자신의 오페라 '리엔치'가 프랑스에서 성공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리엔치는 영국의 작가 에드워드 불워-리튼(Edward Bulwer-Lytton, 1803 - 1873)[1]의 동명의 소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이 소설의 주인공 콜라 디 리엔초(Cola di Rienzo, 1313–1354)는 실존인물로 중세 로마의 공화주의자였으며 자신이 추진한 개혁이 실패하고 비참하게 죽는다. 개혁의 방향은 상당히 다르지만 150년 후에 등장한 사보나롤라가 연상되는 인물인데, 이 이야기에 매료된 바그너는 리가에서 지휘자 생활을 하던 1837년(또는 1838년 초)부터 대본 작업에 착수하였다.
바그너는 리엔치 이전에도 요정(Die Feen, 1834)과 연애금지(Das Liebesverbot, 1836)라는 오페라를 쓴 적이 있었는데, 요정은 카를 마리아 폰 베버의 영향이 많이 보이는 독일 낭만파식 오페라이고 연애금지는 로시니나 빈센초 벨리니의 작품을 본뜬 이탈리아 낭만파 풍의 오페라였다. 이 두 작품의 작법은 습작 수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2]
프랑스에 온 바그너는 당시 프랑스에서 크게 유행하고 있던 그랜드 오페라 양식에 주목했고, 이 양식에 맞추어 리엔치를 작곡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래서 리엔치는 마이어베어를 비롯해서 가스파레 스폰티니(Gaspare Spontini, 1774 – 1851)나 프로멘탈 알레비(Fromental Halévy, 1799-1861)[3] 등 당시 프랑스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던 오페라 작곡가들의 작품을 많이 참고해서 작곡되었다.
바그너는 생활고에 시달려 가면서 1840년에 일단 전체 오페라를 완성했는데, 문제는 공연이었다. 그랜드 오페라는 발레나 군악대 행진, 화려한 무대장치 등을 동원해서 볼거리가 많고 호화로운 장면을 연출하는 것이 특징이며 그에 걸맞게 연주자와 출연자들을 많이 동원하고 음악도 굉장히 화려하다. 이런 오페라를 공연하려면 당연히 엄청난 비용이 필요했기 때문에 혹시나 오페라가 망하면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듣보잡급의 작곡가였던 바그너에게 이런 위험을 감수하고 선뜻 공연을 허락해줄만한 극장은 당연히 없었다. 바그너는 어떻게든 리엔치의 공연 성사를 위해 여기저기 알아보던 와중에 또 빚쟁이들에게 쫓겨서 파리를 떠나 파리 근교로 도망가야 했다.
다행히 이 때 바그너의 은인이 나타났는데, 그가 바로 마이어베어였다. 마이어베어는 바그너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경제적으로 도와줬으며 그의 작품이 상연될 곳도 물색해 주었다. 마이어베어는 이 작품이 독일어로 되어 있는 탓에 당장 프랑스 무대에 올리기 쉽지 않다고 보고 독일 초연을 권유하는 한편 드레스덴에 있는 오페라극장의 감독으로 취임할 수 있도록 힘써줬다. 훗날 마이어베어의 뒤에 칼을 꽂은 게 바그너란 걸 생각해보면 화근을 키운 셈이지만.
마이어베어의 도움으로 바그너는 드디어 1842년 드레스덴 오페라극장의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지긋지긋한 고생길을 끝낼 수 있었다. 리엔치는 같은 해에 바그너의 지휘로 드레스덴 오페라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3. 작품에 대해
우여곡절 끝에 초연이 성사된 리엔치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의 성공으로 인해 바그너는 본격 오페라 작곡가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으며 이듬해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성공으로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입지를 완전히 굳혔다. 리엔치가 초연될 때는 공연시간이 막간 시간을 포함해서 무려 6시간이 넘었다. 이 때문에 청중들이 중간에 나가버릴까봐 걱정이 된 바그너는 시간 경과를 알 수 없도록 일부러 무대에 있는 시계를 치워버렸는데, 우려와 달리 공연이 끝날 때까지 아무도 나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작품의 엄청난 규모 때문에 이틀에 나누어 공연을 하자는 아이디어도 나왔는데 실행되지는 않았으며 대신 내용을 좀더 간소화시켜서 공연시간을 많이 줄였다.현재는 오페라가 잊혀진 관계로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리엔치는 바그너 생전에는 그의 모든 오페라 작품 가운데 가장 공연횟수가 많은 작품이었다. 그러나 단순히 공연 횟수가 많았다는 데이터를 근거로 리엔치가 바그너 생전에 가장 인기가 높았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이 있지만 이는 적절치 못한 주장이다. 리엔치는 바그너 최초기 작품으로 다른 작품보다 바그너 생전에 누적 공연 횟수가 높을 수 밖에 없다. 바그너의 다른 초기작품인 로엔그린조차 이런저런 사정으로 1850년에야 초연되었고, 로엔그린 다음 작품은 15년이란 오랜 공백기를 거쳐 1865년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초연까지 기다려야했는데, 이는 리엔치 초연 이후 무려 23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따라서 1842년 초연된 리엔치가 바그너 생전에 가장 많이 공연된 사실은 당연한 것이고 특별할 것이 없는 일이다. 게다가 리엔치는 당시로서는 규모가 큰 작품이었겠지만, 이후 바그너의 대작들에 비하면 소규모 작품에 해당한다. 당장 탄호이저부터 3관 편성에 베이스 클라리넷, 잉글리쉬 혼, 하프, 베이스 트럼본 및 각종 타악기 등 당시 기준으로 정규 오케스트라 편성에서 벗어난 특이 악기들을 대거 편성하고 있다. 이 때문에 중소 규모 극장에서 연주하는 것 자체가 상당한 난관이 있다. 이에 반해 리엔치는 트럼펫이 증원된 것을 제외하면 베토벤 교향곡 수준의 당시 표준적인 오케스트라 편성을 따르고 있어 중소 규모 극장에서도 공연이 가능했다. 이런 점을 감안해야 하며 단순히 바그너 생전에 연주 횟수가 가장 많다는 데이터를 근거로 이 작품이 바그너 생전에 가장 인기가 높은 작품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류이다. 바그너 생전에도 리엔치는 그 화제성에서 바그너의 다른 작품들에 밀렸다.
어쨌든 이 작품이 당시에 상당히 인기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바그너 당시 유럽은 프랑스 혁명의 분위기를 타고 각지에서 시민혁명에 대한 열망이 높은 시기였고, 실패한 공화주의자이자 개혁가였던 리엔치의 이야기는 당시 시민들이 감정이입을 하기 딱 좋은 주제였다.[4] 한편으로 마이어베어풍의 그랜드 오페라는 프랑스를 넘어 유럽 각지에서 인기를 끌고 있었고, 리엔치는 그런 그랜드 오페라 혹은 그 영향을 받은 비슷한 부류의 작품 중에서 단연 최고의 인기를 얻은 작품이었다. 리엔치의 이런 인기는 바그너 사후에도 한동안 지속돼서 음악사조가 확실하게 바뀌는 20세기 극초반까지는 꽤 자주 공연되었다.
이처럼 리엔치는 바그너 생전에 작곡가의 명성과 자금의 원천이 된 스테디셀러였지만 정작 바그너는 이 작품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으며 바그너 캐논에도 포함시키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리엔치는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이후 확립된 바그너의 오페라 양식과 동떨어져 있으며 마이어베어나 스폰티니의 음악수법을 많이 베끼다시피 했기 때문에 독창성도 부족한 편이다. 한스 폰 뷜로가 리엔치를 가리켜 '마이어베어 최고의 걸작 오페라'라고 농담을 했을 정도.
또한 규모에 비해 내용이 빈약한 것도 문제인데, 공연시간 자체는 길지만 발레나 무대 연출 등 외적인 요소를 표현하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5] 정작 극의 내용은 단촐하고 극적인 요소도 부족하다. 음악 역시 깊이가 부족하고 피상적이라는 평을 받고 있는데, 마이어베어의 영향을 받아 화려하고 웅장하고 또 아름답지만 상대적으로 극적인 표현이나 등장인물의 내면에 대한 묘사가 부족하다. 그래서 오페라 내용만 보면 리엔치가 정치가로서 완전히 실패하고 동생과 함께 불에 타 죽는 처참한 비극이지만 음악을 들어보면 별로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
바그너 역시 리엔치에 이런 약점들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특히 자신의 은인이었던 마이어베어와 적으로 돌아선 후 이 작품에 대한 반감은 더 심해졌다. 그래서 이 작품을 버린 작품으로 취급하고 자신의 다른 역작들보다 더 자주 공연되는 것을 별로 달가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리엔치는 수준 이하의 졸작은 아니며, 19세기 전반기까지 만들어진 당대의 오페라 중에서 꽤나 잘 만들어진 수작에 속한다. 리엔치는 경쟁하던 당대 그어떤 그랜드 오페라보다 자주 공연되었고 유명했다. 리엔치는 기본적으로 음악이 훌륭하고 주제도 당시 기준으로 시사성이 있는데다가 독일어 대사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창법이 적용되는 등 눈여겨볼만한 부분도 꽤 있다. 시대를 초월하는 명작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당시에 스테디셀러가 될만한 음악성은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는 것. 바그너 역시 틈이 날 때마다 부분적으로 개작하거나 대사를 바꾸는 등 리엔치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다.
이 리엔치는 현재는 자주 공연되지 않는데, 드물게나마 공연을 할 때는 발레를 비롯한 오페라 외적인 요소를 모두 빼거나 대폭 축소해서 대략 2시간 반~3시간 정도로 공연시간을 맞춘다. 리엔치가 5막짜리 오페라라는 것을 감안하면 꽤 짧은 편.
4. 줄거리
배경은 14세기 중반의 로마.교황의 공증인 콜라 디 리엔치(Cola di Rienzi)는 일종의 공화주의자로 로마 귀족들의 권력을 시민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역설하는 사람이었다. 로마 귀족들은 당연히 그를 미워했는데, 귀족파였던 오르시니(Orsini)와 일당들이 리엔치의 여동생 이레네 리엔치(Irene Rienzi)를 납치하려고 하지만 스테파노 콜론나(Stefano Colonna)가 반대해서 무산된다. 스테파노 콜론나의 아들 아드리아노가 이레네 리엔치의 애인이었기 때문.
리엔치는 시민들 앞에서 감동적인 연설을 하고 시민들로부터 왕관을 받지만 이를 거절하는 대신 호민관(Tribune)이 된다. 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귀족들은 리엔치를 죽일 계획을 세운다. 행동에 나선 오르시니는 외교 사절을 만나고 있던 리엔치를 단검으로 찌르지만 귀족들이 자신을 해치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리엔치는 옷 안에 체인메일을 입고 있었고, 결국 암살은 실패로 돌아간다. 아드리아노 콜론나가 리엔치에게 자비를 구하자 리엔치는 자신에 대한 지지를 조건으로 오르시니를 풀어준다.
하지만 오르시니를 비롯한 귀족들은 다시 리엔치에게 반기를 들었고, 이번에는 용병 부대를 사서 로마를 점령하려고 한다. 리엔치의 시민군이 귀족들과 용병대를 막아내는 과정에서 오르시니와 스테파노 콜론나 등이 살해당한다. 이에 아드리아노가 리엔치에 대한 복수를 결심하고 그를 죽이려고 하지만 이레네와 리엔치가 함께 있기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한편 귀족과 손을 잡은 교황은 리엔치와 그의 일파를 파문에 처하고 로마를 떠나라고 명령하고, 이에 시민들도 리엔치로부터 마음이 떠나서 그를 적대시한다. 이레네는 리엔치와 아드리아노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오빠를 따르겠다고 한다.
성난 군중들이 카피톨 신전에 신전에 불을 지른다. 리엔치와 이레네가 불붙은 발코니에 서 있는데, 리엔치가 군중들에게 연설을 하려고 하지만 돌이 날아들어서 하지 못한다. 결국 건물이 무너지면서 리엔치와 이레네는 돌에 깔려 죽고, 그들을 구하려고 애썼던 아드리아노까지 죽는다.
아드리아노 콜론나는 리엔치를 지지하다가 부친의 복수를 하기 위해 그를 죽이려고 하는데, 막판에는 또 생각이 바뀌어서 리엔치와 동생을 구하려고 하다가 본인까지 목숨을 잃는다. 한편으로 리엔치를 열렬히 지지하던 로마 시민들이 자신들에게 특별한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닌데 갑자기 그를 죽이려고 든다.
별도의 지식 없이 리엔치를 듣게 되면 이런 종잡을 수 없는 캐릭터 설정과 스토리라인이 굉장히 혼란스럽게 느껴지는데, 이는 원작 소설에 나오는 긴 서사를 극음악용으로 축약하면서 불가피하게 생긴 설정구멍이다. 바그너 당시에는 소설 리엔치가 꽤 유명해서 청중들이 기본적인 내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건의 전개를 다 다루지 않고 중요한 장면들만 부각시켜도 큰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5. 여담
이 리엔치는 바그너와 리스트를 평생지기로 만들어준 작품이었다. 리스트가 한창 피아니스트로 인기를 구가하던 1840년에 연주회를 위해 프랑스 파리를 방문했을 때 바그너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바그너는 리스트를 극찬하면서 그의 팬을 자처했지만 리스트는 무명의 음악가였던 바그너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리엔치가 성공을 거둔 후인 1844년, 리스트는 드레스덴을 방문했다가 이 오페라를 관람하게 되는데 이 때 깊은 인상을 받아서 3막이 끝난후 막간에 따로 바그너와 만나서 인연을 맺는다.[6] 이 때 리스트는 바그너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의 후원자이자 친구가 되었으며, 심지어 나중에는 본의 아니게 바그너의 장인이 되었다. 1849년 바그너가 드레스덴 봉기에 가담했다가 지명수배를 받게 되자 당시 바이마르(Weimar)의 악장으로 있던 리스트에게 의탁하는데, 리스트는 그를 1주일 정도 숨겨주고 가짜 여권을 만들어서 스위스로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리스트는 이듬해 바그너의 새 오페라 로엔그린의 초연을 담당하기도 했다.
리스트는 오페라 리엔치의 음악을 꽤 좋아했으며 1859년에는 리엔치 3막에 나오는 합창, 1막에서 리엔치가 군대를 부르는 아리아 등의 선율을 활용해서 환상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1] 영국의 정치가이자 작가로 시, 소설, 에세이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작품을 남겼으며 당대에는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현재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그가 쓴 폼페이 최후의 날(The Last Days of Pompeii, 1834)은 영화화되기도 하는 등 현재까지도 유명하다.[2] 그나마 최근 들어서 요정은 재평가 여론도 있지만, 연애금지는 아예 바그너 오페라 중 최악의 작품이라는 평가까지 받는다.[3] 오늘날에는 거의 잊혀진 작곡가이지만 이 분의 대표작 유태인 여인(Juive, 1835)은 현재에도 종종 연주된다. 본인이 유태인이었기 때문인지 이 작품도 종교적 관용을 주제로 하고 있는데, 오늘날에도 충분히 시사성이 있는 주제이다.[4] 바그너 본인도 1849년의 드레스덴혁명에 가담했다가 지명수배를 받고 한동안 도망자 신세가 되기도 했다.[5] 예를 들어 2막에 등장하는 발레는 원작대로 하면 공연시간이 30분이 넘는다.[6] 이때 리스트를 따라다녔던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1세의 정부(情婦) 롤라 몬테즈가 두 사람의 만남에 끼어들어서 분위기를 망쳤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런 방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분위기는 훈훈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