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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13 12:44:17

리처드 드 클레어(제6대 글로스터 백작)

성명 리처드 드 클레어
Richard de Clare
생몰년도 1222년 8월 4일 ~ 1262년 7월 15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서퍽주 클레어 성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켄트주 캔터베리 인근 에셰머필드
아버지 길버트 드 클레어
어머니 이사벨라 마셜
형제 아그네스, 아미스, 이사벨라, 윌리엄, 길버트, 페트로닐라
아내 마거릿 드 버그, 모드 드 레이시
자녀 이사벨라, 길버트, 토머스, 보고, 마거릿, 로헤사, 에글란티나
직위 제7대 하트퍼드 백작, 제8대 클레어 남작, 제6대 글로스터 백작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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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 귀족, 군인. 잉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 등지에 막강한 영지를 확보했으며, 헨리 3세시몽 드 몽포르 간의 대립이 벌어졌을 때 둘 사이를 저울질하며 이득을 챙겼다.

2. 생애

1222년 8월 4일 잉글랜드 왕국 서퍽주 클레어 성에서 제5대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와 초대 펨브로크 백작 윌리엄 마셜의 딸인 이사벨라 마셜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1320년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그의 나이는 겨우 8살이었다. 클레어 가문은 잉글랜드, 웨일스에 걸쳐 광대한 영지를 누렸기에, 그의 후견인으로 누가 되는지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문제였다. 당시 잉글랜드 궁정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이었던 초대 켄트 백작이자 대법원장 휴버트 드 버그헨리 3세를 구슬려서 자신이 리처드의 후견인이 되도록 했다. 리처드의 어머니 이사벨라는 1231년에 헨리 3세의 남동생인 콘월의 리처드와 재혼했다.

1232년 휴버트 드 버그가 몰락한 후, 헨리 3세는 리처드의 양육권을 윈체스터 주교 피에르 데 로슈에게 넘겼다. 휴버트 드 버그의 아내인 스코틀랜드의 마거릿[1]은 가족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비밀리에 리처드를 자기 딸 마거릿과 결혼시켰다. 결혼은 1236년에야 알려졌다. 일부 연대기는 1237년에 마거릿이 사망했다고 밝혔고, 다른 연대기는 국왕의 허락을 받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두 사람의 결혼이 무효 처리되었다고 기술했다. 여기에 휴버트는 아내가 자기가 모르는 사이에 리처드와 자기 딸의 결혼을 추진했다는 걸 증명해야 했다.

1234년, 피에르 데 로슈는 클레어 가문 재산 일부에 대한 통제권을 리처드 어머니의 형제인 제4대 펨브로크 백작 길버트 마셜에게 양도했다. 그 후 피에르가 실각한 뒤, 헨리 3세가 리처드의 후견인이 되었다. 헨리 3세는 리처드의 아내가 될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기가 총애하는 뤼지냥 가문의 일원을 고려했지만, 이는 성사되지 않았다. 1238년, 리처드는 링컨 백작 존 드 레이시의 딸인 모드 드 레이시와 결혼했다. 리처드는 1243년이 되어서야 성인으로 인정받았고, 헨리 3세에게 경의를 표한 뒤 자기가 누리는 영지의 영주임을 인정받았다.

리처드는 아버지로부터 글로스터셔, 하트더프셔, 클레어, 톤브리지 등지의 영지 및 저택 여러 개를 물려받았으며, 어머니로부터 웨일스 국경지대의 우스크 시를 물려받았고, 아일랜드에서 킬케니 등지를 소유했다. 이후 1258년과 1259년에 헌팅던셔 내 상당한 영지와 도싯의 수익성이 좋은 여러 부동산을 획득했다. 이때 리처드의 연간 수입은 4,000파운드에 달했다. 이렇듯 막대한 수입과 광대한 영지, 웨일스 국경지대에 집중된 점으로 인해, 리처드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귀족이 되었다.

리처드의 정치적 목표는 웨일스 통치자들의 끊임없는 위협을 받는 웨일스 국경지대에서 권력을 강화하고, 헨리 3세와 귀족들 간의 대립이 격화되는 걸 이용해 전국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그는 초기엔 자기 영지에서 권력을 강화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는 자기 영지를 클레어와 튜크스베리를 중심으로 행정 및 재정 단위로 개편했으며, 킬케니에 있는 아일랜드 영지에 대한 통제권을 확립하고자 1247년과 1253년에 킬케니를 방문했다. 그의 재산은 그가 고용한 전문 관료들에 의해 효율적으로 관리되었다.

1240 ~ 1242년, 리처드는 전임 웨일스 대공 허웰린 압 요르웨르스의 통제하에 있던 글로모건과 그윈루그를 비공식적으로 소유했으며, 웨일스 통치자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 클레어 성을 중심으로 짧은 군사 작전을 사법 절차와 결합하여 수행했다. 그 결과, 그는 웨일스 국경지대 내 모든 웨일스 통치자의 위협을 제거했다. 1247년 리처드 시워드는 헨리 3세에게 호소해 리처드의 왕실에 준한 권위에 도전하려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240년대 말, 웨일스 국경지대에서 리처드의 위세는 절정을 이뤘고, 누구도 감히 그에게 대적할 엄두를 못 냈다.

웨일스 국경지대에서 강력한 세력을 구축한 리처드는 자연스럽게 잉글랜드 정계에서 주목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는 계부인 콘월의 리처드의 측근이 되었고, 1242년과 1250년에 콘월의 리처드와 함께 유럽 대륙을 여행했으며, 1256~1257년 계부가 로마 왕으로 선출되기 위해 독일로 파견된 사절단에 속하기도 했다. 1352년 자기 장남 길버트를 앙굴렘 백작 위그 11세 드 뤼지냥의 딸이자 헨리 3세의 조카인 앨리스 드 뤼지냥과 결혼시켰다. 1254년 헨리 3세와 함께 프랑스로 간 후 부르고스에 갔고, 그해 10월 부르고스에서 잉글랜드 왕위 계승자인 에드워드와 카스티야 공주 엘레노어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한편, 리처드는 1247년 퐁티니에 있는 켄터베리의 성 에드먼드 예배당을 순례했고, 1250년에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순례했으며, 1240~1250년대에 프랑스에서 열린 마상창시합에 반복적으로 참여했다.

1256년, 귀네드 왕국의 허웰린 압 그루퍼드가 웨일스인들을 끌어모아 반란을 일으켜 웨일스 전역에서 크고 작은 무력 충돌이 벌어졌고, 클레어 가문의 영지 역시 자연스럽게 불안해졌다. 리처드는 자기가 가진 군사력만으로는 웨일스인들을 제압할 수 없다고 여기고, 헨리 3세가 대규모 병력을 웨일스로 파견해 반란을 진압해 주길 희망했다. 그러나 헨리 3세는 웨일스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고 둘째 아들 랭커스터의 에드먼드시칠리아 왕국의 국왕으로 세우는 데 집착했고, 리처드는 이에 대해 강한 불만을 품었다.

리처드는 다른 귀족들과 연합해 국왕의 정책을 시정하기로 마음먹고, 1258년 4월 레스터 백작 시몽 드 몽포르, 노퍽 백작 로저 비고드와 동맹을 맺었다. 그해 6월, 그는 옥스퍼드 의회에 참가했고, 다른 귀족들과 함께 헨리 3세에게 왕의 자의적인 통치를 금지하고 정책 결정과 집행을 정하는 위원회를 수립하며, 3년에 한 번씩 소집하는 의회가 위원회를 감시한다는 내용의 옥스퍼드 조례에 서명하라고 강요했다. 헨리 3세는 이들의 압력에 굴복해 옥스퍼드 조례를 따르겠다고 서약했다.

1258년, 헨리 3세의 삼촌인 펨브로크 백작 윌리엄 드 발랑스가 클레어 성의 세네샬인 월터 드 스코트니를 포섭해 리처드를 독살하게 했다. 그러나 계획은 발각되었고, 월터 드 스코트니는 체포된 뒤 모든 걸 밝혔다. 윌리엄 드 발랑스는 왕의 삼촌인 점이 감안되어 죄를 묻지 않았지만, 월터 드 스코트니는 1259년 초에 교수형에 처했다.

그 후 옥스퍼드 조례를 주도한 세 대귀족은 곧 개혁의 방향을 놓고 의견 대립을 벌였다. 시몽 드 몽포르는 대영주와 왕실의 권위와 권력에 더 많은 제한을 가하는 급진적인 개혁을 선호했고, 로저 비고드는 온건한 개혁을 추구했으며, 리처드는 왕의 권력을 지나치게 제한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게다가 시몽 드 몽포르는 웨일스인의 공세로 고전하는 리처드를 도와주지 않았고, 리처드는 이에 강한 불만을 품었다. 1260년 4월, 리처드와 시몽 간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내전의 기운이 감돌았지만, 콘월의 리처드가 중재해 양자를 화해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 후 시몽이 주도하는 개혁에 가담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그는 왕당파가 되었다. 하지만 1261년 6월, 헨리 3세가 교황 우르바노 4세가 자신이 옥스퍼드 조례를 지키겠다고 서약한 걸 풀어줬다고 선언하면서, 장남 에드워드 왕자의 지원을 받아 공모자들을 보안관 직위에서 해임하고 여러 왕궁의 통제권을 탈환하자, 그는 시몽과 일시적으로 연합해 왕으로부터 독립된 자신들만의 의회를 소집해 잉글랜드 전역에 경쟁적인 지방 정부 체계를 세웠다. 헨리 3세는 아내 엘레오노르의 협조를 받아 프로방스에서 대규모 용병대를 데려와서 이에 맞섰다. 이제 내전이 벌어지는 듯했지만, 왕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게 몹시 껄끄러웠던 귀족들은 한발 물러섰다. 리처드는 헨리 3세 편으로 돌아섰고, 시몽은 프랑스로 자진해서 망명했으며, 귀족 위원회는 붕괴하였다.

그 후 헨리 3세는 귀족들에게 <킹스턴 조례>에 동의하라고 강요했다. 이 조약은 콘월 백작 리처드를 감독관으로 선임하고, 콘월 백작 리처드가 타협을 끌어내지 못하면 프랑스 국왕 루이 9세가 지원하는 중재 시스템을 도입해 왕과 귀족들 간의 미해결 분쟁을 해결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귀족들이 이렇게 하면 프랑스 왕실의 간섭이 심해지니 철회해달라고 청하자, 헨리 3세는 킹스턴 조례를 완화할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곧 차남 에드먼드를 시칠리아 왕위에 올리려는 인기 없는 정책을 재개했고, 자기에게 대항했던 귀족들에게서 자금을 뜯어내려 했다. 이에 귀족들은 왕에게 강한 불신을 품었다.

이렇듯 분위기가 좋지 않던 1262년 7월 14일, 리처드는 39세의 나이로 캔터베리 인근 에셰머필드에서 사망했다. 사망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는데, 일부 연대기에서는 리처드가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기술했지만, 클레어 가문의 역사 연구에 가장 중요한 자료인 튜크스버리 수도원 연대기는 이에 대해 침묵했다. 클레어 가문의 작위 및 영지는 장남 길버트 드 클레어에게 돌아갔다.

3. 가족 관계



[1] 1193~1259, 스코틀랜드 국왕 일리엄 1세의 딸[2] 콘월의 리처드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