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adcab8><colcolor=#000> 알랑송 공작부인 나바라 왕국 헨리케 2세의 왕비 마르그리트 당굴렘 Marguerite d'Angoulême | |
이름 | 마르그리트 당굴렘 (Marguerite d'Angoulême) |
출생 | 1492년 4월 11일 |
프랑스 왕국 앙구무아 앙굴렘 | |
사망 | 1549년 12월 21일 (향년 57세) |
프랑스 왕국 가스파뉴 오도스 | |
배우자 | 알랑송 공작 샤를 4세 (1509년 결혼 / 1525년 사망) |
헨리케 2세 (1526년 결혼) | |
자녀 | 호아나 3세, 호아네스 |
아버지 | 앙굴렘 백작 샤를 |
어머니 | 사보이아의 루이사 |
형제 | 프랑수아 1세 |
종교 |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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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바라 왕국 헨리케 2세의 왕비이자 프랑스 왕국 프랑수아 1세의 누나.2. 생애
1492년 4월 11일 앙굴렘 백작 오를레앙의 샤를과 사보이아의 루이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마르그리트가 태어나고 1년 반 후 미래에 프랑스 국왕이 되는 동생 프랑수아 1세가 태어났다. 아버지 앙굴렘 백작은 프랑수아가 태어난 직후 병으로 사망했다. 그럼에도 남매는 어머니의 살뜰한 보살핌 아래 편안하고 즐거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1498년 친척 루이 12세가 즉위하면서 궁중에서 살게 되었다. 어머니 사보이아의 루이사는 당시 사회적 통념과 달리 딸인 마르그리트도 아들 못지 않게 좋은 교육을 시켰다. 마르그리트는 예술, 정치 등 다양한 분야를 공부하며 고전 철학과 종교 서적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 학구적인 여성으로 성장했다.1509년 10월 9일 알랑송 공작 샤를 4세과 결혼했다. 결혼 후에도 남동생 프랑수아와 가까운 사이를 유지했다. 1515년에 동생이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한 후 마르그리트는 프랑스 궁정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1525년 2월 파비아 전투에서의 패배로 프랑수아 1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겸 스페인 국왕 카를 5세의 포로가 되었을 때 협상에 참여해 동생의 무사석방과 귀환에 기여했다. 기뻐할 틈도 없이 패전의 책임으로 비난을 받던 남편 알랑송 공작이 같은 해에 숨을 거두어 과부가 되었다.
1527년 나바라 왕국 헨리케 2세와 재혼했다. 이 결혼으로 훗날 호아나 3세로 즉위하는 잔 달브레를 낳았으며, 호아나 3세가 낳은 아들 엔리크는 동생 프랑수아 1세의 발루아 왕조가 단절되자 앙리 4세로 즉위하여 부르봉 왕조를 개창한다.
3. 종교 활동과 문학
정치 뿐만 아니라 종교와 문학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마르그리트는 모(Meaux)의 주교 기욤 브리소네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종교 개혁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마르그리트는 성경 중심적인 종교 활동을 할 것을 촉구했으며, 성경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장려했다. 또한 초기 종교개혁가들을 위한 피난처를 마련해주었다.종교활동가, 예술가 등 여러 인문주의자들을 후원한 마르그리트는 본인 또한 뛰어난 작가였다. 마르그리트는 많은 시와 희곡을 썼으며, 말년에는 지적 교류와 시를 쓰며 주로 시간을 보냈다. 1549년 12월 21일 마르그리트가 숨을 거두고 약 10년 뒤, 가까운 친구였던 클로드 그뤼제가 마르그리트의 유작 엡타메롱(Heptameron)을 출판했다. 마르그리트의 대표작이자 걸작으로 손꼽히는 엡타메롱은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에서 영감을 받은 단편 소설집으로, 그 저자에 대해서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있었으나 마르그리트 당굴렘의 작품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4.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헨리케 2세 (Henry II of Navarre) | ||||
1녀 | 호아나 3세 (Jeanne III) | 1528년 11월 16일 | 1572년 6월 9일 | |
안토니오 1세 슬하 1남 1녀[3] | ||||
1남 | 호아네스 왕자 (Prince Joanes) | 1530년 7월 7일 | 1530년 12월 25일 |